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여와 포용의 미학 자수 보자기

김현희 명장이 한 땀 한 땀 신중히 수를 놓고 있다.
[한경 머니=이현주 기자 | 사진 이승재 기자 ] 전통 자수가 실과 바늘로 그린 한 폭의 아름다움이라면, 자수 보자기는 잉여와 포용의 미학이다. 밥상보, 이불보, 횃댓보 등으로 사용됐던 자수 보자기는 한국 고유의 생활 도구 가운데 하나였다. 자수 보자기를 가르치고 배우는 사람들을 만나 수놓는 즐거움에 대해 물었다.


“이것 봐요. 주황색 실로 하니까 예쁘잖아. 살아 있는 것 같고, 대범해지고.” 김현희 대한민국 자수명장이 직접 시범을 보이며 학생들에게 말했다. 한국전통공예건축학교 자수 보자기 기초과정반에서 10여 명의 학생들은 선생님의 주위에 둘러서서 실이 지나는 자리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확실히 살아났네. 아, 예쁘다.”

“징글 때 이 부분에서 실을 조금 당겨주는 게 중요해요. 될 수 있으면 끊지 않고 끝까지 가는 게 좋죠.” 전통 자수 기법 중 징금수(문양의 윤곽선을 가는 실로 징그는 기법)를 표현할 때는 김 명장의 숨은 노하우를 전했다. “징거주고 굵은 실을 당겨줘야 전체적으로 매끄럽게 표현되는데, 안 당기면 구불구불해 보이죠. 사람들이 이걸 잘 몰라.”

완성도가 디테일에서 나온다면, 자수는 단 ‘0.2mm의 한 땀’이 차이를 만들어낸다. 열아홉 살 이후로 50년 넘게 바느질을 하며 평생을 자수에 헌신해 온 김 명장도 같은 자리에 바늘을 여러 번 찔러 가며 ‘신중한 한 땀’을 놓았다. 그는 “예전에는 바느질을 잘 보기 위해 작업실에 형광등 10개를 놓고 작업을 했는데 너무 밝아 눈이 시어서 세 개를 뺐다”며 “그만큼 세밀하고 정교함을 필요로 하는 작업으로, 기술과 예술을 모두 필요로 하는 공예가 바로 자수다”고 설명했다.

보자기에
자수의 멋을 더하다
침선, 매듭, 전통 자수, 자수 보자기, 색실 누비 등 전통 공예 부문의 실기 교육을 하는 전통공예건축학교는 최근 손바느질 취미강좌 인기에 힘입어 젊은이와 다양한 연령대의 관심을 받고 있다. 지난 10월 중순 이곳 자수 보자기 반에서 만난 김 명장과 수강생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전통 자수의 매력은 그것을 만들고 사용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생각할 때 진가를 드러낸다.”

보자기에 수를 놓는다는 건 뭘까. 특히 우리의 보자기는 서구의 가방과 다른 한국의 ‘싸는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문화 기호로 통한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한국의 보자기에 대해 “둥근 것, 네모난 것, 모난 것, 부드러운 것 무엇이든 쌀 수 있고 어디서든 풀 수 있다는 점에서 서양의 가방 문화와 다르며, 포용성을 상징한다”고 말한 바 있다.

가방뿐 아니라 때로 돗자리와 가리개로 변신하며 다양한 기능을 해낸 보자기. 오랜 기간 하찮은 물건으로 여겨져 별 관심을 끌지 못했다가, 우리의 정서와 정신을 대변하며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보자기는 자수와 만나 더욱 멋을 더한다. 자수 보자기는 잉여와 포용의 미를 품은 생활 도구이자 예술품으로 위상을 높이고 있다.

보자기에도 수보, 조각보, 식지보, 누비보, 홑보, 겹보 등 여러 종류가 있다. 기하학적 무늬가 돋보이는 조각보(자투리 천으로 만든 보자기)는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보자기다. 이날의 수업은 수 조각보에 초점이 맞춰졌다. 보자기의 가운데에 수가 놓여 있고 그 주변을 조각들로 이어붙인 형태를 말한다.

수강생 윤호영 씨는 “조각보라는 게 옛날 서민들이 옷을 짓고 남는 천을 모아 뒀다가 보자기로 만들면서 생겼다고 들었는데 우리도 어렸을 때는 옷을 다 해 입었고 아버지 옷을 뜯고 풀어서 잘라내고 아이들 것을 만들곤 했다”며 “그런 생각을 하면서 조각을 이어붙이고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수를 놓으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편안해지는 게 있다”고 말했다.

