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 노트]살짝 미쳐봐도 좋아요


[한경 머니=한용섭 편집장]엘리트 코스만 밟아 온 한 은행맨이 있었죠. 동기들에 비해 승진도 빨랐고 핵심 부서를 두루 경험하며 나름 능력도 인정받았던 모양입니다.

뉴욕지점장을 다녀온 덕에 국내는 물론 해외 인맥도 풍부했고요. 하지만 잘나가던 그도 은행장이라는 문턱 바로 앞에서 끝내 고배를 마시고 맙니다. 막막했다고 전했습니다. 인생이 참 부질없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이후 작은 보안업체의 임원 자리를 맡았지만 성에 찰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매일 지나치던 동네 입구에서 색소폰 소리에 이끌립니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강습소 문을 엽니다. 숫자에만 밝았지 음표에는 문외한인 그였습니다.

고개를 떨구고 숨을 뱉으면 한숨이지만 색소폰을 불면 음악이 됩니다. 삶에 음악이 밀물처럼 밀려오자 메말랐던 감성이 촉촉해졌습니다.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곧잘 색소폰을 꺼내 연주를 들려준다는 그는 조만간 연주회를 열게 되면 저를 초대하겠다고 했습니다.

모 부회장은 경제단체를 이끌고 있습니다. 술은 입에 대지도 못하고, 남들 다 한다는 골프나 낚시에는 도통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고 고백하더군요. 그런 그에게도 흠뻑 빠진 보물이 있었으니 바로 만년필입니다. 그에게는 파카, 몽블랑, 워터맨, 펠리컨 등 100개 이상의 만년필이 있다고 하는데 일과가 끝난 뒤 조용히 방에서 성경을 필사하는 일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두꺼운 펜촉을 사서 자신의 스타일대로 줄과 사포로 갈아 쓴다고 하는데 이유인즉 볼펜이나 연필은 애초 주어진 끝으로 글씨를 써야 하지만 손수 갈아 쓰는 만년필은 오직 자신만의 글씨를 적게 해주는 매력이 있다는 겁니다.

최근 중년에 대한 정의가 조금 달라졌죠. 일반적인 3040세대를 넘어서 취미 활동을 적극 즐기는 4050세대를 ‘뉴노멀 중년’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보통 베이비부머로 불리는 5060세대는 ‘신중년’이라는 별칭이 생겼습니다.

고도성장의 주역이었고, 부모 부양과 자녀 양육의 이중고를 겪는 마지막 세대. 삶의 무게가 지구의 중력과 동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지만 이를 뒤집어본다면 지구 위에 당당하게 올라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요.

최근 라이나전성기재단은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와 함께 만 50세부터 65세의 남녀 1070명을 연구 조사한 ‘대한민국 50+세대의 라이프 키워드’를 발표했습니다. 이 조사에 따르면 50대 이상 세대는 ‘자신에게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순서대로 나열하세요’라는 질문에 ‘나 자신’(53.9%)을 제일 먼저 꼽았고, 2순위로는 남성의 21.8%가 ‘배우자’를, 여성은 ‘자녀’(27%)를 선택했습니다.

‘나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는 일은 어떤 것일까요. 지나온 삶의 한 컷 한 컷을 되돌려봅니다. 그 순간 어떤 도구에 심취해 미소를 짓고 있는 ‘나 자신’이 떠오릅니다. 어떤 도구가 색소폰이나 만년필이었건, 액션캠 플라잉 카메라나 낚싯대, 자전거나 오디오였건 상관이 없습니다. 그 순간 행복했다면 그뿐입니다.

최근 SBS TV 예능 방송 중에 <살짝 미쳐도 좋아>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다양한 분야의 스타들이 나와서 최근 ‘미쳐 있는’ 취미와 관심사를 소개합니다. 사실 어떤 취미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열정적이고 뜨겁게 빠져들면 되는 겁니다. 어떤가요, 그대도. 자신을 꽉 조였던 넥타이를 풀어내고 무엇엔가 ‘살짝 미쳐봐도’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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