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 Artist 김윤섭 소장의 바로 이 작가 - 한부열
[한경 머니 = 김윤섭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미술사 박사] 그림이 무척 직관적이다. 등장하는 형상들은 직선 혹은 약간의 곡선과 최소한의 채색으로 완성됐다.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조형 어법이 한부열 작가 작품의 첫 번째 매력이다. 얼핏 밑바탕의 감성적인 붓 터치들이 보이지만, 역시 눈길을 사로잡는 요소는 정돈된 드로잉 선묘들이다. 한 치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는다.
사람의 얼굴이나 몸통, 기하학적인 패턴과 숫자 등이 절제된 조화로움을 선보인다. 모든 작품들이 밑그림 없이 단번에 그려진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다. 작업 과정의 시작은 즉흥적이고 직관적이지만, 마무리 단계에선 철저하게 이성적인 치밀함이 돋보인다. 말 그대로 ‘직관적 이성주의 드로잉 회화’가 아닐 수 없다.
한부열 작가의 그림 소재는 일상의 경험들을 옮긴 것이다. 작가의 꾸밈없는 천진난만한 시선이 고스란히 작품 속에 담겼다. 특히 특정한 사건에 대한 기억력과 재현 능력이 뛰어나다. 대개 작가 자신에게 연관된 순간들에서 출발한다. 가령 가장 환한 모습의 웃음 띤 주인공을 그림의 중심에 등장시키고, 그 주변을 다양한 시점으로 재구성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그것은 작가 자신의 자존감을 대변하는 나름의 표현법인 셈이다. 그 어떤 순간에도 망설인 흔적들은 찾아볼 수 없다. 밑그림 없이 단번에 완성된 그림들은 마치 동양회화의 일필휘지 미학에 버금간다. 이는 특정한 교육을 통해 이루어진 그림이 아니고, 스스로 터득한 한부열만의 독창적인 표현 방식이다.
실제로 작품의 제작 과정을 살펴보면 아주 흥미롭다.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게 정돈된 화판 위엔 항상 여러 펜들과 자(scale)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흔히 ‘자로 잰 듯’이란 표현이 있듯, 한 작가의 그림은 ‘자로 시작해 자로 끝냈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의 모든 그림들은 적당하게 연출된 바탕화면 위에 몇 가닥의 직선 긋기로부터 출발한다. 처음엔 그저 몇 개의 직선을 이리저리 긋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반복적인 행위의 순간들이 어느 정도 지나면 거짓말처럼 온갖 형상들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그 굵고 얇고, 길고 짧은 선들이 한 치의 오차 없이 견고한 구성력을 발휘한다는 점이다.
한 작가의 그림들은 마치 컴퓨터에 보관했던 이미 완성된 설계도를 프린트해내는 과정처럼 완결미를 자랑한다. 중첩적으로 복잡한 선들이 조화를 이루며 대상의 앞뒷면을 교차해서 보여준다거나, 좌우 또는 상하 대칭적 사물의 해석, 숫자와 도형의 다양한 의인화 과정 등도 등장한다. 그렇다고 그림들이 경직되거나 차가운 느낌보다는 오히려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의 감성이 묻어난다. 작품 제목을 보면 친밀감이 더욱 커진다. <안아줘요>, <술 마시고 노래해요>, <업어줘요>, <마름모 사랑>, <아파트 사람들>, <부열이와 아줌마들> 등. 평소 일상에서 접한 상황이나 환경에서 느낀 감성을 포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더욱 솔직한 진정성이 전해진다.
한 작가의 머릿속엔 수많은 생각주머니들이 있는 듯하다. 마음 내킬 때 주저 없이 수시로 꺼내어 옮긴 것이 그의 그림들이다. 덕분에 우리는 미처 말로 표현해내지 못했던 가슴 속 이야기를 엿볼 수 있게 됐다. 초대된 주인공들 중에 유독 아줌마, 아저씨, 이모, 누나 등이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 봐선 유독 주변 사람들과의 정감어린 교감에 큰 관심을 두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작가로서 그의 활동은 대략 7년 전에 시작했다. 2012년 그가 29세였으니, 다소 늦은 나이이긴 하다. 중국에서 지내다 서울에 돌아와 한 복지관의 기아자동차 후원 멘토 프로그램을 통해 붓을 잡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동안 20여 회 가까운 국내외 개인전과 수십 회의 기획단체전 참여 경력은 짧은 화력에 비해 대단한 성과임에 분명하다.
