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g story] 초콜릿은 ‘먹는 보석’…의미 담기 좋은 선물”

[한경 머니 = 이동찬 기자]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명대사다. 실제로 초콜릿 상자 하나로 인생이 바뀐 사람이 있다. 바로 국내 최초의 쇼콜라티에, 김성미 한국쇼콜라티에협회장이다. 그가 생각하는 초콜릿과 한국 초콜릿 시장의 나아갈 방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사람은 매일 먹어야 살기 때문에 음식에 대해 예민할 수밖에 없다. 모두 자신이 먹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을 갖고 있고, 흔히 ‘음식 전문가’라 불리는 사람은 셰프부터 먹방 BJ(Broadcasting Jockey)까지 다양하다. 또 특정 음식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은 그 사람이 속한 문화가 발전되지 않았다는 오해까지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 경계에 초콜릿이 있다. 지금은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지만, 여전히 우리는 초콜릿이 낯설다. 식후 초콜릿을 먹는 것은 어색하고, 오히려 초콜릿보다는 커피가 더 친근하며, 쇼콜라티에라는 직업은 모호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초콜릿에 의미를 담는다. 그 달콤함에 위로 받기도 하고, 예쁘게 장식된 초콜릿을 보면서 소중한 사람을 떠올리기도 한다.

이 기현상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국내 첫 쇼콜라티에이자 한국쇼콜리티에협회장으로 있는 김성미 대표를 만났다. 단순히 국내 1호라서가 아니라, 17년이라는 세월 동안 오롯이 초콜릿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강산이 대략 두 번 바뀐 시간 동안 초콜릿과 관련된 여러 사람들을 만났을 테니 그들이 생각하는 초콜릿의 의미에 대해서도 통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초콜릿을 모르는 것에 대한 콤플렉스가 쇼콜라티에가 되는 발단이 돼 현재 그 누구보다 초콜릿을 잘 아는 그. 김성미 협회장에게 초콜릿에 대해, 사람들이 생각하는 초콜릿에 대해, 그리고 그가 생각하는 한국의 초콜릿 시장에 대해 물었다.


쇼콜라티에라는 단어, 우리나라에서는 좀 생소한데요.
“쇼콜라티에는 초콜릿과 관련된 모든 것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작은 의미로는 초콜릿을 만드는 사람이 될 수 있지만, 초콜릿을 만드는 가게, 초콜릿 회사 등도 쇼콜라티에가 될 수 있죠. 우리에게 친숙한 브랜드들이 엠블럼 하단에 쇼콜라티에를 붙이는 이유도 그 때문이에요. 아마 프랑스어에서 파생된 단어라서 좀 생소하게 느껴질 겁니다.”

사실 흔하지 않은 직업이죠.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저는 1989년에 일본으로 유학을 갔는데, 1988년 서울 올림픽이 끝나고 해외 자율화 여행이 허용된 첫 세대였습니다. 20대 초반이라는 나이와 그 감성은 열망에 가득 차 새로운 문물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기에 충분했죠. 일본에서 제 전공이었던 사회학을 공부하던 중에 우연히 1990년에 영국으로 어학연수를 받을 기회가 생겼어요. 그때 초콜릿에 대해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토론 시간에 친구들이 1시간 동안 초콜릿에 대해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저는 ‘나도 초콜릿 좋아해’라는 한 마디밖에 못했는데 말이죠. 그게 너무 자존심이 상하고 창피해서 초콜릿 하나는 제대로 알고 귀국하자고 결심했습니다. 다른 친구들이 유럽 일주를 할 때, 저는 벨기에와 스위스, 프랑스 등 초콜릿이 유명한 나라들만 골라 다녔어요. 하지만 그때에도 이걸 직업으로 택할지는 예상도 못했죠.”

그럼 쇼콜라티에를 언제 시작하신 건가요.
“누구나 대학을 졸업하고 전공을 따를지, 아니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지 기로에 서게 되죠. 저는 둘 중에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니 저는 초콜릿을 좋아하더라고요. 하지만 제가 유학을 다녀오고 나서도 여전히 한국은 초콜릿과 관련된 모든 것이 생소한 나라였어요. 그 당시 한국은 제과점을 차리는 것이 유행이었는데요, 저는 당연히 제과제빵을 배우면 초콜릿에 대해 배울 수 있을 줄 알았어요. 하지만 그게 아니더라고요. 결국 다시 유학길에 올랐죠. 그게 제 나이 서른네 살이었어요.”

