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 공인호 기자 / 사진 이승재 기자] 문화, 예술, 스포츠 등 한반도 비핵화를 전제로 한 남북 교류가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 최근에는 철도․도로 연결 등 남북 경협(경제협력)을 위한 대규모 인프라 구축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지만, 원활한 경협 추진을 위한 금융지원 논의는 전무한 실정이다. 무엇이 문제일까.
지난 9월 미국 재무부가 산업은행 등 국책은행을 비롯해 국내 주요 시중은행들을 상대로 ‘대북제재 준수’를 요청한 사실이 뒤늦게 확인됐다. 미 재무부가 직접 메시지를 전달한 것도 이례적이지만, 국내 시중은행까지 ‘경고’의 대상이었다는 점에서 한-미 공조의 균열을 우려하는 목소리까지 나오기도 했다. 당시는 국책은행 뿐 아니라 주요 시중은행들이 ‘통일금융’에 관심을 두고 중장기 로드맵 마련에 공을 들이던 시기였다. 대다수 은행이 남북 경협 관련 내부 TF팀을 구성했고 일부 은행은 통일 이후를 대비한 신탁상품을 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 재무부의 경고 이후 관련 사업과 일정이 사실상 중단된 상태다. 한 은행권 관계자는 “사실 기존에도 리서치(연구조사) 수준에 불과했는데 미 재무부 경고 이후 다들 몸을 사리는 상황”라며 “미국의 대북제재 완화 이후에나 재개가 가능할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이윤석 KIF(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향후 원활한 경제협력을 위해서는 금융지원이 필수적인 만큼, 제재 완화까지 마냥 기다리는 것도 능사는 아니라고 지적했다. 이 연구위원은 KIF 내 북한금융센터에 몸담고 있는 국제금융 전문가로, 지난 9월에는 박해식 선임연구위원과 함께 ‘북한의 경제개발을 위한 금융 활용방안’ VIP 리포트를 집필하기도 했다. 한국은행, 기획재정부, 한국투자공사 등 민관을 넘나들면 국제경제 및 국제금융 전문가로 활동해온 이 연구위원을 직접 만나 남북 금융협력에 대한 의견을 직접 들어봤다.
대북 제재를 둘러싼 미국 정부의 태도가 강경해 보입니다. 우리 정부의 적극적 행보를 비판하는 시각도 있는데.
트럼프 대통령의 ‘스타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기본적으로 대북 제재의 완화라는 큰 방향은 맞지만 최종 권한은 자신들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몽니라고 해야 할까요. 언젠가는 내려놔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마지막까지 붙들고 싶은 게 힘과 권력의 속성이죠. 우리 정부에 대한 내부 비판은 일면 수긍할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전쟁의 당사국이자 동맹국인 미국과의 공조가 흔들려서는 안된다는 보수적인 안보관이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는거죠. 역대 보수정권 하에서 우리 정부 행보도 그래왔고요. 하지만 그런 태도가 우리 정부의 ‘중재자’ 역할에 밑거름이 된 것도 사실입니다. 만약 우리가 남북 관계에서 제 목소리를 내 왔다면 중재자 역할을 하기 어려웠을 수 있었죠. 같은 맥락에서 우리 정부의 실용주의 외교 노선이 빛을 발하고 있는 단계가 아닐까 싶네요.
연장선에서 종전선언 및 향후 남북 경제협력 시나리오를 예측해 주신다면
지난 1년 숨가빳던 시간을 되짚어보면 예상을 뛰어넘는 진전이 있었죠. 물론 속단하기는 어렵지만 현재까지 진행 상황을 보면 대북 제재는 단계적으로 완화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특히 한-미 고위 당국자간 논의 과정에서 제재 완화와 함께 ‘제재 면제’가 언급됐다는 점은 매우 고무적입니다. 북한의 개혁 개방시 남한의 경제협력 우선권을 인정한다는 의미로, 그렇게 되면 우리에게 훨씬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는 셈이죠. 현재로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의중이 중요한데 사업가 출신이다 보니 북한 개발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무엇보다 종전선언의 경우 외생 변수로만 보는 시각이 있는데 내생 변수로 인식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정부 바람대로 연내 종전선언이 이뤄지려면 우리 스스로 무엇을 해야할지 고민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거죠. 같은 맥락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적극적인 해외순방은 긍정적 내생변수로 볼 수 있겠죠.
