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강소기업 키워라
우리 경제의 ‘허리’ 역할을 해 온 중견기업들이 존폐의 기로에 내몰리고 있다. 흔들림 없는 창업정신과 부단한 혁신을 통해 글로벌 플레이어로 성장했지만 높은 세(稅) 부담을 넘어서지 못해 경영 승계를 포기하는 사례가 늘고 있는 것이다.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상속세율도 문제지만 가업승계를 ‘부의 대물림’으로 인식하는 국민 정서는 기업가 정신은 물론 기업의 성장 의지마저 꺾고 있다. 이에 한경 머니는 기업 경영 전문가들과 함께 가업승계 과정에서의 애로사항과 제도적 개선 방안, 그리고 국민적 공감대 형성을 위한 기업가 스스로의 과제 등을 짚어봤다.[한경 머니 = 공인호 기자] 락앤락, 쓰리세븐, 농우바이오. 각기 다른 업종을 영위하는 이들 기업은 동일한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창업자 직계가족이 수십 년간 일궈온 기업 경영권을 포기했다는 점에서다. 이들 기업을 벼랑 끝으로 내몬 것은 다름 아닌 ‘세(稅) 부담’이다.
얼마 전 중소벤처기업부와 한국중견기업연합회는 ‘2017 중견기업 가업승계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조사 대상은 국내 중견기업 125개사로 평균 매출액은 2910억 원, 평균 종사자 648명, 평균 업력은 36.7년이었다. 눈에 띄는 대목은 전체 기업의 44%만이 가업승계를 진행했고, 여전히 창업주가 경영권을 유지 중인 기업이 37.6%에 달했다. 중견기업 10곳 중 4곳 이상은 늦어도 십수 년 내에 경영권 승계 절차를 마무리해야 한다는 의미로 가업승계가 산업화 이후 우리 사회의 중대 화두로 등장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과도한 稅 부담, 까다로운 공제 요건
지난 2016년에 이어 이번 조사에서도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창업자가 겪는 주요 애로사항은 ‘과도한 세 부담’ 및 ‘까다로운 가업상속공제제도’, 그리고 ‘후계자 역량 부족’ 등이 꼽혔다. 특히 조사 대상의 절반에 가까운 47.2%는 과도한 상속 및 증여세 부담을 경영권 승계의 최대 걸림돌로 지목했다. 실제 우리나라의 상속세 최고세율은 50%에 육박한다. 여기에 최대주주 주식에 대한 할증까지 더해지면 65%까지 올라간다. 단순하게 계산해보면 100억 원짜리 회사를 상속할 경우 65억 원의 세 부담이 발생한다는 의미다.
이는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국가 평균 세율인 26.3%의 2배를 넘어서는 수준으로, 35개 회원국 가운데 캐나다, 싱가포르, 중국 등 13개국은 아예 상속세를 부과하지 않고 있다. 나머지 국가들 역시 자국 산업 보호 차원에서 세 부담을 크게 낮추는 추세다. 반면 우리 정부는 기업에 대한 세 부담을 오히려 강화하고 있다. 지난해까지 증여세(3개월 이내) 및 상속세(6개월 이내)를 자진 신고하면 7% 세액공제를 해줬던 것도 올해부터는 5%, 내년부터는 3%로 크게 낮아진다.
그나마 세 부담을 덜어주는 가업상속공제 역시 갈수록 요건이 까다로워지고 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가업 영위 기간이 10년 이상이면 200억 원, 15년 이상이면 300억 원, 20년 이상이면 500억 원까지 공제를 해줬지만, 올해부터는 ‘15년 이상’은 ‘20년 이상’으로 ‘20년 이상’은 ‘30년 이상’으로 공제 요건이 강화됐다. 사후 요건은 더 까다롭다. 가업상속공제를 받은 기업은 무려 10년 동안 가업용 자산 및 정규직 근로자의 80%(상속 직전 2년 평균)를 유지해야 하고 업종 변경도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여기에 상속인의 상속 지분 100% 유지 조항도 있어 경영 위기 등 대내외 충격에 따른 유연한 대응이 어려워진다. 사후 요건을 지키지 못할 경우에는 기간에 따른 안분 금액을 토해내야 한다. 문제는 이 같은 세금 폭탄을 피하기 위해 경영권을 포기하거나 아예 회사를 매각하는 사례까지 나온다는 점이다.