국내 최초 쇼콜라티에로서 고난과 역경이 많았을 거 같아요.
“1호의 숙명이 그런 것 아닐까요. 대중화가 되려면 관련 직업을 가진 사람이 많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1호는 판매부터 교육, 문화 교류 등 모든 분야를 혼자 다 치러야 합니다. 돈을 벌어도 재투자를 해야 하고, 남들이 가보지 않은 곳도 가야 해요. 저는 심지어 카카오 열매를 보기 위해 아프리카와 콜롬비아까지 다녀왔어요. 책으로 보는 건 충분하지 않으니까. 결국 무엇인가를 시작하는 사람은 다른 이들과 공유할 수 있는 것들을 스스로 개척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어요.”

과거에 비해서 초콜릿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달라졌나요.
“한국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어려운 시기에 초콜릿이 유입됐어요. 여전히 어르신들은 초콜릿이 귀하다고 생각하시죠. 기성세대들에게 초콜릿은 아직도 생소한 음식입니다. 한국에선 초콜릿이 독자적으로 가기엔 시간이 오래 걸려요. 초콜릿은 식문화와 함께 가니까. 당이 많이 포함된 한국 음식으로 식사를 한 뒤 또 당분을 먹는 건 부담스럽죠. 저마저도 손님이 오면 ‘커피 드실래요?’ 하지, ‘초콜릿 드실래요?’ 하지는 않거든요. 하지만 젊은 세대는 그렇지 않아요. 초콜릿을 마셔도 보고 먹어도 봤기 때문에 거부반응이 없죠. 이를 희망적으로 보고 있어요.”

오랫동안 초콜릿을 다루셨으니 많은 사람들을 만나셨을 것 같아요.
“다양한 쇼콜라티에 교육생을 만나봤는데요, 장애를 갖고 있거나 몸이 아팠던 분들이 기억에 오래 남아요. 한 청각 장애인은 제 입술만 보고 수업을 들었는데, 너무 즐겁게 초콜릿을 배우더라고요. 백혈병을 앓고 있던 친구는 지금 저처럼 쇼콜라티에 과정을 가르치고 있어요. 사실 몸이 아프거나 장애가 있다면 일반적인 사람들이 겪지 못하는 부분에서 상당히 예민하기 마련이죠. 그런데 초콜릿이 그들에게는 큰 위안이 된다고 하더라고요. 자기가 만든 초콜릿을 보고 사람들이 환호했을 때, 또 자신이 환자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초콜릿에 대해 가르쳐준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 그들은 엄청난 뿌듯함을 느낀다고 해요.”

사실 다른 디저트보다 초콜릿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초콜릿은 역사가 깊죠. 초콜릿은 고급스러운 이미지와 귀족적 태생을 지녔어요. 초콜릿 원료 자체가 값어치가 있거든요. 처음 신대륙에서 유럽에 소개됐을 때도 귀족층만 누렸던 음식이기도 하고요. 초콜릿은 영원히 저렴할 수 없는 존재예요. 그래서 선물하기 좋다고 하죠. 이는 곧 비싸서 자신이 갖기에는 부담스럽고, 누군가에게 의미를 담아주기 좋다는 말이에요. 하지만 초콜릿의 가장 큰 매력은 대체 불가한, 특유의 달콤 쌉싸래한 맛입니다. 우리가 커피를 끊을 수 없는 것처럼 초콜릿은 디저트의 마지막 정점이라 생각해요. 초콜릿은 또 ‘먹는 보석’이라 불릴 정도로 예쁘기도 해요. 예술적으로도 다양한 변신이 가능하기 때문에 크리에이티브한 측면이 필요한 분야입니다. 샤넬이나 불가리와 같은 수많은 럭셔리 하우스들이 자신들만의 초콜릿 숍을 가지고 있는 것도 그 이유죠.”