남북 경제협력 기대감과 달리 ‘금융 협력’에 대한 논의는 많이 부족해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현재까지 세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이 있었지만 이후 ‘금융’과 관련된 논의나 검토가 필요하다는 얘기는 나온 적이 없었죠. 경제특구, 관광특구, 철도․도로 연결 등의 사업의 경우 막대한 규모의 자금이 필요한데도 말이죠. 우리 정부 입장에서는 제재 완화 이전에 불필요한 논란을 만들지 않으려는 의중으로 읽힙니다. 최근 미국 재무부가 국내 은행들을 직접 압박하고 나선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입니다. 앞서 언급했듯 대북 제재는 완화 쪽으로 기울고 있지만 아직까지 북미 정상간 실질적 합의 내용이 없기 때문에 고삐를 늦추지 않으려는 것이겠죠. 사실 우리 내부의 속사정도 감안해야 합니다. 남북 문제는 통일부가 주도하고 있는데, 비경제 부처이다 보니 무게 중심 자체가 금융 쪽으로 기울기 힘든 상황인 것도 현실입니다. 스포츠, 문화, 예술 교류 등에 우선 순위를 두고 제재 완화 이후 금융 부문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이뤄지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상해 봅니다.
그렇다면 현 시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이 있을까요.
금융 분야의 남북 교류 역시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 대화를 시도해야 합니다. 제재 완화 이전이라 공개적으로 나서기 어렵다면 민간 차원의 학술적 교류부터 이뤄져야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남북간 학술 교류는 의지의 문제지만 그동안 단 한 차례도 열린 적이 없죠.
이를테면 북한의 경우 김일성종합대학이나 사회과학원 내 경제연구소가 있는데 우리의 국책연구기관 정도로 볼 수 있습니다. 민간 차원의 교류가 활성화 되면 제재 완화 이후 실무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뤄질 수 있는 여건도 마련될 수 있는거죠. 민간입장에서는 학술교류 등을 준비하고 싶어도 인적 네트워크 및 정보부족 등으로 인해 북측 상대방이 누구인지 파악하고 연락하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이런 점에서 정부가 교류 및 접촉 상대방을 찾아주고 중재해주는 보다 적극적인 역할이 필요한 때입니다.
당장 남북 철도 도로 연결 얘기가 나오는데 금융 협력 방안이 시급하지 않은가요.
현 시점은 ‘조사’ 과정인 만큼 당장 거액의 자금이 필요한 상황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일부 소요 자금은 남북이 자체적으로 조달하거나 남북협력기금에서 충당할 수 있겠죠. 다만 실제 착공이 시작되면 대규모 자재와 노동력 투입이 필요한데 과거 현대그룹의 금강산 관광 개발 당시처럼 사후 사업권과 운영권을 보장받는 형태로 진행될 가능성도 있어 보입니다.
이를테면 모 금융사가 지난 8월 북측과 체육행사를 진행한 사례처럼 제재 완화 이후 인출할 수 있는 조건으로 대금을 지급하는 것도 여러 방안 중에 하나일 수 있겠죠. 제재 이전이기는 하지만 에스크로나 물물교환 등의 상계처리 방식도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북측에서는 내년 다양한 부문의 사업 개시를 앞두고 준비 작업에 착수했다는 소식도 들리는데 정확한 내용은 확인하기 어렵네요.
대북 제재 완화 이후 글로벌 자금이 본격적으로 유입되면 한국 기업들이 소외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옵니다.
