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tif in Art] 수련(water lily), 단 한 번뿐인 이 순간
입력 2018-07-02 14:42:45
수정 2018-07-02 14:42:45
[한경 머니 = 박은영 미술사가·문학박사] 프랑스의 과학철학자이자 문학비평가 가스통 바슐라르는 “수련은 세계의 한순간이다. 그것은 두 눈을 지닌 아침이다. 그것은 또한 여름 새벽의 놀라운 꽃이다”라고 말했다.
인상주의 화가 클로드 모네(Claude Monet)는 43세가 된 1883년, 그동안 생각해 온 일을 실행에 옮겼다. 식솔을 데리고 파리 근교 지베르니 마을로 이사한 것이다. 전원생활을 동경했던 모네는 이 작은 시골 동네에서 집과 헛간을 빌려 꽃을 가꾸며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점점 작품이 잘 팔려 생활이 안정되자 아예 주택과 토지를 사들이고 마음껏 정원을 꾸미기 시작했다. 하인과 정원사를 고용해 꽃과 나무를 심고 강물을 끌어들여 연못도 만들었다. 수풀 사이로 물길을 가로질러 다리도 놓고 연못 속에는 수련을 심었다.
이렇게 조성된 아름다운 ‘물의 정원’은 봄부터 가을까지 꽃향기가 그윽했다. 이곳에서 모네는 죽을 때까지 날마다 그림에 매진했다. 말년의 약 30년 동안 그가 특히 심혈을 기울여 그린 소재는 물 위에 떠 있는 ‘수련’이었다. 수련이라는 모티프를 가지고 무려 250점가량 되는 유화 작품을 제작한 것이다. 모네는 왜 그토록 수련에 집착해 그 많은 그림을 반복해서 그렸을까.
날마다 만나는 새로운 세상
수련은 여름철 아침에 꽃망울을 열어 낮 동안 피어 있다가 밤이 되면 오므라든다. 그래서 ‘수련’ 즉 ‘잠자는 연꽃’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수련과 연꽃은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 종류가 전혀 다르다. 연꽃은 물 위로 줄기가 높이 뻗어 올라와 잎과 꽃이 크게 달리는 반면 수련은 물 표면에 아슬아슬 잠길 듯 동그란 잎이 떠 있고 수면 바로 위에서 꽃이 피어난다. 물속을 겨우 벗어나 해를 보고 있으나 물에 밀착해 그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누구보다 햇빛과 물을 즐겨 그린 모네에게 수련은 그야말로 가장 잘 어울리는 식물이 아닌가. 물 밑 어두운 곳에서 솟아나 매일 새로 피는 수련은 다시 태어나는 삶을 가리킨다. 물과 태양의 기운을 모두 지니고 있으며 한편으로 심연의 어둠까지 꿰고 있는 신비한 식물이다.
모네는 자신의 연못을 갖기 전에도 수련을 여러 번 그린 적이 있다. 1889년 드디어 연못이 완성되자 모네는 17점의 수련을 그렸다. 그중 <수련 연못>은 일본식 아치형 다리가 가로놓인 연못과 주변 풍경을 함께 표현한 것이다. 숲으로 둘러싸인 연못에는 잔잔한 수면에 동글동글한 수련의 잎들이 떠 있고 분홍빛 꽃들이 옹기종기 피어 있다. 햇빛이 이들을 밝게 비치며 거울 같은 물의 표면에 식물의 그림자를 짙게 드리운다. 여름날 모네의 정원은 온통 초록빛으로 물들어 눈부신 싱그러움으로 충만하다.
멀리서 본 풍경만이 아니라 모네는 물가에 좀 더 다가가 가까이에서 본 수련의 모습을 자주 묘사했다. 아침마다 연못에 나가 하룻밤 새 달라진 물과 수련을 관찰했다. 물은 언제나 신선하고 수련은 햇빛과 함께 새롭게 피어났다. 바람이 불면 출렁이는 수면에서 수련도 같이 흔들렸다. 물가에 드리운 버드나무 가지도 휘청거리며 물에 비친 그림자를 흔들어댔다. 이런 장면은 연못의 일상이지만 결코 똑같은 모습이 반복되지 않았다. 식물이 자라고 시들며 날씨와 시간에 따라 연못도 끊임없이 색과 형태가 달라졌다. 그래서 모네는 매일 수련을 그려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물과 수련의 미세한 변화를 보며 단 한 번밖에 오지 않는 짧은 시간을 화폭에 기록했다. 그렇게 모네는 자신의 정원에서 날마다 다른 세상과 만나고 있었다.
