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joy [한경 머니 = 윤대현 서울대학교병원 강남센터 정신의학과 교수]
“네 탓이야”라는 말 때문에 속상하다는 하소연이 적지 않다. 예를 들면 ‘교통이 혼잡해 약속에 늦었어’란 변명을 한 번도 안 해본 사람이 있을까 싶은데, 자기 경험을 돌아보면 실제 차도 막혔지만 출발 자체가 늦은 경우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내 탓’이 있는데 다른 쪽으로 탓을 돌리는 것에 우리 마음은 익숙하다. 내 평판이나 가치를 지킬 수 있는 방어 수단이기 때문이다.
‘내 탓’보단 그럴 듯한 ‘남의 탓’을 빠르게 찾아내어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하는 프로그램이 우리 마음에 있다. 달리 말하면 ‘내 탓이요’보다 ‘네 탓이다’가 더 본능적인 생존 반응인 것이다. 그래서 ‘내 탓이요’라고 진심으로 사과를 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 자신의 잘못에 대한 합리화도 깨뜨려야 하고, 잘못을 인정했을 때 자신의 평판이 떨어지는 두려움도 견뎌야 한다. 본능적으로 남의 탓으로 돌리려는 마음에 브레이크를 밟는 것에도 연습이 필요한 셈인데, 그렇지 않으면 남의 탓만 하는 인격으로 살 수 있다.
살다 보면 사과할 일이 생기게 된다. ‘미안해요, 죄송해요’란 말, 인사말 다음으로 우리가 자주 하는 말 아닐까 싶기도 하다. ‘미안해요, 죄송합니다’라고 사과를 쉽게 잘 하는 사람이, 사과란 말이 입에서 잘 안 떨어지는 사람에 비해 사회생활을 수월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너무 쉽게 미안하단 말을 남용하는 사람을 보면 더 짜증이 나기도 하는 것이 사실이다. 매번 약속 시간에 늦으며 그때마다 쉽게 ‘미안하다’는 문자를 보내는 친구에 대해 좋은 생각이 들기 어렵다. 미안하다는데 화낼 수도 없어 짜증날 수 있고, ‘상대방에게 미안하면 그 행동을 반복하지 말아야지’란 생각도 들며 그 사람에 대한 신뢰감마저 줄어든다.
사과할 일이 없으면 좋겠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사과할 일이 생길 수밖에 없다. 전화위복이라 상대방에게 잘못을 했어도 진심 어린 사과를 하면 그 사람이 나에 대해 긍정적인 마음을 가질 수도 있다. 상대방에게 진심을 전달할 수 있는 사과는 어떻게 해야 할까.
재발 방지 약속과 보상
사과의 4가지 원칙이라는 것이 있다. 첫 단계는 “미안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하는 것이다. 둘째 단계가 “오늘 잘못은 내 책임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셋째 단계가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재발 방지를 먼저 약속하는 것이다. 넷째 단계가 보상이다. 사과에 대한 마음을 눈에 보이는 무엇인가로 표현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면 사과할 일이 생겼다면 우선 ‘미안하다’라는 표현을 하는 것이 시작이다. 그리고 그 문제가 ‘내 탓이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사과할게’란 말은 사과가 아닌 공격이다. 내 잘못을 모르겠으니 상대방에게 내 잘못을 찾아보란 이야기다. 이런 말로 사과를 시작하면 상대방 마음은 더 상하기 쉽고 타이밍도 놓치게 된다. 기왕 사과를 할 거라면 즉각적으로 ‘미안하다, 내 탓이다’라고 하는 것이 상대방 마음을 푸는 데 도움이 된다.
여기에 ‘다시는 이런 실수 없을 거야’라고 재발 방지를 약속하면 사과가 더 진실해진다. ‘내 탓이다’라고 해 놓고는 그 실수를 반복하면서 사과만 하는 사람을 신뢰하긴 어렵다. 실수에 대한 재발 방지 약속은 내 마음도 다시 한 번 챙기게 해 재발 방지에 도움이 된다. 그리고 실제 그 약속을 지켜 나가면 잘못은 했어도, 약속한 말을 지키는 사람이란 이미지가 만들어져 시간이 가면서 오히려 나에 대한 신뢰가 커질 수 있다. 마지막으로, 재발 방지 약속과 함께 이번 실수에 대한 구체적인 보상까지 약속하면 더 사과가 묵직해진다.
가벼운 예를 들어 보면, 친구와의 저녁 약속을 당일 날 어기게 됐을 때 우선 “미안해. 사정은 있지만, 결국은 내 잘못이지”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다음부터는 당일 날 이런 일이 없도록 내가 약속시간을 더 잘 챙겨볼게. 최소한 일주일 전에는 이야기해줄게”라고 재발 방지를 약속한다. 그리고 “오늘 약속을 어겼으니 다음 저녁은 내가 맛집에서 쏠게”라고 보상으로 마감한다.
여기서 새로운 약속 날짜를 잡을 때 오늘 약속을 어긴 것이 미안해서 급하게 “내일 어때” 하는 것보다는 여러 개의 날짜를 주고 상대방이 선택하게 하면 좋다. 우리 마음은 선택의 자유로움이 증가할 때 상대방이 나를 아낀다고 느낀다. ‘뭐 먹을까 물어봐 놓고는 항상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가는 상사가 힘들다’는 직장인들의 불만 사연이 꽤 많다. 먹고 싶은 것을 못 먹는 것보다 선택의 자유를 힘으로 독점하는 것이 힘든 것이다. 상사도 손해다. 점심 값 내주며 구성원들의 마음을 잃기 때문이다.
윗사람이나 친구에게 하는 사과보다 어려운 것이 자녀나 후배에게 하는 사과다. 내 힘이 약해지면서 나를 무시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 때문이다. 그러나 적절한 사과는 상대방이 자신의 가치를 존중해준다는 느낌을 갖기에 상대방의 자존감을 튼튼하게 해주고 관계도 더 돈독하게 한다.
가까운 지인에게 상처를 받은 337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를 보면, 상처를 주었던 당사자가 사과나 보상 등 화해의 언행을 보였을 때 그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가치 지수가 증가하고 그 사람이 나를 또 괴롭힐 것이라는 인식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또 화해의 언행은 용서의 마음을 가져다주고 가해자에 대한 분노감도 줄여주었다. 다른 사람에게 잘못을 구하는 것이 얼마나 의미가 있겠는가, 내지는 나를 분노케 한 저 사람의 사과를 받는다고 해서 내 마음이 얼마나 풀릴 것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우리 뇌에는 상대방이 화해를 요청할 때 적극적으로 반응하려는 소프트웨어가 존재하는 셈이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67호(2019년 04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