기우가 아닐까 싶네요. 사실 북한에는 북-중 합작 법인 등을 통해 중국 자본이 이미 들어가 있고, 이집트 통신사의 경우 북한에 투자해 운영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죠. 하지만 북한 시장이 본격적으로 개방되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고 어느 나라가 시장을 선점하느냐는 전적으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의중에 달렸다고 봐야 합니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그간의 김 위원장 행보를 봤을 때 결국 선택은 남한이 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무엇보다 언어와 역사, 문화적 동질성 측면에서 가장 편안한 상대가 남한일 수밖에 없죠. 우리의 법체계 역시 북한과의 교류를 해외가 아닌 민족 ‘내부 거래’로 인식해 왔는데, 그런 법률상 특성만 보더라도 남북 경협 역시 내생변수로 보는 게 타당하다는 판단입니다. 현 북한 당국도 과거 금강산 개발 당시 약속했던 사업권을 현대 측에 우선 제공한다는 방침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죠. 물론 일각에서는 북한 측의 발언을 신뢰할 수 있겠느냐는 비판적 시각도 있지만, 서로에 대한 불신이 지속되면 결국 악순환이 반복될 수밖에 없게 되겠죠.
국내 은행의 북한 진출 시 시장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는 방안이 있다면.
현 시점에서는 주도권 확보 여부보다는 북한 금융시스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할 것 같네요. 당장 어떤 인프라가 필요한가를 생각해보면 답은 나오죠. 북한의 경우 사회주의 국가다 보니 자본시장이 급속히 발달할 수 있는 구조는 아닙니다. 우리와 유사한 형태의 주식회사(기업소)도 있고 ‘자본금’이라는 말도 공공연하게 쓰이고 있지만 일부 경제특구에 한해서는 쓰는 것 같습니다. 경제 전반에 사적 소유의 개념이 정립돼 있지 않기 때문에 자본시장보다는 은행 시스템이 먼저 발전할 수밖에 없는 구조인거죠. 예금과 대출 등 은행업 외에도 카드사와 지급결제대행(PG)사 등에게도 기회의 문이 열릴 것으로 보입니다. 북한의 경우 체크카드가 일부 활용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신용카드 시스템이 없어 초기 시장 선점이 중요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와 별도로 남측 원화 결제 확대를 위한 정부의 정책적 지원도 필요해 보입니다. 사실 북한의 경우 북한 원화에 대한 신뢰가 크게 훼손된 상황입니다. 과거 화폐개혁 등으로 기존 화폐 가치가 크게 추락하면서 달러, 유로화 등 외화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진 거죠.
따라서 중장기적으로 북한에서 남측 원화를 자유롭게 통용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든다면 금융시장 진출에 있어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게 됩니다. 독일의 동서독 교류 과정에서 서독 마르크화의 환전 한도를 확대하면서 자연스럽게 화폐 통합을 이뤄낸 전례도 있죠. 우리도 향후 북한 금강산 관광 등에서 남측 원화를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국내 은행들 입장에서는 과거 개성공단이나 금강산 인근에 설치한 영업점들이 해외점포로 분류돼 달러화로 지급결제를 했었는데, 향후 원화로 지급결제를 하게 되면 대출 재원으로써 활용도 가능해지겠죠. 북한 정부 입장에서도 남북한이 하나의 경제 공동체를 형성해나간다는 측면에서 나쁘지 않은 선택지입니다. 외화 중심의 화폐 통용을 방치할 경우 역내 통화정책의 효과를 거두기 어렵습니다. 금융 불안이 반복되는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이 대표적인 사례로 미국 경제에 종속될 수밖에 없게되는 거죠.
국내은행의 동남아 진출 경험이 북한 시장 개척에도 도움이 될까요.
