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g Story] “새로운 걸 추구해야 나를 알아가게 되죠"
입력 2018-08-31 10:56:44
수정 2018-08-31 10:56:44
공간 디렉터 루이스 박 대표
[한경 머니 = 이동찬 기자] 누군가가 ‘특색 있는 동네를 추천해달라’고 하면, 익선동과 을지로라고 단언한다. 낙후된 지역에서 어떤 ‘힙’함이나 ‘핫’함을 찾을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큰 오산이다. 옛 건물들을 주인장의 취향을 담아 개조한 가게들이 확고한 개성을 지닌 힙스터들을 모으고 있기 때문이다. 이 두 동네의 진가를 오래전부터 알아 온 한 사람이 있다. 바로 공간 디렉터, 루이스 박 대표다.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낙원상가를 통과해 지나면 한옥과 낡은 집들이 정겨운 동네가 반긴다. 하지만 외관과는 다르게 트렌디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발음조차 낯선 음식들을 파는 가게가 즐비하다. 현재 익선동의 얘기다. 흐름에 민감한 이들에게는 이미 시시한 동네겠지만, 그곳이 과거 가로수길이나 경리단길처럼 핫한 동네였고 지금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소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4년 전, 루이스 박 대표는 익선동에 자신만의 색깔을 녹여낸 카페 ‘식물’을 열어 옛 동네를 부활시켰다.
20대에 남부러울 것 없는 대기업에 다니다 돌연 스타일리스트로 전향, 이후 포토그래퍼로 활동했던 그는 구도심의 가치를 그 누구보다 빨리 캐치했다. 이는 그가 오랜 해외 생활을 통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안목 덕분이었다.
루이스 박 대표는 포토그래퍼로 활동하던 30대의 대부분을 해외에서 보냈고, 특히 런던에서 오래 머물렀다. 그가 거주했던 런던의 집은 옛날 학교였던 자리에 있는 복층 스튜디오로 아침에는 눈부신 햇살과 함께 운동장에 있는 큰 나무의 그림자가 방으로 쏟아지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이 자체만으로도 큰 행복을 느꼈던 박 대표는 공간의 중요성에 대해 새삼 깨달았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는 익선동에 이어 을지로로 눈을 돌렸다. 을지로는 현재 취향이 확고한 이들이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 찾아가는 핫한 동네의 최전선에 서 있다. 그는 이곳에 ‘잔’과 ‘루이스의 사물들’이라는 카페를 오픈, 또 한 번 힙스터들의 명소를 탄생시켰다. 박 대표의 취향과 감각이 오롯이 느껴지는 분신 같은 공간에서 그를 만났다.
익선동에 ‘식물’을 시작한 계기가 있나요.
“예전부터 익선동이라는 동네를 알고 있었어요. 이곳저곳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많은 곳을 다녀봤는데, 익선동은 포토그래퍼로 활동하던 시절 친한 디자이너의 작업실을 방문했다가 알게 됐죠. 도심 속에 오래되고 낡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게 참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물론 그 당시에는 카페나 레스토랑이 거의 없었죠. 하지만 어마어마한 수익을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저만의 공간이 갖고 싶었기 때문에 한옥을 개보수해서 ‘식물’을 차리게 됐습니다.”
익선동이 뜰 것이라고 예상했는지요.
“사실 이렇게 빨리 뜰 줄은 몰랐지만 익선동이 주목받을 거라고는 예상하고 있었어요. 제가 런던에 살던 당시 이스트 지역이 발전하는 걸 지켜봤거든요. 그곳은 예전 영국의 식민지였던 나라들, 인도나 파키스탄, 방글라데시의 이주민들이 모여 살던 할렘가였어요. 하지만 제가 2002년쯤 그곳에 처음 갔을 때 뜨기 시작했죠. 제가 머무는 동안에도 현재 진행형이었는데, 20년 가까이 핫한 상태가 지속되고 있어요. 우리나라는 뭐든 빨라요. 경리단길, 가로수길 다 마찬가지죠. 뜨고 있는 동네에 사람들이 급속히 몰리고, 또 그만큼 빠르게 지는 것 같아요.”
지역 발전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아요.
“연말마다 노트에 한 해 동안 무슨 말을 많이 했는지, 어떤 단어를 많이 썼는지를 정리하곤 해요.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제가 많이 썼던 단어는 ‘구도심’이더라고요. 옛날 도심이었지만, 지금은 한물 간 동네. 예전에 부흥했던 가로수길이나 경리단길 모두 모던하고 세련된 멋을 추구했잖아요. 사람들이 그런 것에 재미가 없어진 거죠. 다시 예스럽고, 정감이 넘치는 구도심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거예요.”
을지로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이건 제가 개인적으로 느끼는 건데, 을지로는 왕가위 감독의 영화에 나오는 홍콩 같은 느낌이 있어요. 이곳은 밤에 굉장히 어둡고 조용하거든요. 하지만 주변에는 고층 건물들이 있고, 야근으로 인해 환하게 불 켜진 사무실들이 많아요. 을지로는 도심 속 외진 성 같은 느낌이죠. 특히 제 카페 중 하나인 ‘잔’은 루프톱이 있는데 그곳에 앉아 도심 풍경을 바라보면 제가 마치 영화 주인공이 된 것 같은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어요. 도시인의 공허함을 달래주는 공간인 셈이죠.”
핫한 동네들은 젠트리피케이션을 걱정하던데요.
