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피에트로 대성당의 길이는 211.5m, 르네상스와 바로크 예술의 극치다. 성당 앞의 산 피에트로 광장은 1655년부터 12년에 걸쳐 베르니니가 설계해서 완성했다. 광장 가운데 오벨리스크를 중심으로 도리아 양식의 기둥 284개가 반원형으로 회랑을 이룬다.]
[한경 머니 기고=이석원 여행전문기자]정문 위의 두 사내. 잔뜩 일그러진 얼굴, 고통스러워 보인다. 구불구불한 머리카락도 뒤틀린 심정으로 드러낸 왼쪽의 노인. 그에 비해 단정한 단발머리에 핸섬함, 지성과 감성이 적절히 배합된 평안한 표정의 오른쪽 미청년. 왼쪽의 노인은 미켈란젤로, 오른쪽의 미청년은 라파엘로다.
[실제 바티칸 박물관으로 들어가는 입구로 사용하지는 않지만, 이곳이 정문이다. 문 위 2명의 조각은 미켈란젤로(왼쪽)와 라파엘로다.]
높고 긴 성벽을 따라 늘어선 사람들의 행렬은 길다. 이른 시간인데 이들은 언제부터 이 긴 줄의 한 부분이 돼 있었을까. 르네상스 3대 미술가 중 2명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와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io)가 정문에서 사람들을 맞이하는 이곳이 바로 바티칸 박물관(Musei Vaticani)이다.
바티칸 박물관 정문에 왜 하필이면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가 조각돼 있을까. 그리고 그들은 왜 저렇게 다른 모습으로 함께 한 걸까. 이들이 사실상 바티칸 박물관을 만든 장본인이다. 바티칸 박물관은 16세기 이후 역대 교황들의 궁전이었다. 교황 율리우스 2세가 당대 최고의 조각가와 화가인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를 바티칸으로 불러서 궁전을 만들게 했다. 그 후 1774년 교황 클레멘스 14세가 이곳을 일반에게 공개했다.
현대예술을 압도하는 극사실주의
박물관을 비롯해 바티칸의 건축물들은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작품 전시장이다.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위대한 프레스코화와 조각이 원형 그대로 사람들을 맞는다. 바티칸 박물관의 첫 여정이라고 할 수 있는 ‘회화의 방 피나코테카(Pinacoteca)’에 들어서면 황금빛으로 눈이 부신 르네상스 이전의 성화들이 찬란하다. 철저히 평면적인 제단화들,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를 중심으로 성경의 인물들을 황금 바탕에 정교하게 그려냈다.
[회화의 방에 있는 라파엘로의 그림. 왼쪽은 10대 때, 가운데는 20대 때, 그리고 오른쪽은 30대 때의 그림이다. 그림의 상하가 완벽히 이분법으로 나눠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방으로 들어서면 비로소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원근법을 사용해 사람과 사람 거리나 공간의 구분이 생긴다. 특히 화면 한가운데를 기준으로 상하로 나뉘는 이분법은 하늘(신)과 땅(인간)의 공간을 명확히 구분한다. 라파엘로의 <그리스도의 변형(Transfiguration)>은 현대의 극사실주의를 압도한다.
회화의 방을 통과하면 어둠 속에서 한껏 커진 동공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찬란한 태양 때문에 눈을 가리게 된다. 바티칸에서 가장 환한 빛을 온몸으로 만끽할 수 있는 ‘피냐 정원(Cortile della Pigna)’에서 스탕달 신드롬으로부터의 휴식을 취한다.
위대한 작품으로부터 받는 것 중엔 감동도 있지만 스트레스도 있다. 위대한 르네상스와 바로크 회화를 감상한 끝에 오는 것은 정서의 풍요로움만은 아니다. 그래서 잠시 맑고 밝은 햇빛과의 조우는 중요하다. 이제 2000년 그 이상으로 ‘타임워프’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바티칸 박물관 라파엘로의 방에 있는 유명한 프레스코화 <아테네 학당>.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와 수학자 등을 세심하게 그려놓은 작품이다.]
