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노트]강한 남자 지우기

[한경 머니=한용섭 편집장] 한 남자가 있습니다. 50줄에 접어든 그는 한때 잘나가는 카피라이터로 재벌가의 사위였지만 가족에게 배신을 당한 뒤 굳게 마음을 걸어 잠급니다.

회사에서는 직원들에게 독설을 날리는 까칠한 보스이지만 말기 암 판정을 받은 뒤 시한부 인생을 사는 그에게 남은 건 늙고 병든 반려견뿐인 듯 보입니다. 40년도 넘은 구형 벤츠를 고집스럽게 몰고 다니고, 냉장고 반찬 하나하나에 라벨링을 해 놓을 정도로 꼼꼼한 남자 앞에 한 여자가 나타납니다.

항공사 스튜어디스로 일하다가 10년 전 아이를 잃고 이혼까지 한 그녀는 수면제 없이는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는 고달픈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인생의 절벽 끝에서 만난 두 중년. SBS TV 드라마 <키스 먼저 할까요?>의 두 주인공 손무한(감우성 분)과 안순진(김선아 분)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못 놀고 살았잖아요. 여행도 가고 맛있는 것도 먹고 영화도 보고 남들 하는 거 우리도 해봐요. 그만 열심히 삽시다, 우리.” 극중 손무한이 안순진에게 건넨 말입니다. “그만 열심히 삽시다”라는 말 한마디에는 내일을 위한답시고 오늘의 희생을 강요당하며 살아온 보통 중년들의 회한이 가득 묻어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좀 우습지만 남자들에게는 ‘울어선 안 되고, 늘 강해야 한다’는 잘못된 강박관념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중년이 돼 주책없이 흐르는 눈물을 부끄러워할 때도 많죠. ‘소리 내어 울지 않고 가슴으로 울어야 진짜 남자’인 줄로만 믿고 살아온 탓이겠죠.

한번은 대형 증권사의 임원을 하고 있는 친구에게 가족들과 함께 봤다는 영화 <국제시장>의 뒷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노인이 된 주인공 덕수(황정민 분)가 한국전쟁 때 헤어진 아버지를 회고하며, “나도 힘들게 살았다. 이만하면 가족들을 잘 건사하겠다는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킨 것 아니냐”고 울먹거리는 대목이 자꾸 생각나 영화가 끝난 뒤 1시간 넘게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마치 망가진 수도꼭지처럼 뜬금없이 눈물을 쏟아내는 아버지의 모습에 가족들은 상당히 당황했을 테지만 도대체 그 눈물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었을까요.

오랜 시간 동안 자신 속에 꾹꾹 눌러 담아 왔던 삶의 짐, 가족들에게 처진 어깨를 들키지 않기 위해 억지로 ‘강한 남자’ 코스프레를 해 온 미련함을 이제는 정리해야 되지 않을까요. 한경 머니는 4월호에서 ‘중년의 미니멀 라이프’를 다뤘습니다. 쓸데없는 것들을 비워내야 그곳에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을 채워 넣을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되새겨본 것입니다.

앞만 보고 정신없이 달려온 삶을 천천히 둘러보고 그 한켠을 잠시 비워 그 자리에 삶의 주인으로서 ‘나’를 채워보시죠. 결국 세상은 점점 복잡해지고, 새로운 것들로 넘쳐 나겠죠. 하지만 그것들을 끊임없이 좇기보다는 조금씩 내려놓고 비워내서 단순하게 살다 보면 소소한 행복은 일상의 풍경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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