무한을 위한 순간의 표현
나이가 들면서 모네는 시력이 점점 나빠져 고통을 받았다. 눈에 보이는 세계의 변화를 그 즉시 포착하려 했던 모네에게 시력저하는 치명적인 장애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모네는 백내장 수술을 받아가며 시력이 남아 있는 한 그림을 계속 그려 나갔다. 80대에 접어든 1920년대에 그린 <수련>들을 보면 꽃과 잎의 형태가 모호해지고 필체도 더욱 거칠어졌다. 대상이 잘 보이지 않으면 보이는 만큼만, 눈과 손이 허락하는 대로 그림을 그렸다. 머리로 익히 알고 있는 수련이 아니라 오직 그날 자신이 직접 보고 경험한 수련을 표현했다.
이 시기에 모네는 전보다 오히려 더 큰 작품들을 제작했다. 그는 <수련> 대작들을 영구 전시하는 조건으로 프랑스 정부에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 뜻을 따라 파리의 오랑주리미술관에 <수련>만을 위한 특별 전시실이 마련됐다. 안타깝게도 모네가 사망한 이듬해에야 문을 열었지만 지금도 그곳 지하 전시장에는 넓은 타원형 벽면에 커다란 <수련> 연작이 여러 점 걸려 있다. 작품들의 길이는 달라도 높이가 모두 2m가량으로 동일해서 일련의 연속된 풍경으로 감상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긴 그림은 12m가 넘는 <수련: 구름>이라는 작품이다. 수련이 떠 있는 푸른 연못에 흰 구름이 비치는 장면을 그린 것인데, 제목을 모르면 무엇을 그렸는지 좀처럼 알아보기 어렵다. 그저 짙고 옅은 파란 색면에 몽실몽실한 하얀 덩어리, 조그만 초록색 타원형들과 아주 작은 불그레한 색점들이 흩어져 있을 뿐이다. 그 모든 것이 짧고 거친 붓놀림으로 한데 뒤엉켜 거대한 파노라마를 이룬다. 거의 추상미술에 가까운 이 그림은 화면을 넘어 끝없이 확장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시력을 잃어가는 모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세상의 희미한 외양뿐이었다. 그러나 흐린 눈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어쩌면 모네는 시각의 차원을 넘어 더 큰 것을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모든 형상의 구분이 사라지고 하나로 통합되는 무한의 세계, 일종의 우주와도 같은 것이다. 흔들리는 물에 비친 세상, 물 위에서 짧게 피는 수련을 모네는 그리고 또 그렸다. 모네의 수많은 수련 그림들은 변화무쌍한 순간들을 담고 있다. 매 순간은 결코 한 번에 표현할 수 없는 길고 긴 시간을 조각낸 단편들이다. 모네가 같은 소재를 반복해서 그린 것은 사실 무한의 세계를 표현하기 위한 나름의 방법이 아니었을까. 무수한 순간들로 나뉜 <수련>들은 그 덧없음으로써 영원을 갈망한 한 위대한 예술가의 기념비적 걸작이다.
인상주의 화가 클로드 모네(Claude Monet)는 43세가 된 1883년, 그동안 생각해 온 일을 실행에 옮겼다. 식솔을 데리고 파리 근교 지베르니 마을로 이사한 것이다. 전원생활을 동경했던 모네는 이 작은 시골 동네에서 집과 헛간을 빌려 꽃을 가꾸며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점점 작품이 잘 팔려 생활이 안정되자 아예 주택과 토지를 사들이고 마음껏 정원을 꾸미기 시작했다. 하인과 정원사를 고용해 꽃과 나무를 심고 강물을 끌어들여 연못도 만들었다. 수풀 사이로 물길을 가로질러 다리도 놓고 연못 속에는 수련을 심었다.
이렇게 조성된 아름다운 ‘물의 정원’은 봄부터 가을까지 꽃향기가 그윽했다. 이곳에서 모네는 죽을 때까지 날마다 그림에 매진했다. 말년의 약 30년 동안 그가 특히 심혈을 기울여 그린 소재는 물 위에 떠 있는 ‘수련’이었다. 수련이라는 모티프를 가지고 무려 250점가량 되는 유화 작품을 제작한 것이다. 모네는 왜 그토록 수련에 집착해 그 많은 그림을 반복해서 그렸을까.
날마다 만나는 새로운 세상
수련은 여름철 아침에 꽃망울을 열어 낮 동안 피어 있다가 밤이 되면 오므라든다. 그래서 ‘수련’ 즉 ‘잠자는 연꽃’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수련과 연꽃은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 종류가 전혀 다르다. 연꽃은 물 위로 줄기가 높이 뻗어 올라와 잎과 꽃이 크게 달리는 반면 수련은 물 표면에 아슬아슬 잠길 듯 동그란 잎이 떠 있고 수면 바로 위에서 꽃이 피어난다. 물속을 겨우 벗어나 해를 보고 있으나 물에 밀착해 그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누구보다 햇빛과 물을 즐겨 그린 모네에게 수련은 그야말로 가장 잘 어울리는 식물이 아닌가. 물 밑 어두운 곳에서 솟아나 매일 새로 피는 수련은 다시 태어나는 삶을 가리킨다. 물과 태양의 기운을 모두 지니고 있으며 한편으로 심연의 어둠까지 꿰고 있는 신비한 식물이다.
