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KB 이어 하나사태?…반복되는 CEO 자격 논란
[한경 머니=공인호 기자] 지난해 말 우리은행의 내홍이 촉매제가 됐던 은행권 채용비리 파장이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불확실성의 확장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금융지주 회장의 임기 만료와 맞물린 노사 갈등, 퇴행적 관행, 불투명한 지배구조 등이 복합적으로 맞물린 결과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은행권 특유의 ‘대리인 문제(agency problem)’로 인한 최고경영자(CEO) 리스크가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는 점이다.지난 3월 국내 금융권에서는 금융감독당국 설립 이래 전례가 없는 핵폭탄급 이슈가 터졌다. 금융감독원과 민간 금융사인 하나금융지주와의 신경전에서 결국 당국 수장의 옷이 벗겨진 것이다. 최흥식 금융감독원장은 2013년 당시 하나금융 사장 시절 이뤄진 채용청탁 의혹이 불거지자 사흘 만인 3월 12일 사퇴 의사를 밝혔다. 최 원장의 사표는 채용비리 의혹에 부담을 느낀 청와대에 의해 곧바로 수리됐지만, 금감원장의 초단기(6개월) 낙마를 둘러싼 후폭풍은 좀처럼 잦아들 기미가 안 보인다.
◆ 금감원장 낙마…당국보다 센 하나금융?
사실 금융권에서는 지난해 최 전 원장의 취임을 둘러싸고 여러 우려와 의구심이 혼재돼 있었다. 민간 출신이라는 이례적 전력도 입길에 오른 이유였지만 무엇보다 김정태 현 하나금융 회장과의 불편한 관계를 둘러싸고 ‘돌발 사태’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컸다.
최 전 원장은 MB 정부 당시 김승유 전 하나금융 회장과의 인연으로 하나금융연구소장으로 영입돼 지주사 사장까지 오른 인물이다. 김 전 회장은 이명박 전 대통령의 최측근 인사로 당시 금융계 ‘4대 천황’ 가운데 한 명으로, 최근 이 전 대통령 측에 수십억 원의 뇌물을 건넨 것으로 밝혀진 이팔성 전 우리금융 회장과 KB금융 회장을 지낸 어윤대 전 회장 모두 ‘고려대’를 공통분모로 하고 있다.
이후 KB금융은 정부의 잦은 인사 개입에 따른 내홍(KB사태)에 휩싸였고, 우리금융은 민영화 추진 과정에서 지주사 체제가 해체됐다. 유일하게 하나금융만이 김승유-김정태로 이어지는 후계구도를 완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김정태 회장 체제 이후 김승유 전 회장의 측근 인사가 줄줄이 낙마했고 최 전 원장 역시 희생양이 됐다는 후문이 파다했다. 일반적인 오너 기업과 달리 국내 은행의 경우 은산분리 규제로 인해 소유와 경영이 철저히 분리돼 있으며 지주사 회장의 입맛대로 경영진이 교체되는 일이 반복돼 왔다. 전문경영인이 주인 행세를 하는 대리인 문제에서 비롯된 폐습이다. 과거 금융권 ‘사태’(KB사태, 신한사태) 역시 1인자와 2인자 간 권력 역학관계에서 비롯된 문제였다.
무려 7년 가까이 1인 중심의 체제 유지에 힘써 온 하나금융으로서는 예상치 못한 ‘복병’이 최 전 원장이었던 셈이다. 실제 최 전 원장이 등장한 이후 김 회장의 연임을 확실시했던 기류도 급반전 양상으로 흘렀다. 최 전 원장은 취임 직후인 지난해 11월부터 KB금융과 하나금융의 불투명한 지배구조를 문제 삼기 시작했는데, 금융권에서는 김 회장의 3연임을 막으려는 최 원장의 ‘설욕전’으로 보는 시각이 존재했다.
지난해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서의 인사 전횡 논란에서 가까스로 한 발 비켜선 하나금융은 창조경제 1호 기업인 아이카이스트 특혜대출 및 언론 통제 의혹 등에 휩싸였고, 결국 ‘찍히면 죽는다’는 채용비리 확전으로 치달았다. 하지만 양측의 진흙탕 싸움은 결국 최 원장의 중도 낙마로 결론이 났고, 이 같은 결과를 가져온 반격 카드는 권력 암투의 ‘완결판’이라는 세평까지 나온다.