과거 손톱깎이 시장 세계 점유율 1위까지 올랐던 ‘쓰리세븐’은 지난 2008년 창업주 사망 이후 150억 원가량의 상속세를 마련하지 못해 경영권을 매각했으며, 국내 1위 종자기술 업체 ‘농우바이오’도 1200억 원대의 상속세를 감당하지 못해 2014년 매물로 나온 바 있다. 지난해에는 국내 밀폐용기 시장 점유율 1위이자 매출의 절반가량을 해외에서 벌어들인 ‘락앤락’도 세 부담을 못 이겨 홍콩계 사모펀드에 경영권을 넘겼다. 김선화 가족기업연구소장은 “국내 중견기업들이 승계 문제에 부딪쳐 매물로 나오는 경우가 빈번해지고 있는데, 결국 이런 기업들은 거대 자본과 기존 대기업들이 인수하게 된다”며 “중견기업들이 성장을 멈추게 되면 대기업의 경제 집중도가 더욱 심화되는 악순환에 직면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만 역주행…“공감대 형성 필요”
문제는 중소·중견기업의 경영권 승계 문제를 방치할 경우 맞닥뜨릴 수 있는 기회비용이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우리 경제의 고질적 병폐인 ‘경제력 집중화’를 완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 중견기업 육성이기 때문이다. 2016년 말 기준 우리나라의 전체 영리기업은 62만6000여 개인데, 이 가운데 연 매출 120억 원 이하 소기업이 90% 이상(56만여 개)을 차지한다. 1500억 원 이하 중기업도 6만1500여 개에 달한다. 반면 우리 경제의 ‘허리’를 담당하는 중견기업은 4000여 개에 불과한 실정이지만, 이들 기업은 국내 기업 전체 매출의 5분의 1을 책임지고 있다.
미국을 비롯해 OECD 주요국이 파격적인 감세정책을 펴는 것은 전체 세수에서 차지하는 상속세 비중(1% 안팎)이 워낙 미미한 데다, 본격적인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중견기업을 육성하려는 강력한 의지가 기저에 깔려 있다. 각 나라의 중견기업 육성 의지는 국가별 장수기업 현황에도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다. 중소벤처기업부가 발표한 장수기업 현황에 따르면, 지난 2014년 기준 100년 이상 장수기업은 미국이 1만2780개로 가장 많았고, 독일(1만73개)과 네덜란드(3357개)가 뒤를 이었다. 같은 기간 한국은 7개사에 불과했다. 또 200년 이상 장수기업은 일본이 3113개사로 가장 많았고, 독일(1563개)과 프랑스(331개), 영국(315개) 등의 순이었다.
특히 급격한 인구 고령화를 겪고 있는 일본의 경우 장수기업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적 지원에 나서고 있다. 일본 경제산업성에 따르면 오는 2025년까지 일본 전체 기업의 60%의 경영자가 평균 은퇴 연령인 70세를 넘을 것으로 추산되며, 이 가운데 절반가량이 후계자를 찾지 못한 상태다. 일본 정부는 이들 기업이 폐업할 경우 65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질 수 있다고 보고 일정 수준의 고용을 유지할 경우 양도세와 상속세 납부를 유예해주고 있다. 지난해에는 향후 10년을 ‘가업승계정책 집중 시행기간’으로 정하고 주식 이전에 따른 세금을 전액 감면해주거나 고용 유지 등의 사후 요건도 크게 완화해주는 정책을 발표하기도 했다. 또 ‘중소기업 사업승계 5개년 계획’을 마련해 조기 승계에 대한 인센티브 제공은 물론, 정부 차원의 승계 진단, 후계자 매칭 등의 서비스까지 지원하고 있다.
다만 일각에서는 정부의 정책적 지원도 중요하지만 ‘가업승계=부의 대물림’이라는 부정적 인식을 해소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세 부담 증가의 이면에 반기업 정서가 존재하고 있다는 시각에서다. 일부 대기업들이 정치자금 사건에 연루되거나 재벌 2·3세의 ‘갑질 논란’ 등도 경영권 승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심화시켜 왔다. 송동진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는 “근본적으로 ‘가업승계가 왜 필요한가’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 형성이 필요하다”며 “아무리 좋은 제도를 들여와도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으면 비난 여론에 직면할 수밖에 없고 결국 유명무실해지거나 기존 제도처럼 실효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