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 ● Artist 김윤섭 소장의 바로 이 작가 - 박병일
[한경 머니 = 김윤섭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미술사 박사]
겨울을 닮은 그림이다. 그렇다고 세찬 눈보라나 차디찬 얼음장 같진 않다. 온 세상이 하얀 솜이불을 덮은 듯 오히려 포근하고 따뜻하다. 먹물 대신 흰 눈을 찍어 그린 것처럼 박병일의 붓끝에선 뭔가 모를 청명한 기운이 감돈다.
“모든 작업은 하나의 단색, 즉 수묵으로만 그립니다. 작품의 제작 기법은 하나하나의 점들이 모여 형상을 보여주는 방식입니다. 마치 레고블록을 조립해서 물체를 만드는 것과 비슷한 작업 방식이죠. 주로 저의 일상 속 풍경들을 그려 왔는데, 최근엔 ‘인왕산에서 노닐다’라는 테마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3년 전 신혼집을 지금의 서촌에 마련하면서 매일 인왕산의 다른 얼굴들을 만나게 됐지요. 그렇게 인왕산의 인상을 자연스럽게 화폭에 옮기고 있습니다.”
박병일 작가는 줄곧 흔히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일상의 표정을 채집해 왔다. 대개는 평범한 도심 풍경이 주를 이뤘다. 그런 작품에 제목으로 ‘breath’를 내세웠다. 숨 혹은 호흡의 의미를 담았다는 얘기다. 빌딩숲으로 빼곡한 도시의 ‘숨이 막히고 건조하다’는 인상을 의식한 듯하다. 박 작가의 해법은 ‘도심 공간에 숨통을 트여주자’는 것이다. 그의 그림에서 유독 흰 여백의 작은 선과 면들이 많이 보이는 이유다.
여백은 동양 미학의 백미다. 비움의 철학이야말로 채움의 번잡함을 단숨에 포용한다. 한국화를 전공한 박 작가 역시 숨 막히는 도심에서 여백을 찾아냈다. 담묵(淡墨)으로 묘사된 빌딩숲 사이사이를 작은 굵기의 ‘여백 선들’로 처리했다. 물론 텅 빈 하늘이나 강물은 전통산수화에서도 비워 둔다. 흔히 공기나 바람, 물, 구름, 안개 등 분명 ‘존재는 하되 제대로 구현할 수 없는 자연적 대상’을 여백으로 처리한 것이다. 그런데 그의 화법은 좀 남다르다.
박 작가의 도심 풍경 <숨(breath)> 시리즈에서의 남다른 매력은 ‘여백 개념의 현대적 재해석’에 있다. 전통적이고 관례적 대상의 여백 처리나 빌딩의 조형적 표현을 위한 드로잉선 여백 외에도 도로와 나무들(가로수를 포함한)을 여백으로 해석했다. 상식적으론 두 요소를 오히려 진하게 처리했다면, 나머지 담묵으로 처리한 빌딩숲들이 더 견고하게 돋보였을 텐데 말이다. 왜 그는 도로와 자연 숲을 여백으로 해석했을까?
이러한 처리 방식에서 박 작가의 도심을 바라보는 관점도 짐작할 수 있을 듯 싶다. 빼곡하게 들어찬 건축 공간은 아무래도 갇힌 느낌이라 답답함이 앞선다. 하지만 그 앞에 선 나무들을 통해 공기의 흐름이나 바람의 연주 소리까지 만나게 된다. 그보다 더 마음이 포근해지는 힐링이 또 어디 있을까. 어쩌면 도심 속 나무와 숲의 존재감은 조경 역할을 넘어, 도심을 숨 쉬게 하는 허파 기능과도 같다. 지친 현대인 역시 그 나무들 사이에 난 도심 속 길을 걸으며 잠깐이라도 삶의 여유를 되찾는다. 그러고 보니 박 작가의 여백이 더욱 정겹게 다가온다.