아무래도 미얀마, 베트남, 라오스 등도 사회주의 색채가 강한 국가인 만큼 이들 나라에서의 경험이 도움이 될 거라고 봅니다. 이들 나라의 경우 은행 중심의 제1금융보다 대부업체 등 서민금융 시장이 더 발달했죠. 영업점 네트워크 역시 오프라인>온라인>모바일 순의 기존 단계를 밟지 않고 곧바로 모바일 중심의 금융 시스템으로 갈 확률이 높습니다. 이미 북한에도 신흥 부유층인 ‘돈주’가 암암리에 대부업을 하고 있는 상황인데 북한 시장이 개방되면 북한 정부가 돈주의 양성화를 추진할 확률이 높습니다. 곧바로 법인 신설이 어려울 경우 돈주와 함께 ‘합영은행’ 형태로 시장 진출을 모색하는 것도 리스크를 줄이는 방법이 될 수 있죠. 합영은행은 공동 출자 및 공동 운영이 가능한 법인 형태로, 현재 북한에서 영위할 수 있는 은행 형태는 합영은행을 비롯해 외국인은행, 외국인은행 지점 등이 있습니다. 외국인은행 및 지점은 특수경제지대에만 설립할 수 있지만 합영은행은 제한이 없다는 게 최대 강점이죠. 국내 은행들이 합영은행 형태로 북한에 진출할 경우 소매금융은 물론 차후에는 기업금융도 가능해지지 않을까 예상됩니다. 다만 이를 위해서는 북한 주민들의 정상적인 경제활동이 전제돼야 합니다. 은행업이라는 게 결국 경제 주체들의 소득과 예금을 대출 재원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과당경쟁도 우려 요인일 수 있겠네요.
2500만이라는 새로운 시장이 열리는 것인데 대다수 금융사들이 진출을 모색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아무런 준비 없이 들어가는 것보다는 각 은행마다 저마다 강점을 갖고 나가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네요. 국내은행들 대부분이 동남아 시장에서도 천편일률적인 영업을 하고 있는데, 그래서 제살 깎아먹기 혹은 과당경쟁 우려가 나오는 거죠.
문제는 국내은행들의 경쟁력이 평준화 됐다는 점입니다. 이는 과거 은행 간 인수합병(M&A)이 원인이 됐는데, 은행의 대형화가 꼭 경쟁력 강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를테면 KB국민은행의 경우 소매금융, 우리은행은 기업금융, KEB하나은행은 PB(Private banking) 부문이 강점이었는데 과거의 경쟁력이 유지되고 있는가는 생각해볼 문제죠. 오히려 이것저것 하다 보니 기존의 경쟁력이 후퇴한 측면도 있다고 봅니다. 대형화를 주장했던 논리가 옹색해진 거죠. 물론 대형화를 통해 글로벌 인지도는 높아진 측면은 분명히 있습니다. 작은 은행들이 각개 약진하는 것보다 자산 규모를 내세운 대형은행이 아무래도 유리하니까요. 하지만 글로벌 대형은행들이 즐비한 상황에서 자산 규모만으로 어필하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최소한 해외 진출에서라도 각 은행들이 본연의 경쟁력에 대한 충분한 고민을 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습니다.
끝으로 북한의 바람직한 경제개발 모델을 제시해주신다면. 일각에선 베트남식 모델을 예측하는 시각도 있는데.
개인적으로 베트남식 경제개발 방식이 북한의 벤치마크 모델인지는 의문이 듭니다. 베트남은 20년 이상 더디게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옮겨가는 형태인데 기간에 비해 성과도 기대에 못미치는 것 아닌가 생각됩니다. 사실 성공한 모델이라고 보긴 어렵다는 얘기죠.
오히려 싱가포르 모델이 북한이 참고하는 하나의 모델이지 않을까 싶네요. 김 위원장이 북미 정상회담을 싱가포르에서 개최하기를 원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싱가포르는 작은 도시국가이기는 하지만 무역금융 활성화와 함께 우리나라의 60년대처럼 철저히 개발독재형 방식을 취해왔습니다. 또한 북한은 빠른 경제발전을 위해 중국식 자본주의 시스템을 도입할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중국의 경우 베트남에 비해 외자 유치 속도가 빨랐는데 중국 내에 스타트업 기업이 많은 것도 투자환경이 그만큼 활성화 됐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죠. 이처럼 북한 입장에서는 선택 가능한 경제개발 모델이 다양합니다. 계획경제의 싱가포르 모델을 기반으로, 중국 IT기업들의 빠른 성장을 가져온 민간 부문의 개방, 그리고 남한의 고도성장 경험을 동시에 취할 수 있는 셈이죠. 이를테면 인프라 등 대규모 자금이 투입되는 사업은 계획경제 하에서 추진하고, IT 스타트업 기업에게는 문호를 활짝 개방해주는 방식을 취하지 않을까 예상하고 있습니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62호(2018년 11월) 기사입니다.]
