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선임 과정서 노동조합과 갈등
[한경 머니=공인호 기자] 국내 최대 금융사인 KB금융지주의 1·2인자가 결정됐다. 윤종규 회장은 임기 중 ‘리딩뱅크 탈환’의 공적을 발판 삼아 연임에 성공했고 2인자 자리에는 허인 부행장이 낙점됐다. 하지만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노조의 극심한 반발과 함께 ‘셀프 연임’ 논란까지 불거지며 지배구조의 허점을 드러냈다는 뼈아픈 평가가 뒤따랐다.
지난 두 달간 진행된 KB금융 차기 회장 선임 과정에서 ‘KB사태’의 악몽 재현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셀프 연임’ 논란 등 지배구조를 둘러싼 노사 간 이견이 극명하게 표출되면서다. KB사태는 3년 전 주 전산 시스템 교체 여부를 둘러싸고 임영록 전 KB금융 회장과 이건호 전 KB국민은행장의 극심한 갈등이 경영진 사퇴로까지 이어진 내분 사태다. 일반인들에게는 경영진들의 ‘이전투구(泥田鬪狗)’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지만, KB금융 주주 및 직원들은 주가와 실적 저하는 물론 대내외 이미지 악화에 따른 유무형의 손실을 경험한 뼈아픈 사건이었다.
당시 구원투수로 등장한 인물이 윤종규 KB금융 회장(겸 KB국민은행장)이다. 지난 10년 가까이 낙하산 인사로 내홍을 겪으며 ‘흑역사’를 써 내려갔던 KB국민은행은 지난 3년간 뚜렷한 회복세로 돌아선 뒤 급기야 국내 ‘왕좌’ 자리도 되찾았다. 끝물에 들어선 기업 구조조정과 부동산 경기 호조 등 은행업을 둘러싼 우호적 환경도 한 몫 했지만, 무엇보다 윤 회장의 ‘관리형’ 리더십과 위기 극복을 위한 임직원들의 부단한 노력의 산물로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차기 회장 선출 과정에서 불거진 노사 간 불협화음은 아직까지 진정되지 않고 있다. 금융노조 KB국민은행지부를 비롯해 KB금융 자회사에 설립된 노조 연대체인 노조협의회는 지난 9월 차기 회장 선출을 위한 확대지배구조위원회가 구성된 직후부터 줄곧 윤 회장 연임에 ‘반대’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노조는 사측의 노조위원장 선거 개입 전력과 KB국민카드의 신입직원 임금 삭감, 갈수록 심화되는 영업 압박을 반대 사유로 내세우고 있다. 여기에 차기 회장 선임 과정의 투명성 결여와 ‘셀프 연임’ 논란은 금융사 지배구조의 허점을 드러냈다는 지적이다.
◆ ‘대리인 문제’ 내재한 소유구조
KB금융의 지배구조 내부 규범에 따르면 사외이사후보추천위원회는 금융지주 회장을 포함해 4인 이내의 사외이사로 구성하도록 하고 있으며, 회장 선임을 결정하는 확대지배구조위원회는 사외이사 전원으로 구성된다. 이같은 구조는 금융지주 회장의 권력 집중화를 심화시킬 개연성을 내포하고 있다.
노조가 정부의 낙하산 인사 방지 장치와 함께 ‘노동이사제’ 도입, 사외이사 선임에 대표이사(회장) 참여를 제한하는 내용의 정관 개정을 요구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KB금융뿐 아니라 경쟁사인 신한금융지주와 하나금융지주의 모범규준 역시 표현만 달리했을 뿐 같은 내용을 담고 있어 언제든지 유사한 논란에 휩싸일 수 있다.
금융위원회의 민간 자문기구인 금융행정혁신위원회도 “일부 금융 회사의 최고경영자(CEO) 추천 및 선임 과정이 투명하지 않아 금융권 전체의 신뢰 상실로 이어지고 있다”며 “금융권 CEO 후보추천위원회의 구성과 운영에서 모범규준 등을 통해 투명성과 공정성을 높이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반면 민영화 이후 과점주주의 대리인 5인이 사외이사를 맡고 있는 우리은행의 경우 사외이사후보추천위원회를 별도로 두고 있지 않다. 이와 관련해 금융권에서는 우리은행의 과점주주 실험이 은산분리 규제로 인한 ‘대리인 비용(proxy cost)’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다는 기대 섞인 전망도 나온다.
