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기고=이석원 여행전문기자] 시벨리우스의 음악이 거리 곳곳에, 건물 하나하나에, 그리고 숲과 호수, 하늘과 드넓은 벌판 전체에 퍼져 있는 핀란드 헬싱키. 770년 피지배의 역사지만 그보다 훨씬 위대한 100년이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와 함께 하고 있다. 그래서 헬싱키는 오래 기억에 남는 여행지가 된다.
“핀란드 갈매기는 뚱뚱하다. 어릴 적 기르던 고양이를 생각나게 한다.”
독특한 감수성을 지닌 일본의 영화감독 오기가미 나오코는 왜 영화 <카모메 식당> 속 사치에의 입을 빌어 애먼 핀란드의 갈매기에게 외모 팩트를 날린 걸까? 영화를 촬영하는 내내 그의 눈에 비친 핀란드 갈매기가 그리 토실토실해 보였던 걸까? 아니면 영화 속 식당 간판에 그려 넣은 갈매기 그림이 어쩌다 보니 뚱뚱한 갈매기가 돼 버려서일까?
[1 발트해를 접하고 있는 헬싱키에는 도시 곳곳 갈매기가 많다. 그런 갈매기를 두고 영화 <카모메 식당>의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은 “핀란드 갈매기는 뚱뚱하다”며 영화를 시작한다.]
핀란드 헬싱키의 한가한 골목길 카모메 식당에 앉아 영화 속 그 주먹밥(오니기리)을 씹는다. 한국에서 먹던 편의점 참치마요네즈 삼각김밥보다는 훨씬 못 미치는 ‘자연의 맛’이지만, 그래도 한국을 떠나 있은 지 오래다 보니 이 또한 풋풋한 그리움이다. 아무리 그래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배를 타고 무려 17시간 밤을 새워 달려와서는 겨우 일본식 주먹밥 한 덩어리라니. 주먹밥을 먹겠다고 왔겠나. 지난번에는 와보지 못한 카모메 식당이니 와본 거지.
영화 속 식당과 똑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다지 많이 바꾸지 않음은 한국이나 일본 여행자들을 위한 배려일까? 나오코 감독이 사치에와 미도리, 그리고 마사코와 리이사를 통해 그리고자 했던 그 평온한 감수성이 현실 속 식당에서도 조금은 느껴지니 적어도 영화 속 카모메 식당이나 현실 속 카모메 식당 모두가 편안한 만족감으로 여행을 시작하게 해준다.
◆ ‘핀란드의 정신’ 얀 시벨리우스
시내에서 4번이나 10번 트램을 타고 복잡한 도심을 살짝 벗어난다. 19세기에 새로 만들어진, 유럽에서 가장 젊은 수도인 헬싱키는 유럽답지 않다는 편견이 있다. 하지만 유럽의 오래된 도시들에서 느낄 수 있는 고유의 감성이 배제된 것은 오히려 헬싱키의 도심 한복판이다. 트램을 타고 복잡함을 벗어나보면 길가의 교회며 크고 작은 아파트며, 학교 등에서 유럽다운 고풍스러움을 찾을 수 있다.
트램에서 내려 주택가 쪽으로 10여 분 더 걸으면, 아직 채 겨울의 흔적이 가시지 않았지만 따뜻한 느낌 물씬한 공원이 나온다. 그 공원 한복판, 중학생쯤 돼 보이는 아이들이 축구공을 가지고 노는 그 옆에 범상치 않은 조형물과, 그만큼 더 범상치 않은 얼굴 부조가 보인다. 핀란드의 정신이라고도 하는 음악가 얀 시벨리우스(Jean Sibelius)와 그를 기념하는 파이프 오르간 모양의 ‘시벨리우스 기념물(Sibelius-monumentti, 영어명 Sibelius Monument)’이다.
[2 헬싱키 시벨리우스 공원 안에 있는 이 조형물은 에일라 힐투넨이 1967년 시벨리우스에게 헌정한 것이다. 600여 개의 청동 파이프 전체 무게는 약 24톤에 이른다.]
