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드리아해의 진주 ‘두브로브니크’

[한경 머니 기고=이석원 여행전문기자] 크게 떨리는 목소리의 짙은 소프라노 선율. 음탕한 로마 경찰청장 스카르피아의 욕정 가득한 눈길에 진저리가 난다. 그러나 자신의 말 한 마디에 사랑하는 애인 카바라도시의 목숨이 달렸다. 벌레보다 더 징그러운 스카르피아에게 몸을 허락하고 카바라도시를 살릴 것인지, 스카르피아를 거부한 후 카바라도시와 함께 죽을 것인지. 토스카의 절박한 심경이 밀카 테르니나(Milka Ternina)의 성대를 유연하게 타고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Vissi d’arte, vissi d’amore)’가 된다.

[스르지산 정상 전망대에서 본 두브로브니크. 두브로브니크를 홍보하는 가장 일반적이고 핵심적인 사진이다.]

자그레브(Zagreb)의 오래된 레코드 가게 안에서 흐르는 아리아가 마치 100여 년 전 런던 코번트 가든 왕립오페라극장(Covent Garden Royal Opera House)에 올린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 무대에 선 당시 그녀의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흐릿해진 정신 탓일까? 도시가 품은 오래된 향기를 고스란히 들이마시고 난 후 몽롱함은 그저 기분 탓만은 아니리라.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의 랜드마크이자 스카이라인을 형성하는 자그레브 대성당. 1093년 건설하기 시작해 1102년에 완공됐다. 두 개의 첨탑 중 북쪽 탑이 105m, 남쪽 탑이 104m다.]

[두브로브니크 거리의 화가가 그린 두브로브니크 전경.]

[두브로브니크 여행의 참맛 중 하나는 좁고 긴 골목 투어다. 구시가를 혈관처럼 연결하고 있다.]

자그레브의 심장이라는 반 옐라치치 광장에서 시작된 발걸음이 좁은 골목을 굽이굽이 돌아 그라데츠(Gradec) 언덕을 따라 올라간다. 로트르슈차크탑의 제법 높고 낡은 계단을 밟고 올라서면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좀 낯설다. 어찌 보면 흔한 유럽의 작은 도시 같기도 하지만, 또 다르게 보면 화려한 색감이 덜해 수려함이 부족한 듯도 하다. 저 건너편에 우뚝 선 자그레브 대성당의 뾰족한 두 개의 첨탑은 다음 발걸음의 이정표 노릇을 한다.

성직자들의 동네인 카프톨(Kaptol) 언덕에 이르면 제법 넓은 공간에 우뚝 선 자그레브 대성당을 마주하게 된다. 성 슈테판 대성당이라고도 불리는 이 성당의 쌍둥이 첨탑이 조금 전 로트르슈차크탑에서 본 그 이정표다. 100m가 넘는 높이의 대성당 첨탑을 올려다보며 그 자리에서 한 바퀴 돌면 이번에는 그보다는 낮지만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빛 성모 마리아가 나를 내려다본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 다시 반 옐라치치 광장으로 내려오는 길. 길 한편에 웅크리고 앉은 듯 낡고 자그마한 가게 안에는 세월 따위는 아랑곳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LP 음반들이 게으르게 늘어져 있다. 그리고 온통 크로아티아어로 돼 언제 만들어졌는지도 알 수 없는 밀카 테르니나가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를 흐느낀다.

[플리트비체에 있는 밀카 테르니나 폭포.]

[자그레브 대성당 앞에 설치된 황금 성모 마리아상.]

[이른 시간 플라차대로. 두브로브니크 구시가에서 가장 넓은 길이며 중앙로 역할을 한다. 길 양편의 건물들은 1667년 대지진으로 완전히 파괴된 것을 계획에 의해 재건한 것으로 주요한 상점과 식당들이 들어서 있다.]

[미국 HBO의 드라마 <왕좌의 게임>의 주요한 촬영 장소가 되기도 한 성모 승천 대성당 앞 계단.]

[두브로브니크의 오래된 거리에는 늘 거리의 연주자들이 여행자들의 발걸음을 잡는다.]