대리인 문제는 내부 경영진이 기업 소유자인 양 고액 연봉과 성과급을 받는 등의 권한 남용을 일컫는 것으로, 소유권이 분산된 전문경영인 체제의 대표적 한계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다만 일각에서는 지난 2015년 도입된 ‘금융 회사의 지배구조에 관한 법률’의 경우 글로벌 수준에 부합하는 데다 국내 은행의 소유구조 역시 영미식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오히려 노조의 경영 개입에 대한 경계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10년 이상 장기 집권? ‘기대 반 우려 반’
지난 3년 윤종규 회장 체제에 대한 평가는 ‘환골탈태(換骨奪胎)’로 요약할 수 있다. 반전을 이끈 주인공이 윤 회장이라는 데 반론을 제기할 인사는 거의 없다. 윤 회장 개인사(史)에 있어서도 명예 회복이라는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그는 지난 2004년 KB국민은행의 국민카드 흡수합병 과정에서의 회계부정에 연루돼 금융당국으로부터 중징계를 받고 부행장직에서 물러난 바 있기 때문이다.
윤 회장 체제의 1기는 내분 사태의 후유증 극복 및 조직 재정비가 핵심 과제였다. 경쟁사와 달리 KB금융의 경우 회장이 은행장을 겸직하고 있는 것도 이를 감안한 조치다. 취임 1년 차에는 ‘조직 안정’, 2년 차에는 ‘비(非)은행 강화’에 역량을 집중했다. 손해보험 시장의 강자인 LIG손보(현 KB손보)와 증권업계의 맏형 격인 현대증권(현 KB증권)도 새 식구로 맞았다. 이후 3년 차인 올해에는 조직 안정과 인수·합병(M&A) 효과가 가시화되면서 ‘리딩뱅크 탈환’이라는 반전 드라마를 완성했다.
물론 경상이익과 경영지표만 놓고 보면 여전히 신한금융이 업계 수위(首位)이지만, 신한금융의 10년 철옹성에 균열을 낸 KB의 저력은 경쟁사들도 인정하는 대목이다. 문제는 내년부터 본격화되는 윤종규 2기 체제의 경우 지난한 험로가 예상된다는 점이다. 우선 노사 대치 상황이 임기 내내 지속될 공산이 커 보인다. 노조 관계자는 “윤 회장 취임 이후 직원들이 느끼는 실적 압박과 업무 강도가 임계점에 다다른 상황”이라며 “이번에 밀리면 윤 회장의 추가 연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위기감이 팽배하다”고 말했다.
여기에 속전속결로 내정된 허인 KB국민은행장의 경우 임기가 ‘2년’으로 결정되면서 회장 중심의 지배구조는 더욱 심화될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현재 주요 시중은행의 지배구조 내부 규범은 ‘은행장 임기는 3년을 초과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주주총회에서 결정하며 연임할 수 있다’고만 적시하고 있다. 이 때문에 KB금융뿐 아니라 신한금융(조용병 회장-위성호 행장)과 하나금융(김정태 회장-함영주 행장) 역시 회장과 은행장의 임기를 각각 3년과 2년으로 못 박아둔 상태다. 각 금융사들은 과거 KB사태 등이 1·2인자인 회장과 은행장의 갈등 관계에서 비롯됐다는 점에 착안한 보완책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임기 차별에 따른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2년 임기를 부여받은 은행장의 경우 중장기 경영 전략보다 단기 실적주의에 매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임원급 임기와도 동일해 강력한 리더십을 구축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 특히 과거 신한사태의 경우 내분 사태의 핵심 원인이 라응찬 전 회장의 ‘제왕적 권한’과 이에 따른 장기 집권(9년)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장기 집권의 폐해를 막기 위해 도입한 ‘만 70세 나이 제한’ 규정 역시 실효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해당 규정을 감안하더라도 윤 회장(만 62세)을 비롯해 조용병 신한금융 회장(만 60세), 김정태 하나금융 회장(만 65세) 모두 10년 이상의 장기 집권이 가능하다. 이럴 경우 계열사 사장에서 은행장, 회장으로 이어지는 승계 사다리가 와해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금융지주 회장의 장기 독주와 단기 성과주의는 중장기 리딩뱅크 전선에 약보다는 독이 될 공산이 크다”며 “앞으로 펼쳐질 리딩뱅크 경쟁은 조직 구조개편 및 사업 포트폴리오 재정비와 함께 중장기 리더십 구축이 중요한 승부처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공인호 기자 ball@hankyung.com
일러스트 전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