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들의 위로와 치유 ② 배인구 법무법인(유) 로고스 변호사
[한경 머니 기고 = 배인구 법무법인(유) 로고스 변호사]변호사를 하면서 의뢰인들의 아픔을 자주 마주한다. 필자 역시 바쁜 일상 속에서 심신이 지치기도 하고, 덜컥 울적함에 사로잡힐 때도 있다. 그때마다 나를 위로해준 건 바다였다. 그것도 아주 거친 바다. 그 과정에서 내 마음의 파고는 잔잔해져 갔다. 왜일까.어릴 적 읽은 동화책에 이렇게 시작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왕국의 왕비가 아이를 낳다가 세상을 떠났다. 아름답고 착한 왕비를 잃은 왕은 슬픔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았다. 걱정이 된 신하들이 나서서 따뜻한 말과 산해진미를 준비하고, 광대를 불러 즐거운 공연을 했지만 왕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세상의 현자들이 왕에게 귀감이 되는 말을 해주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때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이 왕을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신하들은 그 여인을 전혀 기대하지 않았지만 만나게 해주었다. 여인은 왕을 만나 아무 말 없이 울기만 했다. 왕은 더욱 소리 내어 울었다. 얼마나 울었을까? 왕은 여인이 우는 이유가 궁금했다. 여인은 남편이 병으로 사망했다면서 그 사람이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고, 얼마나 멋진 사람이었는지 말했다. 왕은 죽은 왕비가 얼마나 예뻤고, 상냥했는지 등등 말했고, 서로 죽은 배우자의 장점을 경쟁하듯 말했다. 그러다가 왕은 같이 울고 있는 여인 역시 매우 예쁘다는 것을 알아챘다. 왕은 여인에게 청혼을 했다.”
물론 이 동화의 중요 내용은 이러한 도입부가 아니라 여인이 왕비가 돼 죽은 왕비가 낳은 공주를 핍박하고, 이 동화의 주인공인 어린 공주가 이 위기에서 벗어난다는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다.
이제 많은 시간이 흘러 동화의 대부분이 기억나지 않지만, 왕이 지독한 슬픔에서 벗어나는 장면은 선명하게 기억한다. 아마도 어린아이가 이해하기 어려운 슬픔 극복 이야기 때문이었나 보다. 나는 이 동화를 읽으면서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는 최초의 단서가 옆에 있는 누군가의 힘이라는 것을 막연하게 안 것 같다.
바다, 위로의 공간
슬픔에서 벗어나려면 아주 진하게 그것을 맛봐야만 나올 수 있다는 것, 다른 좋은 것으로는 대체될 수 없다는 것, 정면으로 마주보고 난 후에 비로소 다른 것을 볼 수 있다는 것, 가장 좋은 친구는 그냥 그렇게 내버려두면서 옆에 있어주는 것이었다. 일과 가정을 병행하면서 어떤 것도 잘하기가 쉽지 않았다.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아 많이 우울할 때 무작정 바다를 보러 간 적이 있다. 바다를 보고 답답한 마음이 툭 터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끝없이 펼쳐진 예쁜 색의 바다를 꿈꾸며 갔는데 날씨가 변하면서 바다에는 높은 파도가 치고 있었다. 그런데 비바람이 부는 바다의 소리가 마치 울음소리처럼 들렸다. 내 고통과 힘듦을 알고 나를 위해 우는 것 같은 바다를 보며 나는 생각보다 많은 위안을 받았다.
만약 잔잔한 바다였다면 이런 위로를 받지 못했을 것 같다. 그래서일까. 많은 사랑을 받았던 tvN 드라마 <도깨비>의 여주인공 ‘은탁’이도 슬픈 일이 있고,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할 때면 파도가 방파제를 넘어오는 거친 바닷가를 찾은 것은.
21년간 재직한 법원에서 퇴직하고 변호사로 다른 삶을 살게 되면서 몸에도 변화가 생겼는지 지난봄에 몹시 아팠다. 마음도 울적해지고 눈물이 많아졌다. 이런 모습이 무척 창피했다. 그런 내게 신부님이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우리가 예쁘다고 하는 에메랄드빛 바다는 정기적으로 발생하는 태풍이 있기에 가능하답니다. 태풍이 온 바다를 뒤흔들어 찌꺼기를 없애주기 때문에 그 예쁜 바다가 될 수 있는 거죠. 더욱 놀라운 것은 그때 그 거친 바다 밑에서 진주가 자란다는 겁니다.”
그 말씀을 들으며 나는 어린아이처럼 울었고, ‘다음’을 생각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힘들어하는 나를 위해 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매우 큰 행운이다. 변호사가 돼 만나는 의뢰인들에게 나는 큰 파도는 못 되더라도 작은 너울이 돼 그들과 함께 울고 있는지 자문해본다.
곁을 지켜주는 단단한 존재가 있는 당사자라면 그럴 필요가 없지만, 특히 이혼 소송에 지친 이들에게 가끔은 거친 파도가 치는 바다에 가보라고 하고 싶다. 그리고 당장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말해주고 싶다. 이렇게 큰 힘듦의 파도가 마음을 뒤흔들고 있을 때 그 마음속에서 진주가 자라고 있음을.
“우리가 예쁘다고 하는 에메랄드빛 바다는 정기적으로 발생하는 태풍이 있기에 가능하답니다. 태풍이 온 바다를 뒤흔들어 찌꺼기를 없애주기 때문에 그 예쁜 바다가 될 수 있는 거죠. 더욱 놀라운 것은 그때 그 거친 바다 밑에서 진주가 자란다는 겁니다.”
배인구 변호사는…
고려대 법학과 및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다. 사법시험 35회에 합격, 21년간 법원에서 재직했으며 서울가정법원 근무 당시, 가사전문법관(부장판사)으로 근무하면서 우리나라 최초로 양육비산정기준표를 제정해 공표했다. 2017년에는 여성가족정책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무총리표창을 받았다. 현재는 법무법인 로고스 가사상속센터장을 역임 중이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63호(2018년 12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