[3 1865년에 태어나 1957년에 사망한 얀 시벨리우스는 핀란드의 정신을 대표하는 음악가다. 핀란드 사람들은 시벨리우스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하다. 그는 대놓고 독립운동 같은 것을 한 적은 없지만, 그의 음악은 핀란드 독립의 기초가 됐다고 핀란드 사람들은 생각한다.]
시벨리우스 공원 안에 있는 시벨리우스 기념물은 핀란드의 조각가인 에일라 힐투넨(Eila Hiltunen)의 작품으로 시벨리우스 사후 10년인 1967년 9월 7일 시벨리우스에게 헌정됐다.
600여 개의 청동 파이프를 덧붙여 마치 물결이 치는 형상을 이루고 있다. 설치 초기 시벨리우스 팬들에게는 “이게 무슨 시벨리우스 기념물이냐”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파이프 옆 무언가 심각하게 고뇌하는 시벨리우스의 얼굴 부조 때문에 용서(?)를 받았고, 50년이 지난 지금 이 기념물은 현존하듯 시벨리우스를 상징하고 있다. 시벨리우스의 흔적을 따라 헬싱키에 온 사람이라면 이 조형물을 지나치지 않는다.
공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시벨리우스에 대해 잠깐 물었다. 아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시벨리우스의 얼굴 부조를 가리킨다. “좋아하냐” 하고 물으면 한결같이 “좋아한다”고 답한다. 아이들은 이미 학교에서 <핀란디아>는 물론, <칼레빌라>, <투오넬라의 백조> 등 시벨리우스의 대표곡들을 다 섭렵했다. 학교 오케스트라 활동을 통해 이미 다 해본 연주란다.
시벨리우스 한 사람이 핀란드 음악에 미친 영향은 엄청나다. 핀란드는 우리의 10분의 1 수준인 550만 명에 불과한 인구지만, 인구 대비 세계에서 가장 많은 합창단과 오케스트라를 보유하고 있는 음악 강국이다. 물론 시벨리우스의 노력이 배어 있다. 정부 차원의 클래식 음악가 양성에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예산을 투자한다.
◆ 핀란드 최대 공연장 ‘핀란디아홀’
다시 4번이나 10번 트램을 타고 시내 쪽으로 오다가 내린다. 하얀 눈이 덮인 호수를 배경으로 그 눈만큼이나 하얀 건물이다. ‘핀란디아’라는 커다란 명패가 말해주듯 핀란드에서 가장 큰 공연장인 ‘핀란디아홀(Finlandia Talo Huset Hall)’이다.
[4 핀란디아홀은 시벨리우스홀, 뮤직센터와 함께 핀란드 3대 음악 공연장으로 유명하다. 지금은 음악 공연뿐 아니라 국제회의장으로도 쓰이고 있어 국제적인 명성이 더 높다.]
[5 헬싱키의 랜드마크. 헬싱키 항구로 들어오는 배들은 모두 이 흰색과 녹색이 잘 어우러진 루터교회를 이정표 삼는다. 헬싱키 대성당을 중심으로 한 원로원 광장이 헬싱키의 역사 지구다.]
[6 대성당을 닮은 듯한 색감의 대통령궁. 세계에서 가장 열린 국가원수의 집무 공간이다. 헬싱키 항구에 인접한 대통령궁에서 집무를 하던 핀란드 대통령은 수시로 경호원도 없이 헬싱키 항구의 노천 식당에서 식사를 하곤 한다.]