이와 관련, 금감원은 하나금융 및 KEB하나은행의 채용비리 혐의에 대한 무기한 조사에 나선 상태지만, 관련 의혹을 규명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최 전 원장의 하나금융 재직 기간인 2013년은 지난달 검사 과정에서는 이미 자료가 폐기된 것으로 파악됐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하나금융은 내부 유포설에 대해 손사래를 치고 있지만, 최 전 원장의 낙마설을 둘러싼 풍문은 하나금융 안팎에서 꾸준히 흘러나온 바 있다.
일단 표면적으로는 3연임을 못 박은 김 회장이 승기를 잡은 모양새지만 안심하기에는 이르다. 경영진 퇴진을 요구하는 노조의 목소리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 데다 김 회장 역시 과거 친인척 채용비리 의혹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최 원장이 단순 ‘추천’만으로 옷을 벗었다는 측면에서 채용비리의 파급력은 더욱 커졌다”며 “다만 민간 금융사에 금감원장과 같은 수준의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지나치다는 시각도 상존해 있는 것도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 KB·우리도 ‘채용비리’…신한 ‘남산 3억 원’
채용비리와 지배구조를 둘러싼 논란은 비단 하나금융에만 국한된 얘기는 아니다. KB금융 역시 금융당국으로부터 지배구조 개선 압박을 받아 왔다. 또 KB금융 노조는 ‘과도한 업무 강도’ 등을 이유로 윤종규 회장의 퇴진을 요구하며 천막농성을 이어가고 있으며, 윤 회장 역시 친인척 채용 특혜 의혹으로 압수수색까지 받은 처지다.
다만 KB금융의 경우 당국과 하나금융과의 갈등 과정에서 불똥이 튄 사례라는 시각도 있다. 윤 회장이 김정태 하나금융 회장과 동시에 임기 만료를 맞으면서 금융당국의 표적지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실제 그동안 금융당국의 날선 발언은 유독 KB금융과 하나금융을 겨냥한 듯 비쳐졌다. 우리은행의 경우 과점주주 형태를 띠고 있어 지배구조 문제에서는 상대적으로 자유롭지만, 신한금융과 NH농협금융의 경우 번번이 논란을 피해 갔다. NH농협금융과 신한금융의 경우 핵심 주주가 각각 농민과 재일교포 주주라는 점이 배경이 됐다는 해석에 무게가 실린다.
공교롭게도 올 초 진행된 금융당국의 채용비리 전수조사에서도 신한은행과 NH농협은행에서만 단 한 건도 발견되지 않아 ‘치밀한 관리 능력’이라는 세평과 함께 다양한 뒷말을 낳기도 했다.
다만 하나금융과 달리 KB금융의 경우 이른바 ‘하나사태’가 마무리되는 대로 논란의 중심에서는 벗어날 것이라는 기대도 나온다. 노동이사제 도입 등을 둘러싼 노사 갈등은 한동안 이어질 수 있겠지만 노조 측 반발을 ‘관치(官治)에 기댄 노치(勞治)’로 바라보는 시각이 팽배하기 때문이다. 윤 회장으로서도 채용비리 논란에서 보다 자유로워질 경우 노사 갈등 해소에 더 적극적으로 나설 것으로 보인다.
채용비리 사태의 진앙지인 우리은행의 경우 이광구 전 은행장에 대한 검찰조사가 진행 중인 만큼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최근 이팔성 전 우리금융 회장이 수사 선상에 오른 점은 평판리스크를 키우는 요인이지만, 이미 경영진이 대거 교체된 만큼 후폭풍을 우려하는 시각은 많지 않다.
오히려 세간의 관심은 신한금융으로 향할 수 있다. 현재까지는 채용비리 무풍지대였지만 과거 내부 권력 암투인 신한사태의 주역인 라응찬 전 회장이 ‘남산 3억 원’ 사건과 관련해 재조사 대상에 올랐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MB 정부 출범 직전 라 전 회장 측이 서울 남산 인근에서 정권 실세에게 3억 원을 건넸다는 의혹이다. 조사 결과에 따라 언제든 신한사태와 관련된 악몽이 재연될 수 있는 상황이다.