‘벨베데레의 뜰(Cortile del Belvedere)’은 박물관이 완성되기 전 15세기 후반 당대 최고의 건축가인 브라만테가 교황 인토켄티우스 8세를 위해 조성한 고대 그리스와 로마 조각상들의 집합소다. 바티칸에 전시된 고대의 조각품들은 서기 313년 로마에서 그리스도교가 공인된 후 대부분 테베레강에 내던져졌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이들을 우상이라고 생각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조각품들을 건져 올렸다. 이 조각들은 르네상스 사실묘사주의의 텍스트가 됐다.
두 마리의 뱀과 사투를 벌이는 트로이의 사제 ‘랴오콘’의 팔 근육은 라파엘로의 회화에 응용됐고, 태양과 예술의 신 아폴론의 잘생긴 얼굴은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의 예수 얼굴이 됐다. ‘뮤즈 여신의 방(Sala delle Muse)’ 복도를 차지하고 있는 토르소(torso)는 미켈란젤로가 직접 발굴한 것으로 머리와 팔다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미켈란젤로는 “이 자체로도 가장 완벽한 인체다”라고 극찬했다. 물론 <최후의 심판>에서 예수의 몸으로 재탄생한다.
율리우스 2세 교황이 가장 사랑한 라파엘로에게 주어진 4개의 방. 그 세 번째 방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디오게네스와 유클리드, 그리고 이들 모두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만난다.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이다. 그림 속 인물들은 더 큰 재미다. 이상세계를 표현하는 플라톤과 현실 이성을 강조하는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못생긴 소크라테스. 그런데 라파엘로는 자신의 라이벌인 미켈란젤로, 자신의 모습과 사랑하던 여인까지 그려 넣었다.
미켈란젤로보다 여덟 살 어리지만 서른여덟 살의 나이에 죽은 라파엘로는 늘 아름다운 미청년으로 기억됐다. 바티칸 박물관 정문 위 라파엘로의 조각이 미청년의 모습인 이유이기도 하다.
벽면과 천장에 펼쳐지는 ‘천상의 예술’
공간이 바뀐다. 바티칸 박물관을 뒤로 하고 계단을 오르면 슬슬 가슴이 요동친다. 오르는 계단이 하늘로 이어진 듯하다. 그리고 그 끝에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이라고 해도 절대 과하지 않은 천재의 예술품이 나온다. ‘시스티나 경당(Capella Sistina)’, 그리고 그 천장의 <천지창조>, 제대 벽면의 <최후의 심판>. 미켈란젤로의 숨 막히는 천상의 예술이 펼쳐진다.
시스티나 경당은 교황만을 위한 기도와 미사 공간이다. 그리고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conclave)’가 이뤄진다. 율리우스 2세는 이곳 천장화를 미켈란젤로에게 맡겼다. 길이 40.23m, 높이 20.73m. 미켈란젤로는 1503년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채 5년이 안 돼 이 위대한 그림을 완성했다. 스물여덟 살 팔팔한 청년 때 시작한 이 그림을 완성하고 난 후 미켈란젤로는 한쪽 눈을 실명하고, 몸이 꾸부정해진 완전 노인이 돼 버렸다.
미켈란젤로는 거의 아흔 살까지 장수했다. 하지만 스물여덟 살 때 <천지창조>를 그리면서 생긴 몸의 이상으로 평생을 거의 장애인으로 살았다. 라파엘로와는 대비된 바티칸 박물관 정문의 미켈란젤로 모습이 이것으로 설명된다.
<천지창조>는 세세히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몸의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온전히 시스티나 경당에 서서 목을 거의 90도로 꺾고 한참을 응시해야만 제대로 볼 수 있다. 구약성경 창세기의 천지창조와 인간의 창조, 에덴동산에서의 축출과 노아의 홍수로 이뤄진 이 그림을 다 보고 나면 목의 불편함은 극에 달한다. 그러니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의 상태야 더 말해 무엇할까.
그러나 <최후의 심판>에 시선이 이르면 이는 또 다른 감동이다. 목이 뒤로 젖혀져서가 아니라 그야말로 스탕달 신드롬을 겪지 않을 수 없다. 신약성경 ‘요한계시록’을 주제로 미켈란젤로가 예순 살에 시작한 이 그림은 한 노인의 괴팍함마저 느끼게 해준다.
