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wn Report] 칠곡, ‘같이의 가치’로 삶의 재생 꿈꾸다
입력 2018-04-02 11:25:21
수정 2018-04-02 11:25:21
[사람과 마을, 도시 재생] 칠곡 인문학 마을을 가다
[한경 머니=이현주 기자/사진 이승재 기자] 마을 곳곳에서 시를 쓴다. 노래를 부르고, 연극도 한다. 동네마다 각기 다른 풍경의 25개의 무대를 만들어낸다. 경북 칠곡 인문학마을은 지방 소도시가 겪는 고령화, 저성장의 파고 속에서도 자생력 있는 마을공동체를 이루며 활기를 되찾아 가고 있었다.경북 칠곡군 북삼읍 숭오 1리 마을회관에 들어서니 글 읽는 소리가 청명하다. 스무 개 남짓 좌식 책상에 앉아 연필을 쥔 손들엔 주름이 가득했다. 80세 전후의 동네 어르신들로 구성된 학습 동아리엔 수년째 배움의 열기가 꺼지지 않고 있다.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2시면 어김없이, 한데 모여 국어를 배우고 노래도 부른다.
“빨래를 하세~ 빨래를 하세~ 빨래를 하고~ 님도 보고~.”
글을 쓰던 할머니들이 자리를 이동해 떼창을 시작했다. 무대는 100년이 넘었다는 마을의 빨래터다. 그래서 이름도 ‘빨래터 합창단’이다. 저마다 독백처럼 부르던 옛 구전가요에 극적인 요소를 추가해 뮤지컬로 재구성했다. 금오산 산세의 탁 트인 풍경을 배경으로 노랫가락에 흥을 싣는다.
마을회관에서 마음 빨래터(한풀이를 하며 마음을 푸는 곳이라는 뜻)까지 느린 걸음으로 약 5분. 좁은 골목, 낮은 담장, 자전거 타는 할아버지, 빛바랜 지붕 뒤로 110여 년 역사를 가진 교회 하나가 솟아 있다. 눈을 돌리는 곳마다 오랜 세월의 흔적이 묻어난다.
“얼굴들이 다 밝지예. 글 배운다고 하면 자식들이 다 좋아라고 해요. 이름도 못 썼는데 가르쳐줘서 다 쓰고 읍내 어디 가도 간판 보고 찾아가요. 못 배워서 모르고 살았는데, 가르쳐주니까 열심히 하고 안 가르쳐줘도 열심히 해야지 않겠습니까. 언제까지든지, 못 할 때까지는 해야지요.” - 김봉이 빨래터 합창단 단원
단원 모두 ‘칠곡의 스타들’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고 한다. 정은경 숭오 1리 빨래터 합창단 교사는 “예전엔 마을회관에서도 여자 방, 남자 방이 따로 있어서 서로 잘 교류하지 않고, 어머니들도 집에 주로 계시면서 조용한 여느 시골의 모습이었는데 인문학마을 살이를 시작하면서 완전히 달라졌다”며 “연세가 많으신 데도 의욕이 대단하셔서 오늘도 한 분이 서울에 잡아 놓은 병원 예약까지 미루고 오셨다”고 귀띔했다.
숭오 1리에 빨래터 합창단이 있다면, 어로 1리엔 ‘보람 할매 연극단’이 있다. 역시 한글 학습 동아리에서 시작해 연극으로 진화했다. 연극보다 더 극적인 이야기들이 단원들의 삶에 녹아 있다 보니 대본에 실제 인생 스토리가 담기기도 한다고. 지선영 칠곡군 교육문화회관 평생학습담당은 “전국구로 유명세를 떨치면서 한 해 약 100여 공연을 올리고 1000만 원 이상 수익금을 내는 인문학마을의 자랑이다”라고 했다.
“인문학마을 축제가 있어서 마을마다 장기자랑을 하는데, 우리는 특별한 것을 해보자면서 5분짜리 연극을 했어요. 4~5년 전 얘기니까 전부 76~77세 무렵이죠. 그때만 해도 펄펄 날랐단 말입니다. 지금은 형님들이 80세가 넘으셔서 은퇴식을 하고 후배들한테 넘겨줬어요.” - 보람 할매 연극단 은퇴 단원 중
마을 소개는 시작에 불과했다. 총 25개의 마을이 저마다 다른 콘셉트로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는 설명이 이어진다. 사진 사랑방, 기타 교실, 천연 염색 교실, 신문지 재생공예 교실, 풍물 배우기, 전통 음식 연구회, 에너지 탐구 연구모임 등 2013년 초 10개 마을을 시작으로 칠곡 인문학마을이 결성된 후 오늘날까지 꾸준히 참여 마을이 늘어났다.
