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g Story] 현실과 일탈 사이 ‘행복 균형’ 조건은

[한경 머니 = 한창수 고려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중앙자살예방센터장] 다시 뜨겁게 사랑하고, 꿈꾸고 일탈하고 싶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 과연 일탈과 현실에서 ‘행복’하려면 어떻게 균형감을 맞춰야 할까.


이른 아침 스마트폰 모닝콜 소리에 깨어나 정신없이 몸을 실은 지하철에서 몸을 부대끼면서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저녁을 먹고, TV 리모컨을 집자마자 납입해야 하는 주택 부금과 장인어른 칠순 선물, 그리고 고등학생 아들 학원 프로그램을 설명하는 아내를 바라보고는 있지만, 머릿속으로는 온갖 다른 생각에 시달린 적은 없었는가.

수년 전 흥행했던 한 영화 속에 잡지사를 다니는 마흔을 넘긴 소심한 노총각 주인공 월터가 있다. 월터는 여행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가족을 부양하며 일상에 찌들어 살지만 일에 대해서만큼은 항상 진지하다. 그에게는 아무도 모르게 일상을 탈출하는 시간이 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거나 인간관계에서 스트레스를 받을 때 그가 하는 행동은 엉뚱한 상상에 빠지는 것이었다. 단조롭고 지루한 일상과는 상관없는 곳에서 멋진 슈퍼 히어로처럼 날아다니고, 멋지게 말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멍 때리는 것이 그의 일탈이었다.

현실은 놀림을 받아도 아무 말도 못하고, 좋아하는 여성에게 말도 붙이지 못하지만, 상상 속에서는 그의 무의식이 원하는 모든 것을 해내곤 한다. 그에게 상상(멍 때리기)이란 행위의 의미는 평범한 직장인이 상처 받고 아쉬운 마음을 위안 받는 안식처였던 것이다.

중년기는 청소년기 이후 맞이하는 심각한 마음의 혼란기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20~30대 시절 미숙함을 극복하기 위해 애쓰던 치열함을 잊은 지 오래다. 수십 년째 하는 일은 이제 익숙해져서 지루함까지 느낀다. 그럼에도 내 일을 하고 돌아오는 보상은 만족할 만한 수준에 못 미친다. 아직 일도 더 해야 하는 건 알고 있지만, 그걸 결정하는 건 이제 내 능력 밖인 것 같다. 내 가족은 사실 내 마음 깊은 곳 허전함과 아쉬움까지 알고 있는 것 같진 않다.

여성의 경우는 40대 이후 50대로 가면서 여성호르몬과 함께 여성성(feminity)이 감소한다. 여성 갱년기의 생물학적·의학적 정의는 월경 주기가 한 달 이상으로 불규칙해지기 시작하는 시기부터 폐경이 될 때까지를 말한다. 에스트로겐과 세로토닌 등 신경호르몬이 감소함에 따라 삶의 활력이 떨어지고 갱년기 우울증이 발병한다. 직장을 다니면서 자녀를 키우고 정신없이 20여 년을 보내고 나니 배우자와도 서로 소원해진 것 같다. 소위 ‘빈둥지증후군’이 시작되는 시기와도 일치한다.

지금까지 바쁘게 살아온 인생이 허무하게 느껴지고, 내 인생 한때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것에 가슴 떨리는 아찔함과 스릴을 즐기고, 이유 없이 마음 설레던 때가 그리워진다. 그런 탓에 이 시기를 일부의 농담처럼 사추기(思秋期: 젊은이들의 사춘기처럼 중년기에 오는 위기를 빗댄 말)라 부르기도 한다. 외로움과 고독을 느끼면서 삶의 허무와도 같은 우울 증상에 빠지기도 하고 격정을 느끼던 내 삶의 한때를 그리워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아드레날린을 분출하던 젊은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문득문득 마음을 시리게 만드는 것이다.

이탈리아에서 살다가 미군으로 참전한 남편을 만나 미국의 시골마을로 시집와서 수십 년을 살아온 한 여인이 있다. 영화 <매디슨카운티의 다리> 속 여주인공은 두 자녀와 남편과 함께 평범하지만 헌신적인 삶을 살아왔다. 어느 날 지나던 사진작가를 우연히 만나면서 참고 살았던 감성과 잃었던 욕망에 대한 그리움에 목말라 한다.


중년기의 우울감과 허무감에 시달릴 때 누군가 억눌린 감성과 욕망을 자극하면 소위 일탈을 하는 기회가 열리는 것이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실제 불륜으로 이어지거나 가정의 해체로 이어지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수십 년 전 빠른 산업화를 이루던 시기 중년 여인의 허한 마음을 달래주던 소위 ‘제비족’도 이런 중년의 욕망을 파악하고 교묘히 이용해서 자신들의 이익을 챙긴 경우라고 하겠다. 국민건강영양조사에서 보고된 우울증 유병률 조사에서도 중년 여성이 남성에 비해 우울증의 유병률이 더 높은 것으로 보고된 통계를 참고할 수는 있겠지만, 불륜 등 관계의 일탈은 남녀의 차이가 없는 것 같다.