미켈란젤로가 이 그림을 완성했을 때 예수와 성모 마리아를 비롯한 그림 속 모든 인물들은 완벽한 나체였다. 그림을 맡겼던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이건 신성 모독이지 않나” 하고 따지자 “최후의 심판 때는 모든 인간은 이럴 것이다”라고 그는 버텼다. 1564년 미켈란젤로 사후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미켈란젤로의 제자인 볼테라가 모든 인물들에게 옷을 입혔다.
시스티나 경당에서는 일체의 사진 촬영이 금지된다. 큰소리로 이야기할 수도 없다. 바닥에 앉아서 그림을 감상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오직 이곳에서는 두 눈에 위대한 예술품을 담고, 침묵하며 감상하면 된다. 여기에서는 자신의 종교를 떠나 그저 경건할 뿐이다. 구약성경의 첫 페이지와 신약성경의 마지막 페이지는 그렇게 한 ‘진짜 천재’에 의해 예술로 승화된 것이다.
[예수의 수제자이자 초대 교황인 베드로 사도의 순교지로 추정되는 곳에 세워진 산 피에트로 대성당은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이다. 가톨릭에서는 산 피에트로 대성당보다 더 큰 성당은 지을 수 없다.]
시스티나 경당에서 이어지는 실내 계단은 교황의 계단이다. 짧게나마 교황과 같은 길을 걸어본다. 그리고 그 계단의 끝에서 또 다른 인류 최대의 위대한 예술을 만난다.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인 ‘산 피에트로 대성당(Basilica di San Pietro)’이다. 브라만테에서 시작해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가 대부분을 완성했고, 천재 조각가 베르니니에 의해 더 아름답게 장식됐다.
종교개혁의 이유 등은 따지지 않기로 하자. 산 피에트로 대성당이 건립 과정에서 저지른 불온의 역사도 일단은 덮어 두자. 그러기에 이곳은 현재의 관점에서는 너무 찬란한 인류의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성당 내부에 들어서면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은 오른쪽 <피에타(Pieta)>다. 십자가에서 숨진 예수의 시신을 성모 마리아가 안고 있는 모습. 미켈란젤로가 스물세 살 때 피렌체에서 조각한 것이다. 이름도 모르는 청년이 이 아름다운 조각을 만들었다니 피렌체 시민들은 믿지 않았다. 화가 난 미켈란젤로는 성모 마리아의 상의 띠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이 또한 전례 없는 파격이다. 사람들은 당황했고, 이내 후회한 미켈란젤로는 이후 자신의 그 어떤 작품에도 이름을 새기지 않았다. 그리고 이 <피에타>는 바티칸으로 왔다.
[<피에타>는 미켈란젤로가 스물세 살에 조각한 가장 유명한 작품. 피에타는 ‘자비’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숨진 예수를 제자들이 십자가에서 내린 후 성모 마리아가 품에 안고 있는 모습을 그리거나 조각한 것 모두를 ‘피에타’라고 부른다. 대성당 안의 진품이 누군가가 던진 술병으로 손상된 적이 있다. 그래서 지금은 방탄유리로 보호하고 있다.]
<피에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해부학에까지 능했던 미켈란젤로의 천재성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예수의 손과 발의 못 자국, 발등의 혈관까지 섬세함의 극치다. 이 또한 르네상스 미술의 사실묘사주의다. 미켈란젤로가 만든 산 피에트로 대성당의 돔인 쿠폴라는 나중에 피렌체의 건축가 브루넬레스키에 의해 ‘피렌체 두오모’의 쿠폴라로 재탄생한다. 천재에게서 천재에게로 위대한 문화유산이 이어진 셈이다.
바티칸은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지만, 가장 큰 예술 창고다. 산 피에트로 대성당은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이면서 세계에서 가장 큰 예술품이다. 바티칸 박물관은 순서 매기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세계 3대 박물관’이라고 얘기하지만, 약탈이 없는 유일한 박물관이다.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와 함께 거니는 바티칸 산책은 위대한 예술의 압도이기도 하지만, 찬란히 빛나는 마음의 평안이기도 하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61호(2018년 10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