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바로티, 그리고 소렌토를 품은 아말피

천하의 호색한으로 유명했던 파바로티가 35년간 부부로 살았던 아내 베로니와 갔던 곳,
아말피(Amalfi). 사실 파바로티를 따라 천천히 흘러간 곳은 소렌토를 지나 아말피였다.


[한경 머니 기고=이석원 여행전문기자]아말피는 북쪽으로 산을 등지고, 남쪽으로는 살레르노만에 형성된 어촌이다. 가파른 산의 경사면을 타고 지어진 집들이 도시의 상징이다. 과거 동방 무역의 거점 역할을 하며 융성했던 아말피 항구. 지금은 할리우드 스타들의 요트와 크고 작은 배들이 정박한 낭만적인 어촌의 모습이다. 나폴리 가리발디(Garibaldi)역을 출발해 소렌토로 가는 길은 험하다. 금세 도깨비라도 튀어나올 듯 음산한 역 지하 2층. 한여름 숨까지 막히는 푹푹 찌는 더위. 수많은 여행자 사이를 불량하게 배회하는 사람들. 시간이 돼도 들어오지 않는 기차를 기다리며 이미 한껏 짜증이 난 여행자들. 거기에 무겁고 큰 여행용 가방이라도 질질 끌고 있다면 ‘이탈리아 남부의 낭만은 개나 줘버려!’라고 원망이 절로 나온다.

[[무더운 여름 여행자를 충분히 짜증나게 하는 사철의 숨 막힘도 소렌토에 들어서 펼쳐지는 풍광 때문에 잊을 수 있다.]

마침내 플랫폼으로 힘겹게 밀려들어오는 열차. 그런데 ‘사철(Circumvesuviana)’이라고 부르는 이 낡은 기차는 제대로 굴러가기는 하는 걸까. 여행자들에게 밀려 의지와는 상관없이 기차 안에 구겨져 들어가면서 그 궁금증은 자연스레 사라진다. 그리고 이 초라하고 낡은 기차는 폐결핵 말기 환자의 밭은 기침소리를 내며 나폴리를 출발한다. 기차가 닿는 곳은 이탈리아 남부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낭만과 사랑이 가득한 반도 소렌토(Sorento)다. 불과 50여 km 떨어진 거리를 1시간 30분씩이나 숨 턱턱 막히며 달려주는 그 여유로움 때문에 창밖 베수비오화산의 장관도, 폼페이의 찬란함도 눈에 들어오지 않지만, 기차가 소렌토 부근에 접어들 무렵부터 펼쳐지는 수려함은 비경이다. 바다로 내달리는 계곡과 산과 거기에 비스듬히 기댄 마을들은 지옥 같은 사철의 고통을 씻어주는 기적을 일으킨다.

[소렌토반도는 이탈리아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곳이다. 그래서 시내 임페리얼 트라몬타노 호텔에는 괴테를 비롯해 바이런, 키츠, 셸리, 롱펠로 등의 시인들이 머물러 아름다운 작품을 쓰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소렌토역. 역 앞에 흉상 하나가 서 있다. 지암 바티스타 데 쿠르티스. 이름이 귀에 익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 사람이 ‘나폴레타나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돌아오라 소렌토로(Torna A Surriento)’의 작사가다. 동생 에르네스토 데 쿠르티스가 작곡했다. 1982년 노래가 세상에 나온 지 80주년 되는 해 소렌토시가 작사가인 지암 바티스타 데 쿠르티스에게 헌정한 흉상이다. 그런데 왜 작곡자인 동생은 없지.
Vide’o mare quant’e bello
Spira tantu sentimento.
(아름다운 저 바다와 그리운 빛나는 햇빛)
Comme tu a chi tiene mente
Ca scetato’o faie sunna.
(내 맘 속에서 잠시라도 떠날 때가 없다.)
Guarda, gua, chi stu ciar di no,
Sien te, sie, sti sciu re aran ce.
(향기로운 꽃 만발한 아름다운 동산에서)
Nu pro-fu-mo accussi fi-no
Dinto’o co-re se ne va.
(내게 준 그 귀한 언약 어찌 잊을까)
E tu di-ce “I’parto, ad-di-o!”
T’allun-ta-ne da stu co-re.
(멀리 떠나간 그대, 나는 홀로 사모하여)
que sta ter-ra de l’am-mo-re
Tiene’o co-re’e nun tur-na?
(잊지 못할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나?)
Ma nun me las-sa
Nun dar me stu tur-mien-to!
(돌아오라, 이곳을 잊지 말고)
Tor-na a Sur-rien-to,
Famme cam-pa!
(돌아오라 소렌토로, 돌아오라)

소렌토 어느 해변의 절벽 위, 1년 365일 늘 환한 꽃과 태양을 두고 돌아오지 않는 이는 누구일까. 파란 하늘과 바다, 그리고 진한 녹색의 나무들이 도시 여기저기서 흩날리는 새콤한 레몬 향과 어우러진 지중해의 꽃들을 품고 빛나는 곳. 쿠르티스 형제의 애달픈 기다림이 아니어도 소렌토로 쉬 돌아오지 못함은 슬픔일 것이다.

