[Motif in Art] 진주(pearl), 여성의 초상화에서 빛을 내다
입력 2019-06-28 12:39:12
수정 2019-06-28 12:39:12
[한경 머니 = 박은영 서울하우스 편집장·미술사가] 6월의 탄생석 진주는 특이하게 패류가 만들어내는 보석이다. 흠 없이 둥글고 은은한 광택이 도는 자연산 진주는 귀하고 아름다워 장신구로서 다양한 효과와 의미를 생산했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진주
여성의 초상화에 진주를 즐겨 그려 넣은 화가로 17세기 네덜란드의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가 있다. 그의 대표작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이름 모를 젊은 여성의 상반신을 묘사한 초상화다. 별다른 동작도 없고 배경도 그저 캄캄한데 소녀는 생기가 넘친다. 그것은 무엇보다 소녀의 눈동자와 입술과 귀걸이에 빛나는 흰색 반점들, 즉 아주 밝은 하이라이트 덕분이다.
소녀가 달고 있는 귀걸이는 인물의 상하좌우 각 끝점을 연결한 사각형의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즉, 머리 꼭대기에서 귀를 지나 어깨로 내려오는 수직선을 그으면 그 중심에 귀걸이가 위치한다. 그 위치는 화면에서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여기에 진주귀걸이를 배치한 것은 화가가 그것을 아주 중요시했다는 뜻이다. 그의 의중은 무엇일까.
진주는 탄생, 희망, 행복, 부유함을 뜻하며 흠 없이 하얀 진주는 순수함이나 순결함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기독교에서는 진주가 그리스도나 천국에 대한 비유이자 신앙심의 상징이 되곤 했다. 그러나 반대로 진주는 부의 과시에 따른 자만, 낭비, 허영, 음탕함의 상징으로서 인물의 부정적 속성을 나타내기도 했다.
페르메이르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에서 소녀의 유일한 장신구로 커다란 진주 하나만을 중요한 지점에 그려 넣었다. 그것이 진짜 진주라면 너무 무거울 뿐 아니라 소녀의 나이나 수수한 차림새에 걸맞지 않는다. 현실감을 희생해서라도 페르메이르는 가상의 진주를 통해 상징적·조형적 효과를 얻으려 했다. 여기서 진주는 분명 관람자를 사로잡는 유혹의 매체이지만 인물을 정숙하고 우아하며 고귀하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또한 조형적으로 그 진주는 구성의 중심으로서 시각의 초점이 되는데, 크기와 위치뿐 아니라 진주 표면이 강렬하게 반짝이기 때문이다. 그처럼 밝게 빛나는 효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화가가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라는 장치를 알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카메라 옵스큐라는 ‘어두운 방’이라는 뜻으로 오늘날 카메라의 기본 원리가 되는 것이다. 어두운 상자에 작은 구멍을 뚫어 빛을 통과시키면 상자 안쪽 반대 측면에 외부의 풍경이 거꾸로 맺힌다. 그 상의 윤곽을 따라 그리면 3차원의 대상을 2차원 평면에 쉽게 옮길 수 있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는 휴대용 카메라 옵스큐라가 개발돼 화가들이 즐겨 사용했다. 페르메이르는 어두운 상자 속에서 빛이 작은 알갱이로 보이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진주 귀걸이에 반사되는 밝은 빛을 주저 없이 흰색 물감 덩어리로 칠했다. 진주의 물질적 특성을 살려 신비로우면서도 생동감 있는 인물을 창조하게 된 것이다.
메리 튜더의 진주
가상의 진주가 아니라 역사 속에 현존하면서 논란과 의문을 불러일으킨 진주가 있다. 그것은 영국 여왕 메리 1세(메리 튜더)가 지녔던 진주다. 이 ‘메리 튜더의 진주’는 1554년 메리가 스페인의 펠리페 2세와 결혼할 때 선물로 받은 것이다. 이 시기에 제작된 메리 1세의 공식 초상화들 속에서 그 진주를 쉽게 볼 수 있다. 플랑드르 출신 화가 한스 에보르트(Hans Eworth)가 그린 초상화도 그중 하나다. 메리는 가슴에 펜던트를 달고 있는데 거기 큼직한 물방울 모양의 하얀 진주가 매달려 있다. ‘피의 메리’라는 섬뜩한 별명과 달리 진주는 메리 1세를 정숙한 신부이자 품위 있는 여왕으로 지칭하는 듯하다. 초상화 속 그녀는 신념에 찬 표정으로 자신의 뜻을 관철할 듯 당당하다. 그러나 권력도 잠시, 4년 후 메리는 좌절과 병마의 고통 속에서 사망한다. 이후 메리 튜더의 진주는 어떻게 됐을까.