“을지로는 일단 넓어요. 젠트리피케이션(gentri -fication)은 좁은 곳에서 사람들이 이것저것 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발생하거든요. 또 거주 지역이랑 멀기 때문에 음악을 크게 틀거나 사람들이 시끄럽게 노는 것에 대한 민원이 없어요. 마지막으로 이미 자리매김이 너무 잘돼 있는 곳이에요. 무슨 말이냐 하면, 1층에는 오래전부터 터줏대감처럼 있었던 인쇄소, 전기, 아크릴 등의 상가들이 많아요. 1층에는 레스토랑이나 바가 절대 들어갈 수 없죠. 그래서 더 오래가고, 재미있는 동네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사람들이 왜 특색 있는 동네나 가게를 찾아가는 걸까요.
“이런 곳을 찾아오는 것 자체가 재미죠. 예를 들어 영화를 보더라도 영화를 보는 시간 자체가 재미있을 수 있지만 어떤 영화가 볼 만한지, 누구와 볼지, 보기 전에 뭘 먹고, 보고 나서는 뭘 할지 고민하는 거 자체가 흥미롭잖아요. 요즘 사람들에게는 뜨는 동네와 가게를 찾아가는 것이 놀이이자 문화예요.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핫한 곳을 검색하고, 구불구불한 골목길 사이에 신기루처럼 존재하는 감각적인 공간들을 찾아다니는 거죠. 그런 일련의 과정에서 사람들이 재미를 느낀다고 생각해요.”
스스로 힙스터라고 생각하나요.
“저는 힙스터라기보다는 스스로를 잘 알고자 하는 사람인 것 같아요. 저는 인생을 ‘나 자신’을 탐구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대기업을 다니다가 스타일리스트와 포토그래퍼를 거쳐 현재 공간 디렉터로, 카페 주인으로 살고 있잖아요.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화려한 삶을 살았냐고 물어보는데, 제 입장에선 전 그냥 저로서 살아간 거예요. 물론 아직도 스스로에 대해 많이 안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나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라고 생각할 때가 많아요. 평생 뭔가 새로운 걸 추구해야 저를 알아가게 되고 저 자신을 탐구하지 않을까요.”
힙스터 같다는 소리를 많이 들을 것 같은데.
“어쩌면 제가 손님과 타협하지 않기 때문에 누군가는 저를 힙스터라 생각할 것 같아요. 저는 공간에서 음악과 조명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어느 곳이든 음악을 크게 틀어 놓거든요. 만약 손님이 음악소리를 줄여달라고 하면, 제 매장에서는 음악이 중요하다고 양해를 구해요. 카페 내에도 콘센트를 설치하지 않고, 휴대전화 충전 서비스도 제공하지 않아요. 그냥 이 공간을 오롯이 느꼈으면 하는 마음에서요.”
그럼, 힙스터는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나요.
“자아가 확고한 사람이 힙스터라고 생각해요. 단, 겉멋만 든 사람과 힙스터를 구분하고 싶어요. 저는 인스타그램 해시태그를 통해 카페와 제 공간에 대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종종 찾아봐요. 소위 인플루언서라고 불리는, 핫한 장소를 찾아가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많이 받는 이들이 올린 게시물도 접하게 되죠. 그들의 말투나 인성이 드러나기 마련인데, 기본적으로 예의가 없거나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저 겉멋 든 사람에 불과하죠.”
지금의 대표님을 있게 한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경험. 지금의 저를 있도록 만든 건 지금까지 보고 듣고 느꼈던 조그마한 에피소드들의 집합이죠. 경험이 풍부한 자를 당해낼 사람은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전 여행을 많이 다니거나 영화를 자주 보는 편이에요. 영화처럼 저렴한 가격과 짧은 시간에 훌륭한 간접경험을 할 수 있는 매개체는 없거든요. 만약에 제가 깊이 영감을 받은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체코에서 사진 전시회를 그냥 지나쳤다면, 영국에서 그런 멋진 집에 살지 않았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거라 생각해요.”
‘카페 하나 차리고 싶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이들이 많죠. 그들에게 조언을 한다면요.
“‘경험하라, 용기 내라, 응용해라.’ 말씀드렸듯이 저는 이곳저곳 다니는 것을 좋아했고 그렇기 때문에 익선동이나 을지로와 같은 곳을 알게 됐어요. 시기를 잘 타 지금 부흥했지만, 원래부터 저에겐 익숙한 곳이었습니다. 보고 듣고, 많이 느껴야 앞으로의 일을 예견할 수 있는 것이죠. 그리고 아무리 경험한다고 한들, 머릿속에만 있는 건 무의미해요. 용기를 내 실천하고, 비주얼적인 측면으로 응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공간을 찾는 사람들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
“제가 만든 공간에 와서 그냥 멍하니 있다가 갔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콘센트도 구비하지 않고, 충전 서비스도 제공하지 않고 있죠. 카페에 있는 시간만큼은 그 어떤 테크놀로지와도 떨어져 있길 바라요. 우리는 항상 스마트폰, 모니터, 아니면 TV를 보잖아요. 여기까지 와서 노트북으로 영화를 볼 필요가 뭐가 있어요. 전 손님 중에 질문이 많은 분들을 좋아해요. 특히 지금 나오는 음악이 뭔지 물어보는 친구들이요. 그러면 그 순간 그 사람과 공감대가 형성되니까요.”
사진 김기남 기자·루이스 박 대표 제공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60호(2018년 09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