‘25명의 마을 리더, 25명의 마을 기자, 100여 명의 마을 교사.’ 지난 5년의 성과를 보여주는 수치다. “중요한 숫자냐”는 질문에 지선영 평생학습담당은 “2004년 이후로 꾸준히 해 온 평생학습의 과정부터 한 해 한 해 고비를 넘기며 ‘같이의 가치’를 향한 여정을 곱씹어보면 상당히 의미가 있다”고 답했다.
“특히 마을 교사(지역 내에서 배출된 선생님)가 의미 있는 이유는, 서로를 존중하는 문화를 만들어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문지 공예를 가르치는 한 어르신의 경우 아무도 그분이 신문지 공예에 재능이 있는지 몰랐는데 마을 간 교류를 통해 어르신 집에 방문해서 관찰하다 보니 종이로 뭐든지 만드시는 거예요. 이전에는 그냥 술 먹는 할아버지였는데 선생님 호칭을 얻고 나니 꽤 괜찮은 어르신이 되는 거죠. 어제는 저분이 재주 많은 선생님이지만 내일은 내가 선생님이 될 수 있다는 의미가 있는 겁니다.”
씨줄날줄처럼 얽혀 있는 인문학 네트워크
칠곡군은 ‘뚜렷한 특색이 없는 게 특징’인 중소도시에 해당한다. 대구와 구미 사이에 인접한 도농복합도시로 사실상 베드타운의 역할을 한다. 인구수 12만 명으로 시 승격 기준이 15만 명에 미치지 못하지만 ‘지방소멸’ 위기 속에서 웬만한 지방 도시보단 인구수가 많다. 한국고용정보원이 분석한 ‘소멸위험지수(65세 고령인구 대비 20~39세 여성 인구 비중)’에서 구미에 이어 경북 내 두 번째로 인구 소멸 가능성이 낮은 곳이다.
재밌는 점은 같은 칠곡군 내에 ‘전통 마을’과 ‘아파트 마을’의 전혀 다른 마을 풍경이 공존한다는 것이다. 전통 마을은 고령인구가 많은 전형적인 시골의 모습이며, 아파트 마을은 젊은 인구들이 주로 거주하는 신도시와 비슷하다. 13읍 5면 203리 가운데 읍 단위 인구는 증가하지만 전통 마을이 주로 있는 면 단위 인구는 정체 또는 감소하는 추세다.
전통 마을에선 고령화와 독거노인이 문제라면, 임대아파트 위주로 형성된 아파트 마을은 잦은 이사와 자녀 교육 문제가 고민거리였다. 또한 서로 다른 두 형태의 마을이 단절돼 있는 것도 지역 차원의 과제이기도 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칠곡에서 만난 인문학마을 살이 주민들은 적어도 위와 같은 고민에서 자유로운 모습이었다.
숭오 1리의 경우 140가구, 321명이 한데 살아가고 있다. 이 중 65세 이상 인구 비율이 29%(20% 이상 초고령사회)로 고령화가 진행된 데다, 13%에 해당하는 1인 가구 대부분이 홀로된 할머니들이었다. 다가올 미래 도시에서도 ‘늙어 가는 한국’에서의 ‘외로움’, ‘고독사’가 커다란 사회문제로 예상된다. 숭오 1리는 문화를 매개로 마을공동체를 이루며 ‘주민 케어’를 하고 있는 셈이다. 주목할 점은 씨줄날줄처럼 얽혀 있는 인문학마을 네트워크다.
칠곡 인문학마을이 유지되는 방식은 ‘공동체’,
‘네트워크’, ‘생태계’로 요약된다. 25개의 마을이 각각의 문화공동체를 이루고 있으며, 마을 간 교류를 통해 서로가 ‘멘토’와 ‘멘티’ 관계로 끈끈히 얽혀 있다. 또 각 마을의 대표자들이 모이는 칠곡 인문학마을협동조합 등 협의체를 통해 주요 의사 결정을 하고 있다.
지방 소도시가 겪는 고령화, 저성장의 파고 속에서도 마을의 활력을 되찾아 가는 비결은 자생 가능한 하나의 생태계로 존재하는 것이다. 크게 네 개의 축(칠곡군 교육문화회관, 문화 기획자 및 연구자로 구성된 전문가 집단, 학습 동아리, 4개의 협동조합)이 각자의 자리에서 지속 가능한 ‘인문학 도시’가 되도록 숨을 불어넣고 있다.