핀란드의 건축가인 알바르 알토(Alvar Aalto)의 설계로 1971년 개관한 핀란디아홀은 음악당으로의 역할뿐 아니라 국제회의장의 기능도 함께 하고 있다. 건축가는 음악당을 지으면서 여기에 시벨리우스의 교향시 <핀란디아>의 이름을 붙이는 데 단 1초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알토는 비록 음악가가 아닌 건축가이지만, 그 자신이 시벨리우스의 음악을 들으면서 자랐고, 모든 핀란드 시민들의 정신 속에는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가 잠재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핀란디아홀 건너편, 고딕 양식의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교회라고 생각했는데, 핀란드 국립 박물관이다. 그 박물관을 왼쪽으로 돌아 한적한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크고 투박한 건물이 나타난다. 디자인의 도시라는 헬싱키에 뭐 이런 멋대가리 없는 건물이 있나 하고 눈길을 돌리려는데, 입구에 적힌 ‘시벨리우스 아카데미(Taideyliopisto Sibelius-Akatemia)’라는 글자가 눈길을 잡는다. 아, 하마터면 모르고 지나칠 뻔했다. 시벨리우스가 공부하고, 또 그 자신이 학생들을 가르쳤던 곳이다.
군의관이던 아버지의 강요로 1885년 헬싱키대 법학과에 입학했지만, 시벨리우스는 법 공부에는 영 관심이 없었다. 결국 엄격한 아버지 몰래 그는 헬싱키 음악원에도 입학을 한다. 그리고 결국 바이올린에 대한 그의 열정은 법학 공부를 때려치우게 만든다. 그즈음, 아마도 그의 부모도 어린 시절부터 특별한 재능을 보인 그의 바이올린 연주에 감동했으리라.
헬싱키 음악원을 졸업한 그는 독일로 유학을 떠난다. 그러나 독일을 풍미한 바그너나 말러의 음악이 그와는 맞지 않았나 보다. 시벨리우스는 다른 음악을 찾아 오스트리아 빈으로 갔고, 거기서 요하네스 브람스를 만난다. 그의 음악이 결정적인 변화의 계기를 만난 것이다. 그런 다음 다시 핀란드로 돌아와 그는 모교인 헬싱키 음악원의 교수가 된다.
그런 전통 위에 1500여 명의 학생들이 공부하는 시벨리우스 아카데미는 현재 유럽에서도 가장 손꼽히는 음악대학이다. 1882년 ‘헬싱키 음악원(Helsingfors musikinstitut)’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됐지만, 1939년 시벨리우스를 기리기 위해 ‘시벨리우스 아카데미’로 이름을 바꿨다. 5년마다 개최되는 ‘얀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콩쿠르’의 개최자이기도 하다.
◆ 피지배의 역사 속에 핀 위대한 100년
체코의 스메타나나 쿠벨리크, 폴란드의 쇼팽 등은 외세에 지배받는 조국의 고통을 피해 외국에서 음악 활동을 했다. 그와 달리 시벨리우스는 3년여 음악 유학을 떠나긴 했지만, 제정 러시아의 지배에 있는 조국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조국의 심장 한복판에서 민족 음악을 만들었다. 그래서일까? 핀란드 사람들의 시벨리우스에 대한 애정은 ‘시벨리우스를 팔아 현실의 영화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숭배 같은 것이었다. 종교적 신성함은 결코 상업적 물물교환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그런 것이었다.
[7 러시아 정교회의 성당. 제정 러시아 지배 시절인 1868년에 슬라브 비잔틴 양식으로 지어졌다.]
[8, 9 2007년 개봉한 일본 영화 <카모메 식당>의 실제 촬영이 이뤄진 곳. 지금도 카모메 식당이라는 이름으로 영업을 하고 있다. 이 영화 한 편이 일본과 한국의 감성 풍부한 여행자를 핀란드 헬싱키로 불러 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0 헬싱키는 1809년 제정 러시아가 지배를 시작하며 새롭게 만들어진 도시다. 제정 러시아 지배 전 스웨덴이 지배하던 시절에는 투르쿠가 핀란드의 수도였다. 제정 러시아의 알렉산드로 1세는 스웨덴이 지배하던 투르쿠가 싫어 러시아에서 가까운 헬싱키에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본떠 도시를 재정비했다.]
