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 Artist 김윤섭 소장의 바로 이 작가 - 신미경
세면대 한쪽에 멋진 고대 조각상이 놓여 있다. “이거 정말 만져도 되는 건가?”,
“아니겠지. 전시해 놓은 거잖아.” 두 명의 젊은 직장인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사이, 한 중년의 남성은 물 묻은 손으로 조각상의 얼굴을 사정없이 쓰다듬고 있다. 놀라 당황한 두 사람 옆으로 또 다른 청년은 이번엔 코와 볼을 집중적으로 비벼댄 후 자연스럽게 손을 씻고 나간다. 평범한 어느 날의 점심시간, 서울 종로구 대학로의 아르코미술관 화장실에서 벌어진 광경이다.
신미경 작가의 <화장실 프로젝트>는 조각으로 재현된 고대 로마의 흉상이나 불상 등을 화장실 세면대에 올려놓고 실제로 사용하게 하는 작업이다. 전시장의 관람객도 아니고, 일반인 입장에서 멋진 조각 작품을 화장실에서 만났다는 점이 흥미롭고, 그 조각을 만든 재료가 모두 비누라는 점에 또 한 번 놀랄 수밖에 없다. 신 작가의 작품이 소개되는 전시가 있으면, 꼭 미술관의 화장실부터 들러본다는 마니아가 생겼을 정도다. 이렇듯 불특정다수의 수많은 사람의 손길을 받은 비누조각은, 같은 모델의 작품이라도 전시를 마친 후 100개면 100개가 모두 제각각의 모습이다.
오랜 세월 자연 속에 방치돼 풍화된 듯 마모돼 닳고 단 신 작가의 비누조각 모습들은 영락없이 금방 발굴된 유물과도 같다. 수많은 관람객의 손길이 비와 바람이며, 풍화된 시간인 셈이다. 오늘 완성됐지만 마치 천년은 된 듯, 시간의 경계를 무색하게 만드는 초월적 미감은 신 작가 작품의 요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그는 조각가를 넘어 세월의 흐름을 자유자재로 연출하는 ‘시간의 연금술사’로 비유할 만하다. “사라지는 것이나 완벽하게 존재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느 부분의 ‘접점이 생기는 간극’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한 그의 말이 더욱 인상 깊다.
신 작가의 작품은 일단 시선을 사로잡는 신묘한 아름다움이 특징이다. 거기에 훌륭한 장식성과 견고한 완성도를 겸비해 작품의 깊이를 더해 독보적인 경쟁력을 담보한다. 테크닉 또한 워낙 완벽해서 얼핏 보면 전문가마저 구분하지 못할 지경이다. 재밌는 에피소드가 있다. 2007년 영국 런던의 대영박물관 한국관에서 ‘달항아리’에 관한 특별전시 때 일이다. 1999년 대영박물관이 구입한 한국의 ‘달항아리’를 부득이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됐다. 그 기간 비워진 유리 진열장엔 ‘현대미술 프로젝트’ 일환으로 신 작가의 ‘비누 달항아리’가 대신 전시됐다. 하지만 그 어떤 관람객도 그것이 백자가 아닌 비누로 만든 ‘페이크 달항아리’라는 사실을 알아채진 못했을 정도였다.
이런 탁월한 비누조각 재능은 이미 영국 유학 시절인 2006년 한 대학에서 벌인 ‘6개월간의 퍼포먼스’로 증명됐었다. 학교 건물에 있던 아프로디테 조각품을 복원한다는 소식에 신 작가의 머리가 번뜩였다. 자신도 그 조각 옆에서 비누로 함께 조각해볼 생각이었다. 본의 아니게 아프로디테의 복원 빅 매치 퍼포먼스가 성사된 셈이다. 복제 과정은 6개월간 지속됐다. 결과는 놀라웠다. 그의 깔끔한 승! 우연한 이벤트에 신 작가는 동양에서 온 그저 그런 여학생이 아니라, 학교는 물론 런던 미술계의 유명인이 됐다. 그리스 신화에서 ‘미와 사랑의 여신’으로 통하는 비너스이자 아프로디테는 그의 비누 향기 속에서 그렇게 다시 태어났다.