소렌토를 품은 아말피
‘돌아오라 소렌토로’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하나 더 있다. 100kg이 넘는 엄청난 거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폭발적인 성량의 소유자. 앞으로 100년 내에 또 나올지 장담할 수 없다는 그 신화적인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다. 파바로티 하면 떠오르는 아리아가 있다. 푸치니의 <투란도트(Turandot)> 중 ‘공주는 잠 못 이루고(Nessun dorma)’와 베르디의 <리골레토(Rigoletto)> 중 ‘여자의 마음(La donnae mobile)’, 그리고 도니제티의 <사랑의 묘약(L’Elisir d’Amore)> 중 ‘남몰래 흘리는 눈물(Una furtiva lagrima)’ 등이다.

[아말피는 북쪽으로는 산을 등지고, 남쪽으로 살레르노만에 형성된 어촌이다. 가파른 산의 경사면을 타고 지어진 집들이 도시의 상징이다.]

그런데 오페라 아리아가 아닌 나폴레티나, 즉 나폴리 민요 중 ‘오 솔레 미오(O sole mio)’와 ‘푸니쿨리 푸니쿨라(Funi culi funi cula)’와 더불어 파바로티를 대표하는 것이 ‘돌아오라 소렌토로’다. 파바로티의 청아하고 해맑은, 마치 쾌청한 소렌토의 하늘과 짙푸른 지중해가 목소리에 담긴 듯 그런 음성이 아름다운 그 노래. 이탈리아 북부 모데나(Modena)에서 태어난 파바로티는 어린 시절 소렌토에 잠시 들른 적이 있다. 평생의 스승으로 여긴 에토레 캄포갈리아니가 10대인 파바로티를 데리고 간 기차 여행. 그들은 나폴리를 거쳐 소렌토에 왔다. 그리고 아마 이 반도의 한쪽 어디에선가 캄포갈리아니는 어린 파바로티에게 ‘돌아오라 소렌토로’를 들려줬을 것이다.

파바로티는 오래전 한 이탈리아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그 어린 시절 잠시 들렀던 소렌토는 평생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그가 한 마디 더 덧붙인 것. 그는 “그보다 한참 후에 베로니와 머물렀던 아말피는 소렌토를 품고도 남았다”고 했다. 파바로티가 “소렌토를 품고도 남는다”고 말한 아말피. 소렌토 중심가를 벗어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아찔한 절벽 도로를 따라 구불구불 이어진 길은 심장이 멎을 만큼 짜릿하다. 소렌토에서 포지타노를 거쳐 아말피까지 가는 시타(Sita) 버스를 타면 그 짜릿함이 막 딴 콜라를 쉬지 않고 마셨을 때의 그 느낌이다. 버스 오른쪽 창가 자리에라도 앉으면 분출하는 아드레날린이 여실히 느껴진다.

단 두 대의 자동차만이 교행할 수 있는 좁은 도로. 오른쪽 어깨 너머로는 수십 미터 낭떠러지 끝 깊이를 알 수 없는 시퍼런 지중해다. 180도로 굽은 길에서도 결코 속도를 줄이지 않는 버스 기사를 원망할 틈도 없다. 어느새 시선은 아찔한 절벽 아래 지중해에서 산 속 점점이 박혀 있는, 산에 핀 꽃처럼 빛나는 오래된 건물들에 고정된다. 마침 버스 안에는 바흐의 파이프 오르간 ‘토카타’가 울린다. 버스 기사의 의도였을까. 아니면 그저 우연이었을까. 멜리나 메르쿠리와 안소니 퍼킨스의 1962년 영화 <페드라>에서 절벽으로 차를 내모는 안소니 퍼킨스가 떠오르는 건 이 아찔한 아름다움에 취한 나 혼자의 착시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말피로 가는 그 절벽 도로는 화인처럼 머릿속에 새겨졌다.

