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렉시트 이후 세계 경제 대변화에 ‘촉각’



[한경 머니 기고=한상춘 한국경제 논설위원 겸 한국경제TV 해설위원]영국이 유럽연합(EU)과 결별하는 브렉시트(Brexit)가 현실화되며, 세계 경제와 국제금융시장은 큰 변화의 물결에 놓이게 됐다. EU와 같은 종전에 국경을 전제로 했던 세계경제질서가 흐트러지고 있는 가운데 한국은 어떤 변화를 준비해야 할까.

금융위기 이후 세계 경제와 국제금융시장이 ‘뉴 노멀’ 시대에 접어들었다. 규범과 이론, 관행이 통하는 ‘노멀’ 시대에 대비되는 개념이다. 특히 경제 분야가 심하다. 자유방임 고전주의 ‘경제학 1.0’ 시대, 케인스식 혼합주의 ‘경제학 2.0’ 시대, 신자유주의 ‘경제학 3.0’ 시대에 이어 ‘경제학 4.0’ 시대로 구분하는 시각도 있다.

경제학 4.0 시대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국가’를 전제로 했던 종전의 세계경제질서가 크게 흔들리는 현상이다. 세계 모든 국가를 대상으로 한 세계무역기구(WTO), 뉴라운드, 파리 기후변화협정 등과 같은 다자주의 채널이 급격히 악화되는 추세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미국 주도의 다자 협상은 한 건도 이뤄지지 않았다. 각국의 국제규범 이행력과 구속력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자유무역협정(FTA)과 같은 양자 협력도 ‘스파게티 볼 효과’가 우려될 정도로 복잡해 교역 증진에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 스파게티 볼 효과(spaghetti bowl effect)란 삶은 국수를 그릇에 넣을 때 서로 얽히고설키는 현상을 말한다. 예를 들어 A국이 B국, C국과 맺은 원산지 규정이 서로 달라 협정 체결국별로 달리 준비해야 하는 수출업체에는 오히려 불편을 초래하는 경우다.

지역 블록은 아예 붕괴 조짐이 일고 있다. 브렉시트 마감 시한인 3월 29일에는 영국이 1973년 가입 이후 동고동락 했던 EU를 떠난다. 브렉시트(Brexit)란 ‘Britain’과 ‘Exit’의 합성어로 EU에서 영국이 탈퇴한다는 의미다. 일부 우려대로 노딜 브렉시트, 즉 질서 없는 하드 브렉시트가 될 경우 한국을 비롯한 세계 경제와 국제금융시장에 커다란 충격을 가져다줄 것으로 예상된다.


◆변곡점 맞은 유럽통합 시나리오는

유럽통합은 단일 세계 경제 현안 중 역사가 가장 길다. 자유사상가에 의해 ‘하나의 유럽 구상’이 처음 나온 20세기 초를 기점으로 한다면 110년, 이 구상이 처음 구체화된 1957년 로마 조약을 기준으로 한다면 60년이 넘는다. 한 마디로 유럽 국민의 피와 땀이 맺히면서 어렵게 마련된 것이 바로 유럽통합이다.

출범 이후 유럽통합은 2가지 경로로 추진돼 왔다. 하나는 회원국 수를 늘리는 ‘확대(enlarge-ment)’ 단계로 초기 7개국에서 28개국으로 늘어났다. 다른 하나는 영국은 가담하지 않았지만 회원국 간 관계를 끌어올리는 ‘심화(deepening)’ 단계로 유로화로 상징되는 경제통합(EEU)에 이어 정치통합(EPU), 사회통합(ESU)까지 달성해 간다는 원대한 구상이었다.
하지만 ‘유럽통합헌법’에 대한 유로존 회원국의 동의 과정에서 예상치 못했던 주권 문제로 ‘심화’ 단계가 먼저 난관에 부딪쳤다. 오히려 EEU에 잠복됐던 불안 요인인 7년 전 발생했던 재정위기가 터지면서 누적돼 왔던 불안 요인이 한꺼번에 터졌다. 유럽통합 과정에서 영국의 역할을 감안할 때 브렉시트가 실현되면 ‘확대’ 단계도 커다란 시련이 예상된다.