◆ 밀카 테르니나를 닮은 자그레브
런던과 뉴욕의 오페라 무대를 평정하고, 독일 바이에른의 바이로이트에 이르러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바그너 소프라노’라는 찬사를 받았던 밀카 테르니나. 마리아 칼라스도 범접하지 못했던 그녀가 오페라를 처음 시작한 자그레브는 오래된 LP판에서 들려오는 스크래치 소리를 닮았다. 20세기 후반 세계에서 가장 참혹한 전쟁을 겪었던 도시여서일까? 53세에 중풍을 맞아 더 이상 노래를 할 수 없었던 밀카를 닮은 듯하다.

그렇다고 해서 자그레브가 낡고 초췌하다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슬픈 전쟁의 흔적을 안고 있지만, 1000년 전에 세워진 자그레브 대성당을 스카이라인 삼은 도시는 중세의 모습을 간직한 채 빠르게 현대화하고 있기도 하다. 대성당 앞 높은 곳에서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자애로움을 자양분 삼아 말이다.

두브로브니크(Dubrovnik)로 가는 길, 밀카의 이름을 딴 플리트비체(Plitvice)의 한 폭포를 들러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폭포라는 표현이 정확할까? 그저 자그마한 여울목쯤으로 생각했는데 ‘밀카 테르니나 폭포’란다. 밀카의 강력하고 심오한 소프라노를 폄하한다는 분노쯤은 플리트비체의 천상비경으로 상쇄된다. 도대체 하느님은 이 절대비경을 만들어 놓고 어떤 흐뭇한 표정을 지었을까?

16개의 호수가 수십 개의 폭포로 연결된, 지상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비경인 플리트비체 호수 국립공원이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자연유산이라는 설명은 사족이다. 만약 이곳이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되지 않았다면 유네스코의 직무유기일 테니. 가까이에서 본 플리트비체가 선계라면 높고 먼 곳에서 본 플리트비체는 영화 <반지의 제왕> 엘프들의 리벤델이다.

[두브로브니크 항구. 할리우드 스타들을 비롯해 전 세계 부자들의 호사스러운 요트와 보트들이 정박해 있는 곳이다.]

◆ ‘진정한 천국’ 두브로브니크
짙푸른 아드리아해를 직면한 두브로브니크는 그 햇빛이 너무 찬란해 더 슬프다. 플리트비체가 하느님이 만들어 놓은 절경이라면, 두브로브니크는 인간이 만들어낸 찬란한 유산이다. 어느 자연이라서 아름답지 않을까? 그런데 거기에 인간이 없다면 그 아름다움은 무슨 의미일까? 그래서 두브로브니크는 자연과 인간이 공존해 진정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낸 곳이다.

1667년 대지진으로 도시의 90%가 파괴된 후 사람들이 도시를 그냥 버려두었더라면, 1991년 세르비아군의 맹폭격 앞에 프랑스 학술원장 장 도르메종 등 유럽의 지성들이 인간 방패를 자처하고 나서지 않았더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의 80%가 유고 내전으로 파괴된 채 그냥 방치됐더라면, 우리는 아드리아해의 빛나는 진주를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조지 버나드 쇼가 “진정한 천국을 보려면 두브로브니크로 가라”고 하지 않았더라도 두브로브니크는 아드리아해라는 찬란한 자연과 성채 도시라는 숭고한 인간 의지가 만들어낸 걸작이다.

이른 아침, 사람들의 발길이 한가한 두브로브니크 구시가 중심의 플라차대로. 스트라둔대로라고도 불리는 넓은 길의 돌바닥은 광채가 난다. 대지진 이후 똑같은 높이, 똑같은 모양으로 지어진 길 양쪽의 건물들은 오히려 획일적이지 않다. 실핏줄처럼 가늘고 길게 뻗어나간 좁은 골목들로부터 신선한 피를 수혈 받은 사람마냥 성채 도시의 안쪽은 지난밤의 충분한 휴식까지 더해 활기를 찾을 것이다.

두브로브니크의 성곽에 올라서면, 두브로브니크가 왜 자연과 인간이 만들어낸 걸작인지 알 수 있다. 2km 정도의 성곽길을 걷는 내내 오른쪽으로는 연신 쏟아지는 아드리아해의 눈부신 태양을 만끽하게 된다. 마치 스탕달 신드롬을 앓는 듯 똑바로 눈이 떠지지도 않은 채 다리가 휘청거리는 아찔함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다가 왼쪽으로 눈을 돌리면 두브로브니크의 주홍빛 지붕들이 또다시 눈 안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곳곳에 아직도 남아 있는 유고 내전의 처참한 흔적들이 슬프다. 그러나 그것들은 오히려 왜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해 인간은 삶에 헌신해야 하는지, 평화와 사랑을 지키지 못했을 때 어떤 참혹함이 우리를 지배하는지 절실히 느끼게 하는 알몸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도시도 자연의 일부가 돼 두브로브니크의 위대한 아름다움은 지극에 이른다.