지난 9월 미국 재무부가 산업은행 등 국책은행을 비롯해 국내 주요 시중은행들을 상대로 ‘대북제재 준수’를 요청한 사실이 뒤늦게 확인됐다. 미 재무부가 직접 메시지를 전달한 것도 이례적이지만, 국내 시중은행까지 ‘경고’의 대상이었다는 점에서 한-미 공조의 균열을 우려하는 목소리까지 나오기도 했다. 당시는 국책은행 뿐 아니라 주요 시중은행들이 ‘통일금융’에 관심을 두고 중장기 로드맵 마련에 공을 들이던 시기였다. 대다수 은행이 남북 경협 관련 내부 TF팀을 구성했고 일부 은행은 통일 이후를 대비한 신탁상품을 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 재무부의 경고 이후 관련 사업과 일정이 사실상 중단된 상태다. 한 은행권 관계자는 “사실 기존에도 리서치(연구조사) 수준에 불과했는데 미 재무부 경고 이후 다들 몸을 사리는 상황”라며 “미국의 대북제재 완화 이후에나 재개가 가능할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이윤석 KIF(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향후 원활한 경제협력을 위해서는 금융지원이 필수적인 만큼, 제재 완화까지 마냥 기다리는 것도 능사는 아니라고 지적했다. 이 연구위원은 KIF 내 북한금융센터에 몸담고 있는 국제금융 전문가로, 지난 9월에는 박해식 선임연구위원과 함께 ‘북한의 경제개발을 위한 금융 활용방안’ VIP 리포트를 집필하기도 했다. 한국은행, 기획재정부, 한국투자공사 등 민관을 넘나들면 국제경제 및 국제금융 전문가로 활동해온 이 연구위원을 직접 만나 남북 금융협력에 대한 의견을 직접 들어봤다.
대북 제재를 둘러싼 미국 정부의 태도가 강경해 보입니다. 우리 정부의 적극적 행보를 비판하는 시각도 있는데.
트럼프 대통령의 ‘스타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기본적으로 대북 제재의 완화라는 큰 방향은 맞지만 최종 권한은 자신들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몽니라고 해야 할까요. 언젠가는 내려놔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마지막까지 붙들고 싶은 게 힘과 권력의 속성이죠. 우리 정부에 대한 내부 비판은 일면 수긍할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전쟁의 당사국이자 동맹국인 미국과의 공조가 흔들려서는 안된다는 보수적인 안보관이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는거죠. 역대 보수정권 하에서 우리 정부 행보도 그래왔고요. 하지만 그런 태도가 우리 정부의 ‘중재자’ 역할에 밑거름이 된 것도 사실입니다. 만약 우리가 남북 관계에서 제 목소리를 내 왔다면 중재자 역할을 하기 어려웠을 수 있었죠. 같은 맥락에서 우리 정부의 실용주의 외교 노선이 빛을 발하고 있는 단계가 아닐까 싶네요.
연장선에서 종전선언 및 향후 남북 경제협력 시나리오를 예측해 주신다면
지난 1년 숨가빳던 시간을 되짚어보면 예상을 뛰어넘는 진전이 있었죠. 물론 속단하기는 어렵지만 현재까지 진행 상황을 보면 대북 제재는 단계적으로 완화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특히 한-미 고위 당국자간 논의 과정에서 제재 완화와 함께 ‘제재 면제’가 언급됐다는 점은 매우 고무적입니다. 북한의 개혁 개방시 남한의 경제협력 우선권을 인정한다는 의미로, 그렇게 되면 우리에게 훨씬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는 셈이죠. 현재로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의중이 중요한데 사업가 출신이다 보니 북한 개발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무엇보다 종전선언의 경우 외생 변수로만 보는 시각이 있는데 내생 변수로 인식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정부 바람대로 연내 종전선언이 이뤄지려면 우리 스스로 무엇을 해야할지 고민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거죠. 같은 맥락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적극적인 해외순방은 긍정적 내생변수로 볼 수 있겠죠.