다른 회원국 탈퇴의 단초가 될 가능성이 높다. 모든 회원국은 경기 침체 속에 난민, 테러 등이 겹치면서 유럽통합에 신경 쓸 여유가 없다. 트럼프 미 대통령의 국수주의로 이기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유럽 재정위기를 겪으면서 유로존 탈퇴 문제로 한 차례 홍역을 치렀던 ‘PIGS(포르투칼,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가 동참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분리독립운동도 거세질 것으로 예상된다. 영국의 스코틀랜드, 스페인의 카탈루냐와 바스크, 북부 이탈리아, 네덜란드의 플랑드르, 우크라이나의 러시아와 근접한 동부 등이 가능성이 높은 지역이다. 회원국 탈퇴가 잇따르고 분리독립운동마저 일어난다면 유럽통합은 붕괴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브렉시트 미감 시한이 다가오면서 유럽 경제는 ‘불황’이 우려될 정도로 심상치 않다. 최후 버팀목 역할을 했던 독일 경제마저 지난해 성장률이 5년 만에 최저치인 1.5%로 떨어질 만큼 침체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유럽중앙은행(ECB) 등은 올해 성장률을 일제히 하향 조정하는 가운데 일부 전망기관은 0%대로 추락할 것이라는 예측도 나와 주목된다.

당사국 영국 경제는 더 심각하다. 브렉시트에 따른 불확실성으로 영국에서 활동해 왔던 국제 금융사가 증권의 경우는 프랑스 파리와 베네룩스 3국(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채권의 경우는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빠져 나가면서 실물경기, 고용, 주택 시장 등 모든 면에서 타격을 받으면서 범죄까지 급등하고 있다. 브렉시트 재투표 요구가 거세지고 있는 것도 경제적 요인이 가장 크다.

의회 승인 과정에서 난항을 거듭하고 있는 영국뿐만 아니라 EU 자체적으로도 브렉시트 마감 시한을 올해 7월이나 올해 말까지 연기해야 한다는 시각이 고개를 들고 있다. 한동안 브렉시트 전개 상황을 지켜보면서 세계인이 숨죽이는 과도기를 거칠 가능성이 높다. 그만큼 EU는 세계 경제와 국제금융질서 형성 과정에서 커다란 획을 그어 왔기 때문이다.

영국 재무부는 브렉시트 이후 2030년까지 영국 경제가 6% 위축될 수 있다고 추정했다. 가구당 연간 4300파운드의 손실을 가져다주는 커다란 규모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브렉시트가 가시화되면 영국 국내총생산(GDP)은 잔류했을 때와 비교해 2020년에는 3%, 2030년에는 5% 위축될 것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탈퇴와 분리독립은 쉽지 않은 문제다. 1975년 치러졌던 영국의 국민투표에서 브렉시트가 부결됐다. 1995년 캐나다 퀘백과 2014년 스코틀랜드 분리독립 투표도 여론조사 결과와 달리 반대가 더 많이 나왔다. 미국도 실리콘밸리가 있는 캘리포니아의 분리 요구가 나온 지 오래됐으나 연방정부 차원에서 검토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

EU집행위원회가 회원국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를 종합해보면 회원국은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보다 유럽통합 앞날과 EU, 유로랜드 존속 여부에 대해 더 비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회원국별로는 핵심국(good apples)보다 비핵심국(bad apples) 국민일수록 더 비관적으로 나타났다.

브렉시트를 계기로 근본적인 결함이 노출된 데다 유럽통합에 대한 시각이 비관적으로 나타남에 따라 유럽통합의 앞날은 현 체제 유지(muddling through), 유럽통합 및 유로화 강화(bonds of solidarity), 유럽통합과 유로화 동시 붕괴(bonds of solidarity), 유럽통합 질서 회복(the collapse) 등의 4가지 시나리오를 상정할 수 있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현 체제 유지’ 시나리오는 유럽통합에 대한 회의론 확산에도 불구, 근본적인 변화 없이 지금의 상황이 지속되는 경우다. ‘유럽통합 및 유로화 강화’는 유럽 위기로 붕괴 조짐을 보이는 유럽통합을 강화하기 위해 내부 문제를 해결하고, 유로본드(E-bond) 도입, 유럽통화기금(EMF) 설립, 재정동맹 등 미완성 과제를 해결하는 시나리오다.

두 시나리오보다 가능성이 희박한 ‘유럽통합과 유로화 붕괴 시나리오’는 유럽 위기 회원국이 독자 통화 도입을 위해 혹은 국내외 정치적 압력에 의해 유럽통합을 탈퇴해 붕괴되는 경우다. ‘질서 회복’은 특별한 조치 없이 주변국의 경쟁력 회복과 재정 개선 등으로 회원국 간 불균형이 해소되면서 유럽통합이 재정위기 이전 상황을 회복하는 시나리오다.