신 작가는 미술을 시작한 학창 시절부터 그 어느 것이든 재현해내는 것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특히 형태의 조형성은 물론 세밀한 표면 처리의 정교함은 아름다운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영국 유학 시기를 거치며 자신만의 독창성과 경쟁력을 위해 체득한 비누조각은 그녀의 타고난 기예를 한 단계 더 성숙시켜줬다. 외형의 형상 재현에 내면의 감성 재현을 더했다. 그의 감성은 세월의 경계를 단숨에 걷어낸다. 다양한 문화적 유물들을 동서양의 조형어법으로 새롭게 번역해 구현한다. 마치 화가의 붓질과 물을 받아들이는 한지가 함께 완성해내는 동양의 수묵화처럼, 신 작가의 손길을 떠난 비누조각 역시 바람과 비를 만나야 비로소 완성되는 현재 진행형 유물이다.
누구나 죽음의 문턱을 경험해보면 인간으로서의 한계와 연약함을 알게 된다. ‘내가 누구이고 어떤 존재인지’, 삶에 대한 소중함과 겸손을 되새긴다. 하지만 평범한 일상에서 그런 깨우침을 얻긴 쉽지 않다. 그래서일까. 인생의 덧없음이나 죽음에 대한 은유적인 메시지를 담은 그림도 등장했다. 17세기 유럽을 중심으로 유행한 정물화인 ‘바니타스(Vanitas)’ 그림들이다. 실제로 라틴어인 바니타스는 ‘헛됨’을 뜻한다. 구약성서의 전도서 12장 8절에 나오는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Vanity of vanities, saith the preacher, all is vanity)’의 글귀 첫 단어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흥미롭게도 이 바니타스 정물화의 소재로 비누(거품)도 자주 등장한다. 아마도 ‘사라짐’의 속성을 상징하는데 ‘비누(거품)’보다 안성맞춤인 게 있을까 싶다. 신 작가의 비누조각에서도 ‘세월 무상’의 속뜻이 충분히 감지된다. 오랜 세월의 흔적이 스민 유물을 단시간에 비누로 재현해내는 과정을 눈앞에서 목격하게 된다. 마치 시간여행을 하듯, 그의 조각은 수천 년의 세월을 우습게 넘나든다. 시간의 흐름이란 절대적인 힘에 굴복해 왔던 지난 내 존재감이 참으로 무색할 따름이다. 그래서 더욱 ‘지금’을 더 무겁고 남다른 의미로 되새기게 된다. 우리가 만난 신 작가의 비누조각은 ‘바니타스 조각의 새로운 전형’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우리가 폐허를 보러 갔을 때, 남아 있는 것을 보면서 ‘사라지는 것’에 대해 상상하며 시간여행을 하게 됩니다. 전 그 시간이 ‘고체화돼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낯선 표현이겠지만 ‘가시화된 시간성’을 표현해보고 싶었어요. 액체처럼 흐르는 시간을 고체화시킬 수 있다면, 시간의 한 지점을 만날 수 있겠죠. 작품 중에 <폐허풍경>은 어느 순간 초라하게 무너져 버린 시간을 암시하면서, 동시에 ‘유물이 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유물은 처음부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문명의 경로에 의해서 유물이 되기 때문에, 그 과정을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고 싶었어요.”
현재 대학로의 아르코미술관에선 ‘사라지고도 존재하는’이라는 제목으로 대규모 신미경 비누조각전(7월 5일~9월 9일)이 열리고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2018 아르코미술관 중진작가 시리즈’의 일환으로 초청한 국내 공공미술관 첫 개인전이다. 특히 2013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에 선정된 이후 5년 만에 여는 국내 미발표작 신규 프로젝트 전시여서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 또한 그동안 국내 전시에서 볼 수 있었던 화려한 중국풍 도자기나 인체 조각상, 고대 문명의 발굴 현장을 보여주는 것 같은 ‘폐허풍경’ 대형 설치 등을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다. 소멸하는 것과 남은 것의 경계를 만나는 특별한 경험이 이색적이다. 신 작가의 비누조각 작품 가격은 크기나 작품에 따라 큰 차이가 있는데, 웬만한 중형 도자기 크기 1점에 대략 2000만~4000만 원 선이다.
김윤섭 소장은…
미술평론가로서 명지대 대학원 미술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월간 미술세계 편집팀장, 월간 아트프라이스 편집이사를 역임했다. 현재는 국립현대미술관 및 서울시립미술관 작품가격 평가위원, (사)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 전문위원, 대한적십자사 문화나눔프로젝트 아트디렉터, 교보문고 교보아트스페이스 기획위원, 숙명여대 겸임교수,
계간 조각 편집장,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심의추천위원,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 등으로 활동 중이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59호(2018년 08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