남북 경제협력 기대감과 달리 ‘금융 협력’에 대한 논의는 많이 부족해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현재까지 세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이 있었지만 이후 ‘금융’과 관련된 논의나 검토가 필요하다는 얘기는 나온 적이 없었죠. 경제특구, 관광특구, 철도․도로 연결 등의 사업의 경우 막대한 규모의 자금이 필요한데도 말이죠. 우리 정부 입장에서는 제재 완화 이전에 불필요한 논란을 만들지 않으려는 의중으로 읽힙니다. 최근 미국 재무부가 국내 은행들을 직접 압박하고 나선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입니다. 앞서 언급했듯 대북 제재는 완화 쪽으로 기울고 있지만 아직까지 북미 정상간 실질적 합의 내용이 없기 때문에 고삐를 늦추지 않으려는 것이겠죠. 사실 우리 내부의 속사정도 감안해야 합니다. 남북 문제는 통일부가 주도하고 있는데, 비경제 부처이다 보니 무게 중심 자체가 금융 쪽으로 기울기 힘든 상황인 것도 현실입니다. 스포츠, 문화, 예술 교류 등에 우선 순위를 두고 제재 완화 이후 금융 부문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이뤄지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상해 봅니다.
그렇다면 현 시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이 있을까요.
금융 분야의 남북 교류 역시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 대화를 시도해야 합니다. 제재 완화 이전이라 공개적으로 나서기 어렵다면 민간 차원의 학술적 교류부터 이뤄져야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남북간 학술 교류는 의지의 문제지만 그동안 단 한 차례도 열린 적이 없죠.
이를테면 북한의 경우 김일성종합대학이나 사회과학원 내 경제연구소가 있는데 우리의 국책연구기관 정도로 볼 수 있습니다. 민간 차원의 교류가 활성화 되면 제재 완화 이후 실무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뤄질 수 있는 여건도 마련될 수 있는거죠. 민간입장에서는 학술교류 등을 준비하고 싶어도 인적 네트워크 및 정보부족 등으로 인해 북측 상대방이 누구인지 파악하고 연락하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이런 점에서 정부가 교류 및 접촉 상대방을 찾아주고 중재해주는 보다 적극적인 역할이 필요한 때입니다.
당장 남북 철도 도로 연결 얘기가 나오는데 금융 협력 방안이 시급하지 않은가요.
현 시점은 ‘조사’ 과정인 만큼 당장 거액의 자금이 필요한 상황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일부 소요 자금은 남북이 자체적으로 조달하거나 남북협력기금에서 충당할 수 있겠죠. 다만 실제 착공이 시작되면 대규모 자재와 노동력 투입이 필요한데 과거 현대그룹의 금강산 관광 개발 당시처럼 사후 사업권과 운영권을 보장받는 형태로 진행될 가능성도 있어 보입니다.
이를테면 모 금융사가 지난 8월 북측과 체육행사를 진행한 사례처럼 제재 완화 이후 인출할 수 있는 조건으로 대금을 지급하는 것도 여러 방안 중에 하나일 수 있겠죠. 제재 이전이기는 하지만 에스크로나 물물교환 등의 상계처리 방식도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북측에서는 내년 다양한 부문의 사업 개시를 앞두고 준비 작업에 착수했다는 소식도 들리는데 정확한 내용은 확인하기 어렵네요.
대북 제재 완화 이후 글로벌 자금이 본격적으로 유입되면 한국 기업들이 소외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옵니다.