모네는 자신의 연못을 갖기 전에도 수련을 여러 번 그린 적이 있다. 1889년 드디어 연못이 완성되자 모네는 17점의 수련을 그렸다. 그중 <수련 연못>은 일본식 아치형 다리가 가로놓인 연못과 주변 풍경을 함께 표현한 것이다. 숲으로 둘러싸인 연못에는 잔잔한 수면에 동글동글한 수련의 잎들이 떠 있고 분홍빛 꽃들이 옹기종기 피어 있다. 햇빛이 이들을 밝게 비치며 거울 같은 물의 표면에 식물의 그림자를 짙게 드리운다. 여름날 모네의 정원은 온통 초록빛으로 물들어 눈부신 싱그러움으로 충만하다.
멀리서 본 풍경만이 아니라 모네는 물가에 좀 더 다가가 가까이에서 본 수련의 모습을 자주 묘사했다. 아침마다 연못에 나가 하룻밤 새 달라진 물과 수련을 관찰했다. 물은 언제나 신선하고 수련은 햇빛과 함께 새롭게 피어났다. 바람이 불면 출렁이는 수면에서 수련도 같이 흔들렸다. 물가에 드리운 버드나무 가지도 휘청거리며 물에 비친 그림자를 흔들어댔다. 이런 장면은 연못의 일상이지만 결코 똑같은 모습이 반복되지 않았다. 식물이 자라고 시들며 날씨와 시간에 따라 연못도 끊임없이 색과 형태가 달라졌다. 그래서 모네는 매일 수련을 그려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물과 수련의 미세한 변화를 보며 단 한 번밖에 오지 않는 짧은 시간을 화폭에 기록했다. 그렇게 모네는 자신의 정원에서 날마다 다른 세상과 만나고 있었다.
무한을 위한 순간의 표현
나이가 들면서 모네는 시력이 점점 나빠져 고통을 받았다. 눈에 보이는 세계의 변화를 그 즉시 포착하려 했던 모네에게 시력저하는 치명적인 장애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모네는 백내장 수술을 받아가며 시력이 남아 있는 한 그림을 계속 그려 나갔다. 80대에 접어든 1920년대에 그린 <수련>들을 보면 꽃과 잎의 형태가 모호해지고 필체도 더욱 거칠어졌다. 대상이 잘 보이지 않으면 보이는 만큼만, 눈과 손이 허락하는 대로 그림을 그렸다. 머리로 익히 알고 있는 수련이 아니라 오직 그날 자신이 직접 보고 경험한 수련을 표현했다.
이 시기에 모네는 전보다 오히려 더 큰 작품들을 제작했다. 그는 <수련> 대작들을 영구 전시하는 조건으로 프랑스 정부에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 뜻을 따라 파리의 오랑주리미술관에 <수련>만을 위한 특별 전시실이 마련됐다. 안타깝게도 모네가 사망한 이듬해에야 문을 열었지만 지금도 그곳 지하 전시장에는 넓은 타원형 벽면에 커다란 <수련> 연작이 여러 점 걸려 있다. 작품들의 길이는 달라도 높이가 모두 2m가량으로 동일해서 일련의 연속된 풍경으로 감상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긴 그림은 12m가 넘는 <수련: 구름>이라는 작품이다. 수련이 떠 있는 푸른 연못에 흰 구름이 비치는 장면을 그린 것인데, 제목을 모르면 무엇을 그렸는지 좀처럼 알아보기 어렵다. 그저 짙고 옅은 파란 색면에 몽실몽실한 하얀 덩어리, 조그만 초록색 타원형들과 아주 작은 불그레한 색점들이 흩어져 있을 뿐이다. 그 모든 것이 짧고 거친 붓놀림으로 한데 뒤엉켜 거대한 파노라마를 이룬다. 거의 추상미술에 가까운 이 그림은 화면을 넘어 끝없이 확장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시력을 잃어가는 모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세상의 희미한 외양뿐이었다. 그러나 흐린 눈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어쩌면 모네는 시각의 차원을 넘어 더 큰 것을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모든 형상의 구분이 사라지고 하나로 통합되는 무한의 세계, 일종의 우주와도 같은 것이다. 흔들리는 물에 비친 세상, 물 위에서 짧게 피는 수련을 모네는 그리고 또 그렸다. 모네의 수많은 수련 그림들은 변화무쌍한 순간들을 담고 있다. 매 순간은 결코 한 번에 표현할 수 없는 길고 긴 시간을 조각낸 단편들이다. 모네가 같은 소재를 반복해서 그린 것은 사실 무한의 세계를 표현하기 위한 나름의 방법이 아니었을까. 무수한 순간들로 나뉜 <수련>들은 그 덧없음으로써 영원을 갈망한 한 위대한 예술가의 기념비적 걸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