헬싱키 시내 어디를 다녀도 시벨리우스를 상품화한 흔적은 없다. 빈이나 잘츠부르크에 가면 모차르트가 가장 뜨거운 관광 상품이고, 바르샤바에 가면 쇼팽은 길거리 기념품이다. 하지만 헬싱키 시내 어디에도 시벨리우스로 만들어진 기념품을 찾을 수가 없다. ‘시벨리우스가 핀란드 사람이기는 한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러나 길에서 만난 헬싱키 사람들이 말하는 시벨리우스는 존경과 존엄이다. 헬싱키 대성당 앞에서 <핀란디아>를 바이올린으로 연주하던 한 할아버지는 “누군가를 영웅처럼 떠받들며 상품화해서 파는 것도 쑥스러운 일이지만, 시벨리우스는 음악으로 이야기하지 다른 것은 없다”고 말한다. 잠시 바이올린을 내려놓고 케이스에 담긴 동전을 헤아려보는 그가 괜히 시벨리우스를 많이 닮았다는 객쩍은 생각을 해본다.
[11 발트해를 건너온 배들이 핀란드와 처음으로 대면하는 곳. 스웨덴과 에스토니아, 라트비아와 러시아 등에서 오는 초대형 유람선들이 수많은 여행자들을 실어 나른다.]
1917년 구소련으로부터 독립하면서 핀란드는 비로소 거의 770년 만에 제 나라를 찾았다. 1150년 스웨덴에 점령당한 후 1809년까지 660년간 핀란드는 스웨덴이었다. 스웨덴에 속한 공국으로 민족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지만, 그들은 스웨덴어를 강요당하며 스웨덴 사람으로 살아야 했다. 1809년 스웨덴으로부터 핀란드를 빼앗은 제정 러시아는, 비록 스웨덴처럼 자기 말을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다시 108년간 핀란드를 지배했다.
제정 러시아의 지배 때에 태어나고 자란 시벨리우스는 자신의 조국이 어땠을까? 그는 자기 음악에 핀란드의 자연과 역사를 담았다. 19만 개의 호수로 이뤄진 ‘호수의 나라’. 그래서 나라 이름조차 호수를 뜻하는 수오미. 1년 12개월 중 8개월이 겨울이라고 불리는 진정한 겨울 왕국. 하지만 찬란한 자연과, 피지배의 역사 속에서도 망각하지 않은 고유한 문화를 지닌 자기 조국이 시벨리우스는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장중한 아름다움을 지니면서도 이야기가 있고, 그 이야기 속에는 또 그 한 맺힌 역사와 피 끓는 애국심이 있는지도 모른다.
“핀란드 갈매기는 뚱뚱하다. 어릴 적 기르던 고양이를 생각나게 한다.”
독특한 감수성을 지닌 일본의 영화감독 오기가미 나오코는 왜 영화 <카모메 식당> 속 사치에의 입을 빌어 애먼 핀란드의 갈매기에게 외모 팩트를 날린 걸까? 영화를 촬영하는 내내 그의 눈에 비친 핀란드 갈매기가 그리 토실토실해 보였던 걸까? 아니면 영화 속 식당 간판에 그려 넣은 갈매기 그림이 어쩌다 보니 뚱뚱한 갈매기가 돼 버려서일까?
[1 발트해를 접하고 있는 헬싱키에는 도시 곳곳 갈매기가 많다. 그런 갈매기를 두고 영화 <카모메 식당>의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은 “핀란드 갈매기는 뚱뚱하다”며 영화를 시작한다.]
핀란드 헬싱키의 한가한 골목길 카모메 식당에 앉아 영화 속 그 주먹밥(오니기리)을 씹는다. 한국에서 먹던 편의점 참치마요네즈 삼각김밥보다는 훨씬 못 미치는 ‘자연의 맛’이지만, 그래도 한국을 떠나 있은 지 오래다 보니 이 또한 풋풋한 그리움이다. 아무리 그래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배를 타고 무려 17시간 밤을 새워 달려와서는 겨우 일본식 주먹밥 한 덩어리라니. 주먹밥을 먹겠다고 왔겠나. 지난번에는 와보지 못한 카모메 식당이니 와본 거지.