[크로아티아 출신의 세계적인 소프라노 밀카 테르니나.]


[성곽 투어 중 만나게 되는 왼쪽 풍경인 구시가의 지붕들.]

◆성곽길에서 본 아드리아해
두브로브니크 성곽에서 본 도시가 아름다운 또 하나의 이유는, 거기에 지난 과거를 딛고 미래를 꿈꾸는 현재의 삶이 있기 때문이다. 지나가는 길 곳곳에 놓인 학교며, 가정집이며, 작고 아담한 가게며 그 속에서 숨 쉬는 인생들은 여행자의 눈길도 아랑곳 않고 그저 자신들의 현재를 힘껏 살아가고 있다.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에서 오페라 <토스카>를 마치고 돌아온 밀카가 두브로브니크로 휴가를 왔을 때 성곽에 올랐다. 몇 발짝을 움직였을까? 푸른 아드리아 바다가 처음 눈에 들어오는 순간 밀카의 다리가 휘청했다. 갑자기 아찔한 현기증이 나면서 몸이 무너졌던 것이다. 함께 거닐던 사람이 없었으면 쓰러지고 말았을 것이다. 성벽을 가슴에 안고 바다를 바라보던 밀카가 눈물을 흘리며 “여기가 내 나라의 땅 끝이구나” 했을 때 함께 있던 사람들은 그녀의 눈에서 심상치 않은 무언가가 보였다고 한다.

이후 바이로이트에서 바그너의 오페라로 절정의 기량을 자랑하던 밀카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두브로브니크 성곽길에서 본 아드리아해와 도시의 지붕 때문에 내 노래가 바뀌었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의 주요 무대인 웨스테로스의 항구 촬영이 이뤄지고 있는 곳.]

1916년 중풍으로 더 이상 오페라 무대에 설 수 없었던 밀카는 자신의 후계자로 찾은 젊은 소프라노 진카 밀라노프(Zinka Milanov)를 데리고 다시 두브로브니크를 찾는다. 인적이 드문 구시가의 한 골목에서 밀카는 진카와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에 나오는 아리아 ‘저녁 바람은 부드럽게(편지 이중창)’를 부른다.

중풍으로 인한 어눌한 발음의 밀카였지만 진카는 스승의 목소리가 지금 이 도시와 너무 닮았다고 생각했다. 훗날 메트로폴리탄을 통해 세계 오페라 무대에 데뷔한 진카도 두브로브니크를 일컬어 “나의 노래가 완성된 곳”이라고 했다니 크로아티아 출신 두 소프라노의 삶이 배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케이블카를 타고 스르지산에 오른다. 전망대 한쪽 옆에 세워진 하얀 십자가는 그 참혹했던 5년의 유고 내전으로 죽어간 이름 모를 수많은 생명들에 대한 넋 달램이다. 저 아래로 선명한 아드리아해를 배경으로 한 두브로브니크를 바라보며 다시는 이 땅에, 그 누구의 땅에도 전쟁의 참혹함이 인간을 파괴하지 않기를 바라는 희망이다.

불과 26년 전, 저 아드리아해에 떠 있던 세르비아 해군의 함포가 도시 곳곳은 물론 스르지산 이 꼭대기까지 불을 질렀다. 스르지산 정상에 떨어지는 포탄을 보며 놀란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것이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전쟁은 결코 인간의 삶을 끝장낼 수 없다. 결국 인간은 그 전쟁의 다음 페이지에서 새로운 삶을 위한 복원을 이룬다. 거기에는 과거의 문화도 있고, 현재의 예술도 있고, 미래의 삶도 있다.

아드리아해로 넘어가는 태양은 인간의 삶과 예술과 의지가 바닷속으로 영원히 지지 않음을 알려준다. 늘 그렇듯 다시 이 도시를 비치는 찬란한 영광이 될 것이라고 깊게 울리고 있다. 말카 테르니나의 노래처럼.

[아드리아해의 석양은 두브로브니크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다.]

[성곽길에서 본 플라차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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