기우가 아닐까 싶네요. 사실 북한에는 북-중 합작 법인 등을 통해 중국 자본이 이미 들어가 있고, 이집트 통신사의 경우 북한에 투자해 운영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죠. 하지만 북한 시장이 본격적으로 개방되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고 어느 나라가 시장을 선점하느냐는 전적으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의중에 달렸다고 봐야 합니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그간의 김 위원장 행보를 봤을 때 결국 선택은 남한이 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무엇보다 언어와 역사, 문화적 동질성 측면에서 가장 편안한 상대가 남한일 수밖에 없죠. 우리의 법체계 역시 북한과의 교류를 해외가 아닌 민족 ‘내부 거래’로 인식해 왔는데, 그런 법률상 특성만 보더라도 남북 경협 역시 내생변수로 보는 게 타당하다는 판단입니다. 현 북한 당국도 과거 금강산 개발 당시 약속했던 사업권을 현대 측에 우선 제공한다는 방침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죠. 물론 일각에서는 북한 측의 발언을 신뢰할 수 있겠느냐는 비판적 시각도 있지만, 서로에 대한 불신이 지속되면 결국 악순환이 반복될 수밖에 없게 되겠죠.
국내 은행의 북한 진출 시 시장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는 방안이 있다면.
현 시점에서는 주도권 확보 여부보다는 북한 금융시스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할 것 같네요. 당장 어떤 인프라가 필요한가를 생각해보면 답은 나오죠. 북한의 경우 사회주의 국가다 보니 자본시장이 급속히 발달할 수 있는 구조는 아닙니다. 우리와 유사한 형태의 주식회사(기업소)도 있고 ‘자본금’이라는 말도 공공연하게 쓰이고 있지만 일부 경제특구에 한해서는 쓰는 것 같습니다. 경제 전반에 사적 소유의 개념이 정립돼 있지 않기 때문에 자본시장보다는 은행 시스템이 먼저 발전할 수밖에 없는 구조인거죠. 예금과 대출 등 은행업 외에도 카드사와 지급결제대행(PG)사 등에게도 기회의 문이 열릴 것으로 보입니다. 북한의 경우 체크카드가 일부 활용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신용카드 시스템이 없어 초기 시장 선점이 중요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와 별도로 남측 원화 결제 확대를 위한 정부의 정책적 지원도 필요해 보입니다. 사실 북한의 경우 북한 원화에 대한 신뢰가 크게 훼손된 상황입니다. 과거 화폐개혁 등으로 기존 화폐 가치가 크게 추락하면서 달러, 유로화 등 외화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진 거죠.
따라서 중장기적으로 북한에서 남측 원화를 자유롭게 통용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든다면 금융시장 진출에 있어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게 됩니다. 독일의 동서독 교류 과정에서 서독 마르크화의 환전 한도를 확대하면서 자연스럽게 화폐 통합을 이뤄낸 전례도 있죠. 우리도 향후 북한 금강산 관광 등에서 남측 원화를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국내 은행들 입장에서는 과거 개성공단이나 금강산 인근에 설치한 영업점들이 해외점포로 분류돼 달러화로 지급결제를 했었는데, 향후 원화로 지급결제를 하게 되면 대출 재원으로써 활용도 가능해지겠죠. 북한 정부 입장에서도 남북한이 하나의 경제 공동체를 형성해나간다는 측면에서 나쁘지 않은 선택지입니다. 외화 중심의 화폐 통용을 방치할 경우 역내 통화정책의 효과를 거두기 어렵습니다. 금융 불안이 반복되는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이 대표적인 사례로 미국 경제에 종속될 수밖에 없게되는 거죠.
국내은행의 동남아 진출 경험이 북한 시장 개척에도 도움이 될까요.