또 자수를 놓으면 무에서 유를 만들어 가는 기쁨도 따른다. “전통 자수는 다른 취미 활동에 비해 더 성취감이 있다”고 한다. “퀼트(quilt)의 경우 천에 모양이 있어서 천과 천을 이어주는 작업이라면, 자수는 아무것도 없는 바탕천에 도안을 그려 넣고 하나하나 만들어 가는 것으로 생각했던 문양을 실제로 완성해 가는 과정이 큰 성취감을 가져다준다”는 것.

전통 자수에서 많이 쓰이던 문양은 주로 자연에서 나온다. 이날 수업에선 연꽃을 표현한 연화문 자수 보자기를 만들고 있었다. 수강생 김연화 씨는 “전통 자수의 매력은 희화화에 있다고 생각한다”며 문양의 독특함에 대해 말했다. “한 나무에 석류와 꽃이 같이 있을 수는 없는데 자수에는 같이 표현되는 것은 이 안에 우리가 바라는 소망을 담았기 때문이고, 개인적으로는 그런 히스토리에 매력이 있는 것 같다”고 전했다. 생각을 비우고, 소망을 정돈하는 데 자수만큼 유용한 취미도 찾기 어렵다고 한다.

김 명장은 전통 문양의 특징 가운데 ‘단순화’를 꼽았다. 일본이나 중국의 자수가 매우 사실적인 데 비해 한국은 단순화시켜 도안을 만든다는 설명이다. “전통 문양 중에는 해학적이고 재밌는 것들이 많거든요. 더듬이를 과장해서 그리거나 날개를 단순하게 표현하거나, 이파리도 줄기를 생략하고 단순하게 표현하죠. 너무 사실적이어서 재미없을 수 있는데 우리 자수는 나무 하나를 표현할 때도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해요.”

궁수와 민수의 구분에 따라 궁에서 쓰인 문양에는 주로 신분을 드러냈다. 왕의 경우 흉배나 보 등에 자수를 놓았는데 용의 발가락이 왕은 다섯 개, 세자는 네 개, 세손은 세 개로 구분됐다. 문관은 학을 무관을 호랑이를 새겨 넣었고, 학의 수를 통해 계급을 표현했다. 기본적으로 궁수와 민수 모두 자수 기법은 비슷하나, 궁에서는 같은 기법이라도 좀 더 세밀한 표현을 했다. “옛 분들이 참 멋있게 사셨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예로부터 자수를 놓았던 곳은 옷이나 이불, 병풍, 복주머니, 베갯모, 수저 집 등으로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김 명장이 자수 보자기에 주목한 것은 세계로 통하는 우리 문화를 고민하면서다. 조선시대 궁중 수방나인에게 정통을 계승한 윤정식 선생에게 수를 사사한 후 두루 자수를 놓았던 그가 궁극적으로 선택한 게 보자기였다. 그래서인지 그는 ‘전통 자수는 세계적이다’라는 지론을 갖고 있다.

그는 특히 자수의 ‘절제미’에 대해 말했다. “더 이상 뺄 게 없을 정도로 빼는 게 고수의 방법”이라고 한다. “최근 해외 유명 브랜드에서도 조각보를 응용해서 의상 디자인을 하는데 포인트를 줘서 만드는 절제미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자수 보자기를 전체적으로 봐도 예쁘지만 일부만 잘라서 액자를 만들어도 예쁘거든요. 학생들에게도 이렇게 대봐라, 저렇게 대봐라 부분적으로 표현할 것을 강조해요. 도안을 무작위로 찢어서 배열을 해도 좋고, 응용을 하면 여러 가지 멋있는 디자인이 나올 수가 있죠.”

멀리서도 한눈에 자수가 아름다워 보이는 이유에 대해서는 ‘자연의 색’과 ‘색의 배합’을 꼽았다. 천연 염색을 한 천과 실을 사용하면 어떤 색을 섞더라도 잘 어울리며, 사실적인 색감보다 색의 조화를 생각하며 수를 놓아 같은 색도 빛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것이 우리 자수의 특징이자 매력이라는 설명이다.

전통 자수가 예로부터 여인네들의 취미 활동으로 알려져 있다면 김 명장과 수강생들은 “취미를 뛰어넘는 작품으로서의 자수”를 강조했다. 그중에는 10년째 자수를 배우면서 매주 경남 진주에서 발걸음을 하는 열혈 수강생도 있었다. “취미라면 삶을 바꾸는 취미이며, 목표는 인생 작품을 남기는 것”이라며 다시 실과 바늘을 잡는 수강생들. 김 명장에게 수의 의미에 대해 물었다. 그는 “평생을 몸을 던져 억척스럽고 미련하게 수를 놓아 왔는데, 우리 자수의 수준을 높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기를 쓰고 했다”며 “평생을 이 길에 몰입할 수 있어서 좋았고, 그 길을 보고 따라와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더욱 보람”이라고 답했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62호(2018년 11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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