진주의 행방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메리가 사망한 직후 스페인으로 반환됐다는 설과 그렇지 않다는 설이다. 두 가지 주장이 맞서는 이유는 그 주장들을 각각 뒷받침하는 두 개의 진주가 현재 남아 있기 때문이다.
먼저 스페인으로 반환됐다는 진주는 ‘라 페레그리나’라고 불리며 후대의 왕비들이 물려받았다. 스페인 궁정화가 후안 판토하 델라 크루즈(Juan Pantoja de La Cruz)가 그린 초상화에서 펠리페 3세의 왕비 마르가레타는 메리 1세의 것과 비슷한 진주를 달고 있다. 스페인 왕실에 계승된 이 진주는 19세기 초 스페인을 점령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가져가 조카인 나폴레옹 3세에게 전해졌고, 그가 망명했을 때 영국 귀족에게 팔렸다. 1969년 라 페레그리나가 런던 소더비 경매에 나오자 영화배우 리처드 버튼이 구입해 부인인 엘리자베스 테일러에게 선물했다. 버튼과 테일러 부부는 에보르트가 그린 <메리 1세>의 초화가 영국 국립초상화미술관에 소장되도록 후원하기도 했다. 그만큼 그 진주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지녔던 것이다. 2011년 테일러가 사망하자 라 페레그리나가 달린 그녀의 화려한 목걸이가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100억 원이 넘는 가격으로 낙찰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라 페레그리나가 메리 튜더의 진주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후 메리 튜더의 진주라는 또 다른 진주가 나타났다. 그 진주는 2004년 런던 크리스티 경매에서 한 보석상이 구입해 가지고 있다가 2013년 공개해 빅토리아앤앨버트미술관에서 전시했다. 크기가 65캐럿에 달해 라 페레그리나보다 좀 더 크고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진주로 여겨진다. 크기와 모양이 초상화 속 메리 튜더의 진주와 비슷하지만 지난 400년 동안의 행적을 알 수 없어 진위를 정확히 판단하기 어렵다.
진주는 수백 년간 많은 초상화들 속에서 인물의 덕성과 지위를 높이기도 하고 역설적으로 사치나 음행 등 부정적 의미를 전하기도 했다. 빛을 반사하는 진주의 광택은 페르메이르 같은 화가에게 화면 구성의 결정적 요소가 됐다. 메리 튜더의 진주처럼 초상화 속 희귀한 진주의 실제 행방을 추적하면 권력의 이동이나 국가들의 유대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권력자의 소유물이었던 진주는 오늘날 재력가의 소유물이 됐다. 어떤 점에선 상징적 가치보다 투자를 위한 경제적 가치가 더 크고 중요해진 것이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69호(2019년 06월) 기사입니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진주
여성의 초상화에 진주를 즐겨 그려 넣은 화가로 17세기 네덜란드의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가 있다. 그의 대표작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이름 모를 젊은 여성의 상반신을 묘사한 초상화다. 별다른 동작도 없고 배경도 그저 캄캄한데 소녀는 생기가 넘친다. 그것은 무엇보다 소녀의 눈동자와 입술과 귀걸이에 빛나는 흰색 반점들, 즉 아주 밝은 하이라이트 덕분이다.
소녀가 달고 있는 귀걸이는 인물의 상하좌우 각 끝점을 연결한 사각형의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즉, 머리 꼭대기에서 귀를 지나 어깨로 내려오는 수직선을 그으면 그 중심에 귀걸이가 위치한다. 그 위치는 화면에서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여기에 진주귀걸이를 배치한 것은 화가가 그것을 아주 중요시했다는 뜻이다. 그의 의중은 무엇일까.
진주는 탄생, 희망, 행복, 부유함을 뜻하며 흠 없이 하얀 진주는 순수함이나 순결함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기독교에서는 진주가 그리스도나 천국에 대한 비유이자 신앙심의 상징이 되곤 했다. 그러나 반대로 진주는 부의 과시에 따른 자만, 낭비, 허영, 음탕함의 상징으로서 인물의 부정적 속성을 나타내기도 했다.