아무래도 미얀마, 베트남, 라오스 등도 사회주의 색채가 강한 국가인 만큼 이들 나라에서의 경험이 도움이 될 거라고 봅니다. 이들 나라의 경우 은행 중심의 제1금융보다 대부업체 등 서민금융 시장이 더 발달했죠. 영업점 네트워크 역시 오프라인>온라인>모바일 순의 기존 단계를 밟지 않고 곧바로 모바일 중심의 금융 시스템으로 갈 확률이 높습니다. 이미 북한에도 신흥 부유층인 ‘돈주’가 암암리에 대부업을 하고 있는 상황인데 북한 시장이 개방되면 북한 정부가 돈주의 양성화를 추진할 확률이 높습니다. 곧바로 법인 신설이 어려울 경우 돈주와 함께 ‘합영은행’ 형태로 시장 진출을 모색하는 것도 리스크를 줄이는 방법이 될 수 있죠. 합영은행은 공동 출자 및 공동 운영이 가능한 법인 형태로, 현재 북한에서 영위할 수 있는 은행 형태는 합영은행을 비롯해 외국인은행, 외국인은행 지점 등이 있습니다. 외국인은행 및 지점은 특수경제지대에만 설립할 수 있지만 합영은행은 제한이 없다는 게 최대 강점이죠. 국내 은행들이 합영은행 형태로 북한에 진출할 경우 소매금융은 물론 차후에는 기업금융도 가능해지지 않을까 예상됩니다. 다만 이를 위해서는 북한 주민들의 정상적인 경제활동이 전제돼야 합니다. 은행업이라는 게 결국 경제 주체들의 소득과 예금을 대출 재원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과당경쟁도 우려 요인일 수 있겠네요.
2500만이라는 새로운 시장이 열리는 것인데 대다수 금융사들이 진출을 모색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아무런 준비 없이 들어가는 것보다는 각 은행마다 저마다 강점을 갖고 나가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네요. 국내은행들 대부분이 동남아 시장에서도 천편일률적인 영업을 하고 있는데, 그래서 제살 깎아먹기 혹은 과당경쟁 우려가 나오는 거죠.
문제는 국내은행들의 경쟁력이 평준화 됐다는 점입니다. 이는 과거 은행 간 인수합병(M&A)이 원인이 됐는데, 은행의 대형화가 꼭 경쟁력 강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를테면 KB국민은행의 경우 소매금융, 우리은행은 기업금융, KEB하나은행은 PB(Private banking) 부문이 강점이었는데 과거의 경쟁력이 유지되고 있는가는 생각해볼 문제죠. 오히려 이것저것 하다 보니 기존의 경쟁력이 후퇴한 측면도 있다고 봅니다. 대형화를 주장했던 논리가 옹색해진 거죠. 물론 대형화를 통해 글로벌 인지도는 높아진 측면은 분명히 있습니다. 작은 은행들이 각개 약진하는 것보다 자산 규모를 내세운 대형은행이 아무래도 유리하니까요. 하지만 글로벌 대형은행들이 즐비한 상황에서 자산 규모만으로 어필하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최소한 해외 진출에서라도 각 은행들이 본연의 경쟁력에 대한 충분한 고민을 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습니다.
끝으로 북한의 바람직한 경제개발 모델을 제시해주신다면. 일각에선 베트남식 모델을 예측하는 시각도 있는데.
개인적으로 베트남식 경제개발 방식이 북한의 벤치마크 모델인지는 의문이 듭니다. 베트남은 20년 이상 더디게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옮겨가는 형태인데 기간에 비해 성과도 기대에 못미치는 것 아닌가 생각됩니다. 사실 성공한 모델이라고 보긴 어렵다는 얘기죠.
오히려 싱가포르 모델이 북한이 참고하는 하나의 모델이지 않을까 싶네요. 김 위원장이 북미 정상회담을 싱가포르에서 개최하기를 원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싱가포르는 작은 도시국가이기는 하지만 무역금융 활성화와 함께 우리나라의 60년대처럼 철저히 개발독재형 방식을 취해왔습니다. 또한 북한은 빠른 경제발전을 위해 중국식 자본주의 시스템을 도입할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중국의 경우 베트남에 비해 외자 유치 속도가 빨랐는데 중국 내에 스타트업 기업이 많은 것도 투자환경이 그만큼 활성화 됐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죠. 이처럼 북한 입장에서는 선택 가능한 경제개발 모델이 다양합니다. 계획경제의 싱가포르 모델을 기반으로, 중국 IT기업들의 빠른 성장을 가져온 민간 부문의 개방, 그리고 남한의 고도성장 경험을 동시에 취할 수 있는 셈이죠. 이를테면 인프라 등 대규모 자금이 투입되는 사업은 계획경제 하에서 추진하고, IT 스타트업 기업에게는 문호를 활짝 개방해주는 방식을 취하지 않을까 예상하고 있습니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62호(2018년 11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