[어두워진 아말피의 거리에서 가장 빛나는 것은 각종 기념품 가게와 식당과 술집이다. 특히 도자기와 종이 산업이 발달한 아말피의 가게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그림 같다.]

파바로티의 ‘돌아오라 소렌토로’
아말피에 다다른 풍경은 지금까지 눈에 담아온 것이 그저 멋진 식사의 애피타이저였다며 활짝 품을 연다. 위태롭게 산기슭, 그리고 절벽에 지어진 수많은 집들. 모든 집들의 창이 지중해만을 향해 있는 이 독특한 풍광은 비현실적이다. 바위를 뚫어 만든 터널을 지나 아말피 해안가가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이 환상 여행은 끝이 아니라 시작임을 느낄 수 있다. 인구 5000여 명에 불과한 작은 어촌 마을 아말피는, 한때 이탈리아 남쪽을 지배하던 강력한 공국이었다. 9세기 무렵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동방 무역의 거점이 된 아말피는 제노바, 피사와 더불어 이탈리아 반도 해상권을 장악한 한 축이었다. 12세기 시칠리아와 피사에 의해 잇따라 정복당하고, 십자군전쟁으로 동방 무역의 거점이 베네치아로 옮겨지면서 쇠퇴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아말피는 이탈리아 반도의 숨겨진 보석이 됐다.

[아말피의 수호성인은 예수의 제자 중 베드로와 함께 어부였던 안드레아다. 그래서 두오모 디 아말피는 다른 이름으로 성 안드레아 대성당이다. 대성당 앞 두오모 광장에 있는 어부의 샘은 연인들의 공간으로 유명하다.]

처음 파바로티가 아말피에 온 것은 30세의 나이에 밀라노 라 스칼라에서 화려하게 데뷔하고, 순식간에 메트로폴리탄과 코벤트가든의 무대에 서며 세계적인 테너가 되고 난 얼마 후였던 듯하다. 아말피 절벽의 한 작은 호텔에서 일주일간 머물렀던 파바로티는 밤이 되면 시내 두오모 디 아말피(Duomo di Amalfi, 아말피 대성당)의 계단에 앉아 크지 않은 소리로 노래를 하곤 했다. 이미 주류 오페라에서는 떠오르는 신성이었지만, 미디어가 발달하지 않았을 때 아말피의 이 조그만 어촌까지 파바로티의 얼굴이 알려졌을리는 만무하다. 성당 앞 계단에서 홀로 이탈리아 민요와 성가를 부르던 파바로티에게 다가온 한 노인이 자신의 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를 해보겠냐고 물었고, 파바로티는 흔쾌히 ‘돌아오라 소렌토로’를 불렀다.

[아말피에서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가 레몬이다. 그래서 레몬으로 빚은 술은 아말피의 가장 대표적인 기념품이기도 하다.]

주변에서 노래를 듣던 이들은 감탄을 했고, 노인은 파바로티에게 “노래에 소질이 있다. 로마에 가서 가수가 돼보라”는 충고를 했다고 한다. 그 말에 파바로티는 “나는 오페라 가수가 될 거다. 나는 라 스칼라에서도 공연할 거고, 미국 메트로폴리탄에서도 노래를 할 거다. 나는 그때 오늘 이 무대를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파바로티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은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말피의 노인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이야기다. 그때 파바로티에게 기타 반주를 했다는 노인은 지금 사망하고 없지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이야기는 지금도 아말피 식당이나 종이 가게, 레몬술 가게 등을 지키는 노인들에게서 들을 수 있다.

하긴 이야기의 진실 여부가 뭐 그리 중요할까. 파바로티가 ‘돌아오라 소렌토로’를 불렀다는 두오모 디 아말피의 계단 앞 광장에는 지금도 수많은 예술가들이 거리 공연을 한다. 바이올린이나 트럼펫을 부는 이들도 있고, 첼로를 가지고 나와 조용히 연주하는 초로의 신사도 있다. 때로는 얼굴 가득 하얀 피에로 분장을 한 팬터마이머가 아이들과 놀아주기도 한다. 혹 그들 중에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의 무대를 꿈꾸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고, 빈 국립오페라 극장의 ‘빈 필하모닉 신년 음악회’를 꿈꾸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꿈이 무엇이건 거대한 꿈의 실현 가능성 따위는 큰 의미가 없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다와 절벽을 지닌 아말피의 오늘 이 여름밤은 두오모 디 아말피 계단 앞 모두에게 루치아노 파바로티 정도 가슴에 품을 수 있게 해줄 것이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58호(2018년 07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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