협회장님에게도 초콜릿이 더 특별하죠.
“초콜릿은 저에게 인생이죠. 쇼콜라티에를 하면서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났고, 또 그들이 카페를 창업해 성공하고, 혹은 저처럼 쇼콜라티에를 양성하는 과정들을 보면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저는 항상 그들이 잘 되기를 바라요. 그게 곧 제가 살아가는 틀이거든요. 제가 가르쳐서 퍼뜨리는 게 달콤한 초콜릿이어서 더 근사하고,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럼 협회장님이 받은 초콜릿 중 가장 의미가 깊은 것은 무엇인가요.
“영국 어학연수 중 제가 충격을 받았던 그 1시간짜리 초콜릿 토론이 끝난 후였어요. 한 친구가 제게 초콜릿 상자를 건네더군요. 자기 나라에서 먹는 유명한 수제 초콜릿이라면서요. 지금은 그 초콜릿이 어떻게 생겼는지, 무슨 맛이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아요. 하지만 그 초콜릿 상자가 지금의 저로 이끌었다 생각하니 의미가 깊죠.”

김성미 협회장이 제작한 하트셸
김성미 협회장이 제작한 화병 모양 초콜릿 아트
초콜릿의 한국화에도 힘쓰신다고요.
“처음에는 정통 초콜릿만 취급하고, 초콜릿 아트를 하는 등 비주얼적인 면을 고집했어요. 하지만 그 당시의 한국은 그런 문화를 받아들이기에는 초콜릿이 대중화가 되지 않은 상태였어요. 심지어 제가 처음에 고집한 오리지널 초콜릿을 보고 사람들은 맛이 없다고 평가했으니까요. 그들의 의견을 듣고 다시 만든 초콜릿은 오히려 맛있다는 평가를 받았어요. 그때 깨달았죠. 자기가 아는 것만 고집하면 성장을 할 수 없다는 걸요. 초콜릿을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 제 안목이 넓어지고, 저의 초콜릿은 더 풍부해졌어요. 그게 바로 초콜릿의 한국화이자, 한국 초콜릿 세계화의 시작이라 생각해요. 신기한 건, 외국인들은 이를 알아차린다는 거죠. 제 카페에 왔던 외국 손님들은 초콜릿이 한국적이라고 말하더군요. 결국 인삼이나 대추와 같은 한국적인 재료를 배합해서 한국화가 되는 게 아니라 한국 사람이 만든,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초콜릿이 한국화라는 것을 깨달았죠.”

한국 초콜릿 시장의 변화와도 직결되는 것 같은데요.
“커피 시장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옛날에는 다방에서 타 먹던 믹스 커피가 전부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너무 다양하잖아요. 심지어 한국에서 월드 바리스타 대회가 개최될 정도죠. 초콜릿도 이러한 발전 가능성을 무궁무진하게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세계화라고 해서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한국에서 1시간만 가면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가 있죠. 중국 사람들은 단 음식을 훨씬 좋아해요. 한국 커피 시장은 이미 진출했으니 초콜릿도 곧 편승할 거라 생각해요.”

끝으로, 협회장님만의 목표가 있나요.
“‘쇼콜라티에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밥을 먹고 사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요. 아직은 쇼콜라티에라는 직업을 모를 뿐만 아니라 ‘초콜릿 갖고 생계가 유지되느냐’와 같은 말을 많이 듣거든요. ‘어떤 초콜릿을 만들어요’ 아니면 ‘현재 초콜릿의 트렌드가 무엇인가요’와 같은 질문이 나오려면 아직은 시간과 노력이 더 필요해요. 처음에는 조급한 생각으로 초콜릿 박물관이나 카페 등 이것저것 많이 해보고 싶었는데, 이제는 조금 기다릴 줄 알게 된 것 같아요. 저는 초콜릿을 배우려는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그들이 쇼콜라티에라는 직업으로 발전하기를 바랍니다. 관련 종사자가 많을수록 그 산업은 성장하기 마련이니까요. 그럼 모두 같이 잘살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김성미 협회장은…
2000년 영국 런던 르 코르동 블뤼 졸업
2001~2008년 수원여대 제과제빵과 외래교수
2008~2011년 백제예술대 외래교수
현 쇼콜라티에코리아(주) 대표
현 한국쇼콜라티에협회장


사진 이승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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