영화 속 식당과 똑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다지 많이 바꾸지 않음은 한국이나 일본 여행자들을 위한 배려일까? 나오코 감독이 사치에와 미도리, 그리고 마사코와 리이사를 통해 그리고자 했던 그 평온한 감수성이 현실 속 식당에서도 조금은 느껴지니 적어도 영화 속 카모메 식당이나 현실 속 카모메 식당 모두가 편안한 만족감으로 여행을 시작하게 해준다.
◆ ‘핀란드의 정신’ 얀 시벨리우스
시내에서 4번이나 10번 트램을 타고 복잡한 도심을 살짝 벗어난다. 19세기에 새로 만들어진, 유럽에서 가장 젊은 수도인 헬싱키는 유럽답지 않다는 편견이 있다. 하지만 유럽의 오래된 도시들에서 느낄 수 있는 고유의 감성이 배제된 것은 오히려 헬싱키의 도심 한복판이다. 트램을 타고 복잡함을 벗어나보면 길가의 교회며 크고 작은 아파트며, 학교 등에서 유럽다운 고풍스러움을 찾을 수 있다.
트램에서 내려 주택가 쪽으로 10여 분 더 걸으면, 아직 채 겨울의 흔적이 가시지 않았지만 따뜻한 느낌 물씬한 공원이 나온다. 그 공원 한복판, 중학생쯤 돼 보이는 아이들이 축구공을 가지고 노는 그 옆에 범상치 않은 조형물과, 그만큼 더 범상치 않은 얼굴 부조가 보인다. 핀란드의 정신이라고도 하는 음악가 얀 시벨리우스(Jean Sibelius)와 그를 기념하는 파이프 오르간 모양의 ‘시벨리우스 기념물(Sibelius-monumentti, 영어명 Sibelius Monument)’이다.
[2 헬싱키 시벨리우스 공원 안에 있는 이 조형물은 에일라 힐투넨이 1967년 시벨리우스에게 헌정한 것이다. 600여 개의 청동 파이프 전체 무게는 약 24톤에 이른다.]
[3 1865년에 태어나 1957년에 사망한 얀 시벨리우스는 핀란드의 정신을 대표하는 음악가다. 핀란드 사람들은 시벨리우스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하다. 그는 대놓고 독립운동 같은 것을 한 적은 없지만, 그의 음악은 핀란드 독립의 기초가 됐다고 핀란드 사람들은 생각한다.]
시벨리우스 공원 안에 있는 시벨리우스 기념물은 핀란드의 조각가인 에일라 힐투넨(Eila Hiltunen)의 작품으로 시벨리우스 사후 10년인 1967년 9월 7일 시벨리우스에게 헌정됐다.
600여 개의 청동 파이프를 덧붙여 마치 물결이 치는 형상을 이루고 있다. 설치 초기 시벨리우스 팬들에게는 “이게 무슨 시벨리우스 기념물이냐”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파이프 옆 무언가 심각하게 고뇌하는 시벨리우스의 얼굴 부조 때문에 용서(?)를 받았고, 50년이 지난 지금 이 기념물은 현존하듯 시벨리우스를 상징하고 있다. 시벨리우스의 흔적을 따라 헬싱키에 온 사람이라면 이 조형물을 지나치지 않는다.
공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시벨리우스에 대해 잠깐 물었다. 아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시벨리우스의 얼굴 부조를 가리킨다. “좋아하냐” 하고 물으면 한결같이 “좋아한다”고 답한다. 아이들은 이미 학교에서 <핀란디아>는 물론, <칼레빌라>, <투오넬라의 백조> 등 시벨리우스의 대표곡들을 다 섭렵했다. 학교 오케스트라 활동을 통해 이미 다 해본 연주란다.
시벨리우스 한 사람이 핀란드 음악에 미친 영향은 엄청나다. 핀란드는 우리의 10분의 1 수준인 550만 명에 불과한 인구지만, 인구 대비 세계에서 가장 많은 합창단과 오케스트라를 보유하고 있는 음악 강국이다. 물론 시벨리우스의 노력이 배어 있다. 정부 차원의 클래식 음악가 양성에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예산을 투자한다.