“국가의 예산 지원이 끊기면 인문학 도시도 사라지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돌아온 답은 이렇다. “예산을 받아 성과를 내는 사업으로 접근한 게 아니라, 처음부터 우리끼리 즐거운 일을 만들어보자며 주민 필요에 의해 모이기 시작했고 처음부터 어느 한쪽에 의존하는 시스템이 아니었어요. 이제는 협동조합 차원에서 자체 사업을 진행하며 문화공동체에서 경제공동체로 도약하는 단계에 이르고 있습니다.” - 지선영 평생학습담당
4개의 협동조합 중 가산면 학상리에 위치한 ‘학수고대 협동조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들마, 토실, 칠송정, 사부, 노갱이 5개 마을의 500여 명이 주민들이 살고 있는 곳이다. 논밭 한가운데 커뮤니티 공간 ‘학수고대’가 위치해 있다. 마을 탁아소로 사용됐던 농촌보육정보센터를 리모델링한 동네 사랑방이자 학당이자 카페 겸 복합문화공간이다.
“어르신들은 주로 낮에, 직장인들은 저녁 시간을 이용해서 모여서 커피도 드시고 강의도 들으신다”는 설명이 이어지던 중 주민 몇 분이 카페 문을 열고 들어왔다. 거의 매일 같은 시간에 방문하는 단골 어르신들이라고 한다. 한 어르신은 커피를 주문하며 “10년 전부터 나는 아메리카노만 마신다”고 했다. 농촌 마을에 형성된 ‘카페 문화’를 엿볼 수 있었다.
주민들은 이곳에서 또한 학춤과 풍물을 배운다. 1년 내내 연습해 가을 축제 때 작품으로 올린다. 다른 지역에도 꽤 입소문이 나 관광객들의 발걸음도 늘어나고 있다. 또 하나의 특징은 사람이 책이 되는 ‘사람책’이다. 어르신들이 각자의 인생을 약 15분의 스토리로 요약해 들려주는 시간이다. 김영현 유알아트 대표는 “여기에는 농사를 짓는 분도 계시고 인근 공장에 다니시는 분들도 계신데 공통점은 나름의 즐거운 삶과 문화를 만들어 가고 있다는 점”이라며 “사람책과 같이 삶을 기록하는 건 ‘당신의 삶이 예술일 수 있다’는 응원의 방식이다”라고 설명했다.
“사실상 지방에서의 전략은 인구를 ‘지키는 쪽’에 가까워요. 이때 농촌으로 들어와 사람들과 부대끼며 마을을 만들어 가고 사람마다, 마을마다 다른 문화를 형성하는 과정 자체가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내는 힘이죠. 그러한 사람들이 하나, 둘 모였을 때 마을과 지역의 재생이 가능해진다고 믿습니다. ‘삶의 재생’이 먼저죠.” - 지선영 평생학습담당
북삼읍 숭오 2리에는 ‘시를 먹고 자란 단감’ 마을이 있다. 칠곡 인문학마을에서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는 ‘생활 예술인’들이 자그마치 300명이 넘는다. 이들이 만들어낸 작품을 거리 곳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 또 하루 세 번씩 스피커를 통해 주민들의 시가 낭독되는데 오롯이 이 마을 특산물인 단감을 위한 작업이다.
숭오 2리에선 마을 주민 중 일부가 마을 해설사가 돼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함께 마을 한 바퀴를 돌다 보면 집집마다 몇 대에 걸친 재미난 사연과 역사를 들을 수 있다. 마을 해설사 박태분 씨는 “처음에는 무슨 시를 쓰나 했는데 지금은 과제가 없어도 가끔 잠 안 오는 밤에 시를 쓰곤 한다”며 “이렇게 들어주는 사람들도 있고, 지금이 내 인생의 가장 찬란한 봄이다. 못하게 하면 어쩔 수 없지만 할 수 있을 때까지는 시를 쓰고 싶다”고 했다.
한송이 인문사회연구소 연구팀장은 칠곡 인문학마을이 지속되는 비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평생학습 시스템을 통해서 마을 살이에 대한 동기 부여가 돼 있었고 한 명의 마을 리더에서부터 다수의 주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필요성에 대해 공감대를 형성하기까지 오랜 시간을 공들였어요.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즐거운 마을을 만들어보자는 게 전부였죠. 궁극적으로 우리가 살고 싶은 도시는 어떤 곳인가에 대해 서로 이해하고 설득하는 과정이고 그렇게 누가 오더라도 즐겁게 지낼 수 있는 마을이 되자는 공동의 목표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보통 재생사업을 한다고 하면 우리 지역의 독특한 역사가 무엇인지 생각을 하고 화려한 건물을 짓거나 상가를 활성화하는 쪽이 되지만 그것이 실제 주민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력을 끼치는지는 생각해봐야 할 대목이에요. 역사라는 게 대단히 훌륭한 조상이 있어야만 만들어지는 것일지. 박제화된 역사가 아닌 지금 살아 있는 나의 역사가 더 의미 있고 박수 받아야 마땅하다는 사실을 지난 5년간의 마을 살이를 통해 깨달았어요. 특색 없는 지역에도 문화와 역사가 꽃필 수 있고, 그것은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통해 나온다는 아주 단순한 메시지입니다.” - 지선영 평생학습담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