최근작 <풍경(landscape)> 시리즈 중에는 매화 작품이 참 인상적이다. 결혼해서 자리 잡은 인왕산 밑자락 서촌마을 살림집 앞의 매화를 그린 것이다. 야지(野地)의 야생 매화여서 손질도 안 됐다. 그래도 제멋대로 쭉쭉 뻗은 가지엔 매화꽃이 만발했다. 이 역시 그림 속 주인공인 매화나무는 온데간데없고, 그 너머의 고즈넉한 기와집이나 현대식 주택들만 화면을 채웠다. 그런데 그 모습이 더 매화답다. 마치 생략된 매화나무 흔적의 여백 덕분에 온 도심에 매화 향이 가득한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제 작품을 만나는 많은 관람객들은 먹색이 편안하고 따듯하게 느껴진다고 합니다. 작품 속의 담담한 먹색 기운과 현대 도시의 시끄러운 요소들을 중화시키는 여백 처리 표현이 도시의 새로운 모습을 찾아주는 것 같습니다. 같은 공간이라도 어떻게 공감하느냐에 따라, 낯설어질 수도 혹은 친숙해질 수도 있는 것이겠죠. 삶을 대하는 방식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스스로 살아가는 삶의 장소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곳이 곧 유토피아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랬다. 박 작가의 여백은 현대 도심의 유토피아를 여는 열쇠였다. 어쩌면 흔하디흔하지만 더없이 낯설기만 한 도심에 특별한 온기를 불어넣는 과정이다. 그것이 빌딩숲이냐 인왕산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선조들이 자연과 인간이 함께 더불어 상생하는 미덕을 산수화에 담아냈듯, 그는 현대사회 속에서 보이지 않은 교감, 소통의 흔적과 가능성을 ‘여백선면(餘白線面)’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옛날 선비들은 산수화를 걸어 두고 방 안에 누워 ‘상상 속 절경’을 유람하며 즐겼다. 이를 ‘와유산수(臥遊山水)’라 한다. 박 작가의 그림도 우리에게 옛 선비의 멋스런 미감을 선사한다. 그의 그림을 마주하고 있으면, 어느새 그림 속 인왕산의 곳곳을 거닐고 있는 듯하다. 마치 휴대전화를 들고 천천히 걸으면서 나만의 작은 영화를 찍는 것처럼 더없이 편하고 친근한 풍경이다. 화면에 등장한 장면들의 남다른 생동감은 박 작가가 실제로 화첩을 들고 곳곳의 풍경들을 채집해 옮긴 덕분이다.
“그림으로 놀 줄 아는 작가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먹과 화선지를 이용해 표현하는 동양화 풍경이 단순한 풍경의 묘사가 아닌, 작가가 전달하려는 내면의 정신세계까지도 기운을 담아낼 수 있는 작가로 말이죠. 흔히 수묵 작업에 대한 선입견 혹은 편견들 때문에 작품 이야기보다는 재료에 대한 장황한 설명으로 불필요한 시간을 뺏기기도 합니다. 가령 색은 왜 안 쓰고, 캔버스엔 왜 안 그리느냐, 왜 붓이 아닌 마커펜을 사용하느냐 등의 질문들이 많다. 그렇지만 그런 표면적인 요소들은 중요하지 않다. 동양적 미감이나 수묵에 대한 깊은 철학을 이해하게 되면 오히려 ‘수묵으로 사유하는 매력’도 얻으리라 믿는다.”
박 작가는 ‘느릿느릿 걸으며 스케치하기’야말로 자연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감상법이라 강조한다. 그래서 작품 제작 과정도 서두르는 법이 없다. 우선 스케치해 온 풍경을 보며 현장에서의 여러 감흥들을 떠올린다. 정리된 기억들을 화면의 밑그림으로 구성한다. 그 밑그림을 바라보면서 먹을 갈기 시작한다. 먹이 다 갈릴 즈음이면 이미 그의 가슴속엔 한 폭의 그림이 완성됐을 것이다. 그리곤 화선지를 스크린 삼아 영사기로 투영된 흑백영화처럼 담묵의 향연이 펼쳐진다. 가는 선의 점묘 터치를 고집하는 이유 역시 작은 숨결의 흔적이다.
박 작가의 대형 작품은 주로 공공기관에서 심심치 않게 만나보게 된다. 외교통상부 공관이나 강남구청, 서울시립미술관 등 소장처도 다양하다. 전통적인 화법으로 재해석한 현대적인 풍광이 오히려 이색적인 미감을 연출한 덕분일 것이다. 실제로 그의 풍경 연구법은 좀 특별하다. 3년 전부터 ‘세계 여러 도시에서 한 달 살기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이미 유럽과 타이완 등에서 1년여를 살며 외국의 도시 풍경들을 스케치해 왔다. 내년에는 영국 런던의 풍경을 채집할 예정이다. 이런 작업들은 전시와 화첩 형태의 책으로도 만나볼 듯하다. 그의 작품 가격은 50호(116.8×91cm)가 600만 원 정도, 100호(162×130cm)는 1000만 원 정도다.
김윤섭 소장은…
미술평론가로서 명지대 대학원 미술사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및 서울시립미술관 작품가격 평가위원, (사)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 전문위원, 대한적십자사 문화나눔프로젝트 아트디렉터, 교보문고 교보아트스페이스 기획위원, 숙명여대·세종대 겸임교수, 2017 서울국제조각페스타 전시감독,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 등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