중년 시기에 매춘이나 왜곡된 성에 빠지거나 알코올 중독 혹은 도박, 마약 중독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결국 중년기의 일탈은 마음의 허기를 달래려는 심리적 환기의 목적으로 시작된 것이지만 자칫 잘못하면 비극적이고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일탈, 일상 탈출은 심리적으로 허한 중년의 시기에 활력을 주고 건강하게 인생 중반전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준다. 이성 관계나 불륜, 혹은 마약, 알코올 등의 일탈은 불행한 결론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에서 벗어나 젊은 시절에 포기했었거나 참고 지냈던 일을 하면서 젊은 시절의 목마름을 해소하는 효과가 있다. 노년기에 접어들면서 시작해 몸짱이 된 보디빌더나 40대에 시작한 브레이크댄서 같은 이들이 그럴 것이다.

영화 <쉘 위 댄스>는 삶의 흥미를 잃고 우울감에 빠진 중년의 직장 남성이 우연히 찾은 댄스교습소에서 춤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활력을 되찾는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스트레스 클리닉에서도 중년 이후에 스포츠댄스를 배우기 시작해서 운동도 하고, 삶의 활력을 되찾는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유산소운동을 하면서 ‘외로움’을 극복하는 것은 중년기 이후의 우울증을 극복하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인데, 가능하다면 부부가 함께 하는 것이 더욱 좋다.

한국 영화 <반칙왕>에서는 송강호가 직장 상사의 갑질에 지친 심약한 중년 직장인으로 나온다. 바람에 우연히 끌려들어간 뒷골목에서 레슬링 도장을 발견하고 그만 레슬링에 심취하게 된다. 직장 상사의 헤드록에 당하지 않으려는 목적에서 시작했지만, 어느덧 마스크만 쓰면 천하무적의 레슬링 강자가 된다는 이야기다. 실생활에서도 중년 이후 뒤늦게 운동을 시작하는 경우도 많다. 50대가 넘어서 머슬마니아 같은 대회에 출전해 근육을 자랑하는 경우도 있지만, 자전거 동호회나 할리데이비슨 동호회 활동에 빠져드는 경우도 있다. 일상에 찌들던 바쁜 시절에는 시간이 없어서 하지 못하던 규칙적으로 운동하기는 가장 모범적이고 도움이 되는 일탈 행위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건강한 일탈을 하기 위한 몇 가지 조건을 생각해보는 것이 좋겠다. 첫째는 긍정적인, 좋은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활동을 하라는 것이다. 외롭다고 불륜이나 매춘, 게임 중독에 빠지는 것은 아주 잠시 정신적 도피의 효과는 있겠지만, 장기적으로 입을 심리적·경제적·가족적 피해가 너무 크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런 일탈에서 얻는 에너지는 건강하지 못한 어둠의 에너지다. 건강한 일상 탈출의 목적은 그 이후에 기운을 회복해서 내가 할 일을 다시 한 번 힘차게 해보자는 것인데, 긍정적이지 못한 일탈을 하게 되면 더 이상 당신의 일상으로는 돌아올 수가 없다.

건강한 일탈의 둘째 조건은 삶의 기본적인 일상을 망가뜨리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가정이나 일까지 때려치우고 해야 할 정도의 일탈이라면 그것은 단순한 일상 탈출의 범위를 넘어선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가족과 주변의 타인에게 피해를 주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경우라면 사회적 비난과 도덕적 해이의 책임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쉽게 말해서 본인이 노는 건 좋은데, 본인의 사회적 책임을 방기하거나 가족에게 피해를 주지는 말라는 것이다.

셋째 조건은 가급적 마음과 몸의 건강에 도움이 되는 행위가 좋다는 점이다. 명상 배우기나 운동 동호회, 밴드 동아리 등은 마음을 안정할 수 있게 하는 긍정적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신체적 건강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이 장점이라고 하겠다.

건강한 일탈의 넷째 조건은 가급적 부부가 함께 하거나 서로 인정해주는 활동을 하는 것이 좋겠다. 부부클리닉을 찾는 사람들 중에는 본인은 좋다고 색소폰 동호회에 나가고 있지만, 거의 가정생활을 전폐하다시피 하고 동호회에 빠져 있는 남편 때문에 아내들이 홧병이나 의부증에 빠진 경우를 심심치 않게 만난다. 반드시 부부가 같이 해야만 할 필요는 없겠지만, 가정을 깨려는 마음이 없다면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고 마음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은 기본이다.

정신건강을 다루는 전문의 입장에서는 명상이나 음악처럼 마음을 안정시키고 다스릴 수 있는 일상 탈출 방법을 하나쯤 배워보기를 권한다. 중년기 이후에는 우울 증상과 더불어 분노와 불안 증상을 다스리는 것이 힘들어질 때가 점점 더 많아진다. 스트레스 증상이 심한 경우에는 항우울제나 상담이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결국 본인이 스스로 마음을 다스려야만 완전한 회복을 기대할 수 있다. 우리나라 속담 ‘곳간에서 인심난다’처럼 내 마음이 편안하고 건강한 것이 행복한 삶의 기본이라는 점을 잊지 말자.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바쁜 시절엔 하지 못하던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것도 좋다. 자전거나 바이크 동호회 혹은 본격적인 등산을 하는 것도 좋은 일상 탈출의 방법으로 권할 만하다. 스포츠 관람을 좋아하는 경우라면 야구 경기를 직접 관람하는 직관마니아로서의 일탈을 시작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필자는 문득 트럼펫이 배우고 싶어졌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59호(2018년 08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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