“한부열을 소개하면 제일 먼저 묻는 것이 ‘어느 학교를 나왔는가’ 혹은 ‘어느 선생님이 사사 했는가’ 등입니다. 하지만 두 가지 모두 해당사항이 없습니다. 작가의 평가 기준을 작품이 지닌 순수한 매력보다는 주변 환경이나 조건들에 치중한다면, 그 작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현재는 한부열 작가가 장애인 예술계 쪽에 더 많이 알려져 있지만, ‘장애인 작가’라는 꼬리표나 선입견의 한계를 뛰어넘어 ‘편견 없는 일반 작가’로서 더 넓은 활동을 더욱 활발하게 펼칠 수 있길 바랍니다.”
한 작가의 어머니이신 임경신 여사의 증언이다. 궐녀(厥女)의 말처럼 한 작가에겐 장애가 있다. 태어난 지 두 돌이 지나면서 자폐 판정을 받았다. 처음엔 그게 어떤 진단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에게서 남다른 재능을 발견한다. 놀라운 집중력이었다. 유독 무엇인가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 아이에게 어머니는 손힘을 길러주기 위해 찰흙 만지기부터 시켰다. 아마도 초등학교 5학년 때 건너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한국국제학교를 졸업하고, 이후 오랜 세월 중국 등에서 생활한 경험들도 그가 작가적 감성을 지니게 된 근간이 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물론 헌신적이고 치밀한 어머니만의 교육 방식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중간 과정의 사연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았겠지만, 결국 현재의 한부열은 어엿한 아티스트로서 주목받고 있다. 2014년 첫 개인전을 중국 홍십자(적십자) 100주년을 기념해 칭다오 한인문화대축제 초청전으로 가졌다. 대성황이었다. 출품된 40여 점이 전부 판매돼 수익금 전액을 중국 심장병어린이 두 명의 수술비로 기부했다. 또한 칭다오 소재 엘림자폐학교에서 학생들과 함께 드로잉 워크숍을 진행해 현지인들의 큰 찬사를 받기도 했다.
처음엔 일본 애니메이션 책자를 보고 그리길 수백 회 반복했다. 그 과정이 쌓여 어느덧 자신만의 안정되고 창의적인 화법으로 화면을 재구성하는 능력을 갖췄다. 국내의 자폐장애 라이브 드로잉 1호 작가, 자폐장애 그림책 완성 1호 작가 등의 타이틀을 넘어, 지금은 기성 화단의 주요 전시에 러브콜을 단골로 받고 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대중적인 활동에 익숙한 것은 아니었다. 첫 개인전보다 한 해 앞선 2013년의 경험 때문이다. 그 해 7월에 서울 청계천 SK본사 앞 컨테이너 전시장에서 야외 드로잉 이벤트가 계기였다. 단지 30cm 자와 펜으로 순식간에 다양한 패턴들의 그림들을 완성해내는 한 작가에게 관중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주었다. 그가 아티스트로서 자존감을 획득한 극적인 순간이었다.
그의 작품을 본 감상평은 여러 가지다. 그중에 임 여사는 ‘피카소가 연상되기도 하지만 여태껏 보지 못했던 독특한 작품이다’, ‘독창성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작품을 보는 순간 한부열 작품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등의 평이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그 순간 어머니를 떠나 한 작가의 팬으로서 남다른 보람과 기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2017년 광화문 신한갤러리 개인전의 개막 직전에 한 명의 관람객이 출품작 60여 점을 전부 소장한 에피소드는 지금도 설레는 장면이다. 그래서일까. 한 작가는 나누는 삶의 사회공헌 실천에도 노력을 기울인다. 드로잉 퍼포먼스의 수익금 전액을 사회약자 공공기관에 기부해 오고 있다.
한 작가를 평가하는 기준은 매우 다양하다. 여러 기준에서 전공 유무나 신체적 장애 등이 결코 절대적인 우선이 될 수는 없다. 그 작가가 어떤 정체성을 지니고, 그림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며 실천하고 있는가를 들여다봐야 내재된 진정성을 볼 수 있다. 자신만의 독특한 화법은 기본이다. 대중의 인기는 보너스다. 그런 면에서 한부열은 충분히 지켜볼 만한 작가임 분명하다. 참고로 그림 가격은 2015년부터 전업 작가로 데뷔한 이후 10호(53× 45.5cm) 정도에 150만 원 선이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67호(2019년 04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