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문, 은밀한 술집

[한경 머니=정채희 기자 | 사진 각 사 제공] 숨겨진 문을 열면 펼쳐지는 은밀한 세계. 남들은 모르는, 비밀스런 공간이 건네는 유혹.



“여기 머물면 여기가 현재가 돼요. 그럼 또 다른 시대를 동경하겠죠. 상상 속의 황금시대. 현재란 그런 거예요. 늘 불만스럽죠. 삶이 원래 그런 거니까.”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홀로 파리의 밤거리를 배회하던 길(오언 윌슨 분)은 종소리와 함께 홀연히 나타난 차에 올라탄다.

그리고 매일 밤 그곳에서 1920년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을 만나 당대의 파리를 거닌다. 1920년대 파리의 음악을 들으며, 1920년대 파리의 술집에서 정담을 나누며.

◆‘금주법’ 마케팅 딴 비밀 공간 성행

영화 같은 일이 실제로도 재현된다면 어떨까. 나만 아는 숨겨진 비밀스런 공간에서, 시공간을 넘어 1920년대 그곳으로 도착할 수 있다면.

최근 영화 속 비밀 사교클럽과도 같은 은밀한 바들이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금주법’(미국 영토 내에서 알코올음료를 양조·판매·운반·수출입하지 못하게 하는 법)으로 모두가 음지에서 술을 즐겨야 했던 1920년대 뉴욕처럼, 비밀의 문을 통과해야만 화려한 바의 진면목이 등장하는 일종의 ‘신비 마케팅’이 유행하고 있는 것이다.

일명 ‘스피크이지 바(speakeasy bar)’로 불리는 이 술집들은 금주령이 종료되며 일제히 사라졌으나, 2000년대 중반 미국 뉴욕을 시작으로 다시금 전 세계에서 이색 트렌드로 성행하고 있다.


찰스 H.

서울 중구 광화문 포시즌스 호텔 서울 지하 1층에 위치한 찰스 H.도 뉴욕 금주법 시대의 바 콘셉트를 땄다. 고급스럽고 세련된 인테리어 디자인으로 유명한 아브로코(AvroKo)가 1920년대의 뉴욕 스타일을 서울 한복판에 그대로 옮겨 왔다. 찰스 H.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호텔 어디에도 위치를 설명하는 안내판이 없다는 점이다. 고객이 스스로 바의 숨겨진 벽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깥과 단절된 전혀 다른 공간이 등장한다. 숨겨진 입구로 통하는 내부는 화려한 인테리어 속에 테이블 등 곳곳에 한국의 전통 금속공예에서 영감을 받은 세련된 디자인 요소로 꾸며졌다. 지난 5월 세계적인 주류 전문지인 드링크 인터내셔널이 싱가포르에서 발표한 ‘아시아 베스트 바 50(Asia’s 50 Best Bars 2019)’ 중 14위, 국내에서는 1위를 차지했다.

르챔버

서울 강남의 청담동과 한남동이야말로 국내 스피크이지 바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이색 콘셉트 바가 많다. 간판도 없고, 출입구도 찾기 힘든 ‘르챔버’도 그중 하나. 영화 <킹스맨>처럼 서재 벽면에 빼곡히 꽂힌 고서 하나를 찾아 누르면 책장이 옆으로 밀려나며 은밀한 지하공간이 펼쳐진다. 세계 최대 규모의 바텐더 대회 ‘월드클래스’의 한국 대표 출신들이 운영하며, 호텔 바 못지않은 세련된 인테리어가 마음을 사로잡는다.



더부즈 제주

스피크이지 바의 물결은 육지를 넘어 제주에도 이어진다. ‘더부즈 제주’는 건물 안 빨간 전화박스 뒤에 숨겨진 비밀 공간으로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간판도, 상호도 따로 없지만 새로운 분위기에 취해 많은 이들이 물어물어 찾는 공간이다. 특히 성숙한 어른들의 놀이 공간을 지향하는 곳으로 한국 나이로 30세 이상(동반 시 20대 입장 가능)만 입장할 수 있다.

☞금주법이란?

음주 남용으로 인한 사회적 문제를 제거하기 위해 1920년 1월 발효된 수정 헌법 제18조, 이른바 볼스테드법. 주류의 양조·판매·운반·수출입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골자다.

금주법 시대라고 하는 금주법 시행 기간 동안 이른바 재즈 에이지, 광란의 1920년대, 무법의 10년이라고 하는 시대가 탄생했다.

이 기간 동안 술을 밀수·밀송·밀매하는 갱이 날뛰었으며, 간판 없는 바들이 무허가 술집으로 우후죽순 문을 열었다. 이후 밀조, 밀매 등에 따르는 범죄가 크게 늘어나 1933년 헌법 수정 제21조에 의해 폐지됐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69호(2019년 06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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