페르메이르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에서 소녀의 유일한 장신구로 커다란 진주 하나만을 중요한 지점에 그려 넣었다. 그것이 진짜 진주라면 너무 무거울 뿐 아니라 소녀의 나이나 수수한 차림새에 걸맞지 않는다. 현실감을 희생해서라도 페르메이르는 가상의 진주를 통해 상징적·조형적 효과를 얻으려 했다. 여기서 진주는 분명 관람자를 사로잡는 유혹의 매체이지만 인물을 정숙하고 우아하며 고귀하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또한 조형적으로 그 진주는 구성의 중심으로서 시각의 초점이 되는데, 크기와 위치뿐 아니라 진주 표면이 강렬하게 반짝이기 때문이다. 그처럼 밝게 빛나는 효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화가가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라는 장치를 알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카메라 옵스큐라는 ‘어두운 방’이라는 뜻으로 오늘날 카메라의 기본 원리가 되는 것이다. 어두운 상자에 작은 구멍을 뚫어 빛을 통과시키면 상자 안쪽 반대 측면에 외부의 풍경이 거꾸로 맺힌다. 그 상의 윤곽을 따라 그리면 3차원의 대상을 2차원 평면에 쉽게 옮길 수 있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는 휴대용 카메라 옵스큐라가 개발돼 화가들이 즐겨 사용했다. 페르메이르는 어두운 상자 속에서 빛이 작은 알갱이로 보이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진주 귀걸이에 반사되는 밝은 빛을 주저 없이 흰색 물감 덩어리로 칠했다. 진주의 물질적 특성을 살려 신비로우면서도 생동감 있는 인물을 창조하게 된 것이다.
메리 튜더의 진주
가상의 진주가 아니라 역사 속에 현존하면서 논란과 의문을 불러일으킨 진주가 있다. 그것은 영국 여왕 메리 1세(메리 튜더)가 지녔던 진주다. 이 ‘메리 튜더의 진주’는 1554년 메리가 스페인의 펠리페 2세와 결혼할 때 선물로 받은 것이다. 이 시기에 제작된 메리 1세의 공식 초상화들 속에서 그 진주를 쉽게 볼 수 있다. 플랑드르 출신 화가 한스 에보르트(Hans Eworth)가 그린 초상화도 그중 하나다. 메리는 가슴에 펜던트를 달고 있는데 거기 큼직한 물방울 모양의 하얀 진주가 매달려 있다. ‘피의 메리’라는 섬뜩한 별명과 달리 진주는 메리 1세를 정숙한 신부이자 품위 있는 여왕으로 지칭하는 듯하다. 초상화 속 그녀는 신념에 찬 표정으로 자신의 뜻을 관철할 듯 당당하다. 그러나 권력도 잠시, 4년 후 메리는 좌절과 병마의 고통 속에서 사망한다. 이후 메리 튜더의 진주는 어떻게 됐을까.
진주의 행방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메리가 사망한 직후 스페인으로 반환됐다는 설과 그렇지 않다는 설이다. 두 가지 주장이 맞서는 이유는 그 주장들을 각각 뒷받침하는 두 개의 진주가 현재 남아 있기 때문이다.
먼저 스페인으로 반환됐다는 진주는 ‘라 페레그리나’라고 불리며 후대의 왕비들이 물려받았다. 스페인 궁정화가 후안 판토하 델라 크루즈(Juan Pantoja de La Cruz)가 그린 초상화에서 펠리페 3세의 왕비 마르가레타는 메리 1세의 것과 비슷한 진주를 달고 있다. 스페인 왕실에 계승된 이 진주는 19세기 초 스페인을 점령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가져가 조카인 나폴레옹 3세에게 전해졌고, 그가 망명했을 때 영국 귀족에게 팔렸다. 1969년 라 페레그리나가 런던 소더비 경매에 나오자 영화배우 리처드 버튼이 구입해 부인인 엘리자베스 테일러에게 선물했다. 버튼과 테일러 부부는 에보르트가 그린 <메리 1세>의 초화가 영국 국립초상화미술관에 소장되도록 후원하기도 했다. 그만큼 그 진주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지녔던 것이다. 2011년 테일러가 사망하자 라 페레그리나가 달린 그녀의 화려한 목걸이가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100억 원이 넘는 가격으로 낙찰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라 페레그리나가 메리 튜더의 진주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후 메리 튜더의 진주라는 또 다른 진주가 나타났다. 그 진주는 2004년 런던 크리스티 경매에서 한 보석상이 구입해 가지고 있다가 2013년 공개해 빅토리아앤앨버트미술관에서 전시했다. 크기가 65캐럿에 달해 라 페레그리나보다 좀 더 크고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진주로 여겨진다. 크기와 모양이 초상화 속 메리 튜더의 진주와 비슷하지만 지난 400년 동안의 행적을 알 수 없어 진위를 정확히 판단하기 어렵다.
진주는 수백 년간 많은 초상화들 속에서 인물의 덕성과 지위를 높이기도 하고 역설적으로 사치나 음행 등 부정적 의미를 전하기도 했다. 빛을 반사하는 진주의 광택은 페르메이르 같은 화가에게 화면 구성의 결정적 요소가 됐다. 메리 튜더의 진주처럼 초상화 속 희귀한 진주의 실제 행방을 추적하면 권력의 이동이나 국가들의 유대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권력자의 소유물이었던 진주는 오늘날 재력가의 소유물이 됐다. 어떤 점에선 상징적 가치보다 투자를 위한 경제적 가치가 더 크고 중요해진 것이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69호(2019년 06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