사실 이 같은 악재는 신한금융이 넘어야 할 벽이기도 하다. 지난해 신한금융의 차기 리더 선임을 놓고 라 전 회장 핵심 라인으로 분류된 인사들이 주로 거론되자 정치권과 민간단체까지 나서 잇단 공세를 퍼부었다. 결국 조용병(신한금융 회장)-위성호(신한은행장) 체제로 일단락 됐지만 이를 두고 일부 금융권에서 신한사태와 결별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걷어찼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는 것은 깊이 새겨봐야 할 대목이다. 또 지난해 10년 가까이 지켜온 ‘리딩뱅크’ 자리를 KB금융에 빼앗기면서 리더십에 대한 위기론도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실제 라 전 회장의 뒤를 이은 한동우 전 회장은 외연확장보다는 조직 안정화에 경영의 무게중심을 두고 6년 임기를 지냈고, 뒤를 이은 조용병 회장도 정중동 리더십으로 조직을 이끌고 있다. 위 행장의 경우 상대적으로 강한 추진력을 인정받고 있지만 리딩뱅크 탈환은 쉽지 않은 과제이기도 하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KB금융의 경우 KB사태를 극복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경영에 반영된 반면 신한금융은 리더십 재건 과정이 봉합 수준에 그쳤다”며 “최근 은행권의 판도 변화는 리더십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사례가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 말 많은 은행권 지배구조, 개선책은
한편, 금융당국은 국내 은행권에 만연한 대리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배구조 개선의 고삐를 더욱 조인다는 방침이다. 경영진이 자신의 자리 보존과 임기 연장을 위해 은행 자원을 오용하는 사례가 갈수록 빈번해지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단적인 사례로 하나금융 노조는 김 회장의 연임을 반대하는 이유로 업무상 배임증재죄의 성립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자신의 연임을 위해 은행의 마케팅 비용을 무분별하게 오용했다는 것이다. 올 초 KEB하나은행 노조는 “김 회장이 하나은행의 광고비를 자신을 위한 언론 통제에 사용했다면 하나은행의 이익에 반해 부당하게 경영에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은행법 위반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3월 주주총회를 앞두고서는 해외 의결권 자문사인 ISS와 달리 국내 자문사인 서스틴베스트와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조차 김 회장의 연임에 대해 ‘반대’를 권고하는 이례적 보고서를 내놔 눈길을 끌었다.
여타 은행들 역시 CEO의 연임 과정에서 자신의 측근을 이사회 멤버로 앉히는가 하면, 투명한 후계 시스템을 마련하는 데도 소홀하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이는 은행 경영진들에 대한 평가가 일반 제조업과 비교해 절대적으로 관대한 편이라는 점이 주된 요인이 되고 있다. 실제 국내 은행의 경우 예대마진 위주의 천수답 경영 탓에 대다수 은행의 실적 추이가 유사한 흐름을 보여 왔다. 금융당국이 CEO의 자격 요건을 더욱 구체화하겠다고 나선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위기가 닥쳤을 때는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연임을 보장받는가 하면, 지난해와 같이 실적이 일제히 개선되면 CEO 개인의 경영 성과로 인정받는 일이 일반적 패턴으로 굳어진 지 오래다. 임기 중에 횡령, 배임과 같은 법적 문제만 일으키지 않으면 많게는 수십억 원의 성과급과 연임을 사실상 보장받는 구조인 셈이다. 올해 임기 만료를 앞둔 은행권 수장들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실적 개선과 이로 인한 주가 상승을 임기 연장의 지렛대로 활용하고 있다.
실제 KB국민, 신한, KEB하나, 우리은행 등 국내 4대 은행은 예대마진 확대 덕분에 지난해 이자마진으로만 20조 원을 벌어들였다. 사상 최대 규모의 실적을 올린 각 은행들은 ‘노조 달래기’ 등을 이유로 기본급의 최대 200%가량을 직원 성과급으로 지급해 눈총을 사기도 했다.
이와 관련, 은행권 내부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이제는 은행들도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창출할 수 있는 기업가형 회장과 은행장을 선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3월 임기를 마친 신성환 전 금융연구원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국내 은행이 이익을 많이 냈다고는 하지만 경영진이 잘해서 이익이 난 부분은 비용 절감 부분에 불과하다”고 꼬집었다.
은행 자산이 급격히 증가한 것은 부동산 호황에 따른 가계대출 증가세에 기인하고 있으며, 순이자마진(NIM) 개선 역시 은행들이 위험관리를 잘했다기보다 경영 여건이 생각 외로 호전되면서 연체율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그는 “CEO가 관리만 잘하면 된다는 시각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며 핀테크, 고령화 시대를 맞아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 수 있는 기업가형 CEO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일러스트 허라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