4가지 시나리오 중 브렉시트 마감 시한이 다가오면서 재연될 조짐을 보이고 있는 ‘유로존 위기 2.0(유럽 재정위기를 유로존 위기 1.0으로 봄)’을 해결하지 못하고 회원국 간 정치적 명분과 경제적 이익에 대한 유럽통합의 근본 문제가 더 악화될 경우 세계 경제와 국제금융시장은 또 한 차례 홍역을 치를 가능성이 높다. 한국을 비롯한 세계 증시도 변동성이 크게 확대되는 속에 ‘숙취(hangover) 현상’이 재현될 것으로 예상된다.


◆세계화 4.0 시대, 한국도 변화 필요

조셉 바이너(J. Viner) 등의 연구에 따르면 유럽처럼 경제 발전 단계가 비슷한 국가끼리 결합하면 무역 창출 효과가 무역 전환 효과보다 커 역내국과 역외국 모두에 이득이 된다. 통합에 가담하는 것이 좋다는 의미다. 앞으로 유럽통합은 회원국의 현실적인 제약 요건을 감안해 새로운 방향이 모색될 것으로 예상된다.

의회 표결 이후 영국과 다른 회원국이 차선책으로 ’B-EU(Britain+EU)’ 방안을 검토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B-EU’는 영국을 EU에 잔존시키면서 난민, 테러 등에 대해 자체적인 해결 권한을 갖는 방식이다. 이때 영국은 EU의 구속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자국 현안을 풀어 갈 수 있어 ’브렉시트‘보다 더 현실적인 방안이다.

‘B-EU’가 선택된다면 프랑스, 벨기에 등과 같은 테러 피해로 국수주의 움직임이 거센 회원국이 이 방식을 따라갈 가능성이 높다. 특히 ‘B-EU’에 이어 ‘F-EU(France+EU)’까지 적용될 경우 유로존에 이어 EU 차원에서도 ‘이원적인 운용 체계’가 공식적으로 검토될 것으로 예상된다. 유럽통합 앞날에 ‘변곡점’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원적인 운용 체계는 유로화가 도입 위기 이전에 운영됐던 ‘유럽조정메커니즘(European Realignment Mechanism, ERM)’과 원리는 동일하다. 독일 등과 경제 여건이 좋은 회원국(good apples)은 경제수렴 조건을 보다 엄격하게 적용하고, 그리스 등과 같은 나쁜 회원국(bad apples)은 느슨하게 운영됐다. 1990년대 초 유럽통화위기의 주범인 조지 소로스가 유럽통합 앞날과 관련해 내다봤던 ‘멀티 트랙’과 동일한 시각이다.

유로존의 기본 골격도 보완될 가능성이 높다. EEU 효과를 극대화하려면 통화통합과 재정통합을 동시에 달성해야 한다. 주무부서로 ECB와 가칭 ‘유럽재정안정기구(European Fiscal Stabilization Mechanism, EFSM)’, 상징물로 유로화와 유로본드 간 ‘이원적 매트릭스’ 체제를 갖춰 나갈 것으로 예상된다.

EU와 같은 종전에 국경을 전제로 했던 세계경제질서가 흐트러지면 경제주체(시장 포함)는 혼란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그 대신 트럼프 미 대통령과 같은 포퓰리스트가 판치면서 국수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세계화 쇠퇴를 의미하는 ‘슬로벌라이제이션(slobalization)’이란 신조어가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슬로벌라이제이션은 올해 다보스포럼에서 제시됐던 ‘세계화 4.0(globalization 4.0)’과 같은 의미다.

‘슬로벌라이제이션’으로 대변되는 경제학 4.0 시대에 있어서 한국처럼 대외 환경에 크게 의존하는 국가일수록 불리하다. ‘대변화’를 모색해야 할 때다. 갈라파고스 함정(세계 흐름과의 격리)에 빠져 경제학 4.0 시대에 나타나는 변화를 읽지 못한다면 선진국 문턱에서 추락해 ‘중진국 함정(Middle Income Trap, MIT)’에 빠진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한상춘 한국경제 논설위원 겸 한국경제TV 해설위원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66호(2019년 03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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