◆ 핀란드 최대 공연장 ‘핀란디아홀’
다시 4번이나 10번 트램을 타고 시내 쪽으로 오다가 내린다. 하얀 눈이 덮인 호수를 배경으로 그 눈만큼이나 하얀 건물이다. ‘핀란디아’라는 커다란 명패가 말해주듯 핀란드에서 가장 큰 공연장인 ‘핀란디아홀(Finlandia Talo Huset Hall)’이다.
[4 핀란디아홀은 시벨리우스홀, 뮤직센터와 함께 핀란드 3대 음악 공연장으로 유명하다. 지금은 음악 공연뿐 아니라 국제회의장으로도 쓰이고 있어 국제적인 명성이 더 높다.]
[5 헬싱키의 랜드마크. 헬싱키 항구로 들어오는 배들은 모두 이 흰색과 녹색이 잘 어우러진 루터교회를 이정표 삼는다. 헬싱키 대성당을 중심으로 한 원로원 광장이 헬싱키의 역사 지구다.]
[6 대성당을 닮은 듯한 색감의 대통령궁. 세계에서 가장 열린 국가원수의 집무 공간이다. 헬싱키 항구에 인접한 대통령궁에서 집무를 하던 핀란드 대통령은 수시로 경호원도 없이 헬싱키 항구의 노천 식당에서 식사를 하곤 한다.]
핀란드의 건축가인 알바르 알토(Alvar Aalto)의 설계로 1971년 개관한 핀란디아홀은 음악당으로의 역할뿐 아니라 국제회의장의 기능도 함께 하고 있다. 건축가는 음악당을 지으면서 여기에 시벨리우스의 교향시 <핀란디아>의 이름을 붙이는 데 단 1초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알토는 비록 음악가가 아닌 건축가이지만, 그 자신이 시벨리우스의 음악을 들으면서 자랐고, 모든 핀란드 시민들의 정신 속에는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가 잠재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핀란디아홀 건너편, 고딕 양식의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교회라고 생각했는데, 핀란드 국립 박물관이다. 그 박물관을 왼쪽으로 돌아 한적한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크고 투박한 건물이 나타난다. 디자인의 도시라는 헬싱키에 뭐 이런 멋대가리 없는 건물이 있나 하고 눈길을 돌리려는데, 입구에 적힌 ‘시벨리우스 아카데미(Taideyliopisto Sibelius-Akatemia)’라는 글자가 눈길을 잡는다. 아, 하마터면 모르고 지나칠 뻔했다. 시벨리우스가 공부하고, 또 그 자신이 학생들을 가르쳤던 곳이다.
군의관이던 아버지의 강요로 1885년 헬싱키대 법학과에 입학했지만, 시벨리우스는 법 공부에는 영 관심이 없었다. 결국 엄격한 아버지 몰래 그는 헬싱키 음악원에도 입학을 한다. 그리고 결국 바이올린에 대한 그의 열정은 법학 공부를 때려치우게 만든다. 그즈음, 아마도 그의 부모도 어린 시절부터 특별한 재능을 보인 그의 바이올린 연주에 감동했으리라.
헬싱키 음악원을 졸업한 그는 독일로 유학을 떠난다. 그러나 독일을 풍미한 바그너나 말러의 음악이 그와는 맞지 않았나 보다. 시벨리우스는 다른 음악을 찾아 오스트리아 빈으로 갔고, 거기서 요하네스 브람스를 만난다. 그의 음악이 결정적인 변화의 계기를 만난 것이다. 그런 다음 다시 핀란드로 돌아와 그는 모교인 헬싱키 음악원의 교수가 된다.
그런 전통 위에 1500여 명의 학생들이 공부하는 시벨리우스 아카데미는 현재 유럽에서도 가장 손꼽히는 음악대학이다. 1882년 ‘헬싱키 음악원(Helsingfors musikinstitut)’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됐지만, 1939년 시벨리우스를 기리기 위해 ‘시벨리우스 아카데미’로 이름을 바꿨다. 5년마다 개최되는 ‘얀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콩쿠르’의 개최자이기도 하다.
◆ 피지배의 역사 속에 핀 위대한 100년
체코의 스메타나나 쿠벨리크, 폴란드의 쇼팽 등은 외세에 지배받는 조국의 고통을 피해 외국에서 음악 활동을 했다. 그와 달리 시벨리우스는 3년여 음악 유학을 떠나긴 했지만, 제정 러시아의 지배에 있는 조국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조국의 심장 한복판에서 민족 음악을 만들었다. 그래서일까? 핀란드 사람들의 시벨리우스에 대한 애정은 ‘시벨리우스를 팔아 현실의 영화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숭배 같은 것이었다. 종교적 신성함은 결코 상업적 물물교환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그런 것이었다.
[7 러시아 정교회의 성당. 제정 러시아 지배 시절인 1868년에 슬라브 비잔틴 양식으로 지어졌다.]
[8, 9 2007년 개봉한 일본 영화 <카모메 식당>의 실제 촬영이 이뤄진 곳. 지금도 카모메 식당이라는 이름으로 영업을 하고 있다. 이 영화 한 편이 일본과 한국의 감성 풍부한 여행자를 핀란드 헬싱키로 불러 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0 헬싱키는 1809년 제정 러시아가 지배를 시작하며 새롭게 만들어진 도시다. 제정 러시아 지배 전 스웨덴이 지배하던 시절에는 투르쿠가 핀란드의 수도였다. 제정 러시아의 알렉산드로 1세는 스웨덴이 지배하던 투르쿠가 싫어 러시아에서 가까운 헬싱키에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본떠 도시를 재정비했다.]
헬싱키 시내 어디를 다녀도 시벨리우스를 상품화한 흔적은 없다. 빈이나 잘츠부르크에 가면 모차르트가 가장 뜨거운 관광 상품이고, 바르샤바에 가면 쇼팽은 길거리 기념품이다. 하지만 헬싱키 시내 어디에도 시벨리우스로 만들어진 기념품을 찾을 수가 없다. ‘시벨리우스가 핀란드 사람이기는 한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러나 길에서 만난 헬싱키 사람들이 말하는 시벨리우스는 존경과 존엄이다. 헬싱키 대성당 앞에서 <핀란디아>를 바이올린으로 연주하던 한 할아버지는 “누군가를 영웅처럼 떠받들며 상품화해서 파는 것도 쑥스러운 일이지만, 시벨리우스는 음악으로 이야기하지 다른 것은 없다”고 말한다. 잠시 바이올린을 내려놓고 케이스에 담긴 동전을 헤아려보는 그가 괜히 시벨리우스를 많이 닮았다는 객쩍은 생각을 해본다.
[11 발트해를 건너온 배들이 핀란드와 처음으로 대면하는 곳. 스웨덴과 에스토니아, 라트비아와 러시아 등에서 오는 초대형 유람선들이 수많은 여행자들을 실어 나른다.]
1917년 구소련으로부터 독립하면서 핀란드는 비로소 거의 770년 만에 제 나라를 찾았다. 1150년 스웨덴에 점령당한 후 1809년까지 660년간 핀란드는 스웨덴이었다. 스웨덴에 속한 공국으로 민족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지만, 그들은 스웨덴어를 강요당하며 스웨덴 사람으로 살아야 했다. 1809년 스웨덴으로부터 핀란드를 빼앗은 제정 러시아는, 비록 스웨덴처럼 자기 말을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다시 108년간 핀란드를 지배했다.
제정 러시아의 지배 때에 태어나고 자란 시벨리우스는 자신의 조국이 어땠을까? 그는 자기 음악에 핀란드의 자연과 역사를 담았다. 19만 개의 호수로 이뤄진 ‘호수의 나라’. 그래서 나라 이름조차 호수를 뜻하는 수오미. 1년 12개월 중 8개월이 겨울이라고 불리는 진정한 겨울 왕국. 하지만 찬란한 자연과, 피지배의 역사 속에서도 망각하지 않은 고유한 문화를 지닌 자기 조국이 시벨리우스는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장중한 아름다움을 지니면서도 이야기가 있고, 그 이야기 속에는 또 그 한 맺힌 역사와 피 끓는 애국심이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