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고-고려대’ 인맥 부활…막후 실세론 솔솔
[한경 머니=공인호 기자] 그동안 ‘금융 홀대론’이 고개를 들 정도로 차일피일 미뤄져 온 금융권 인사가 속도를 내고 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보은·코드인사 논란이 불거지며 낙하산 논란이 들끓었던 이전 정부와 차별성을 찾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정부가 금융기관장 인선에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었다. 지난 7월 최종구 금융위원장 취임 이후 정부가 가계부채 종합대책의 초안 격인 8·2 부동산대책을 발표한 뒤부터 탄력이 붙는 모습이다. 하지만 금융권 핵심 요직에 특정 고교 및 대학 출신 인사들이 속속 중용되면서 보은·코드인사 논란이 불거졌다. 앞서 문재인 대통령은 이전 정부의 ‘관치(官治)금융’을 적폐로 규정하고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라고 단언했지만, 청와대 핵심 실세의 복심(腹心)에 따라 인사가 좌지우지 되며 또 다른 논란에 휩싸인 모습이다.
◆ KK(경기고·고려대)·김승유 인맥 ‘훨훨’
최흥식 신임 금융감독원장은 지난 9월 11일 열린 취임식에서 “우리말에 참외 밭에서 신발 끈을 매지 말라고 했다”며 “철두철미하게 지키겠다”고 말했다. 민간 금융사인 하나금융지주와의 유착 우려에 대한 답변이다. 이런 우려는 첫 ‘민간 출신’ 금융당국 수장이라는 독특한 이력이 오히려 발단이 됐다.
최 원장은 하나금융연구소장과 하나금융지주 사장을 역임한 뒤 직전에는 하나금융이 후원 중인 서울시립교향악단 대표직을 맡았다. 더욱 눈길을 끄는 부분은 최 원장을 영입한 인물이 김승유 전 하나금융 회장이라는 점이다. 김 전 회장은 과거 이명박 정부에서 ‘4대 천황’으로 불릴 정도로 금융계 핵심 실세로 주목받았던 인물이다.
4대 천황은 김 전 회장을 비롯해 어윤대(전 KB금융 회장), 이팔성(전 우리금융 회장), 강만수(전 KDB산업은행 회장) 등 4대 금융지주 수장 자리를 이 전 대통령의 고려대 인맥이 싹쓸이하면서 생겨난 말이다. 이후 강 전 회장은 대우조선해양 등의 경영 비리로 구속됐고, 일부 인사는 제왕적 권한을 휘두르다 극심한 내홍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직전 박근혜 정부에서도 ‘서금회(서강대 출신 금융인 모임)’가 주목받으며 금융계 요직을 장악했지만 상당수는 전문성 부족으로, 일부는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임기를 채우지 못했다. 같은 맥락에서 문재인 정부의 경우 지난 10년 ‘적폐 청산’을 제1호 국정과제로 내세우고 있다는 점에서 ‘최흥식 카드’는 다소 의외라는 시각도 나온다.
하지만 시간을 되돌려 금융위원장 임면 과정을 들여다보면 금융계 인사 문고리의 열쇠가 드러난다.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 새 금융위원장에는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이 유력하게 거론됐었다. 사실상 낙점됐다는 보도까지 나왔지만 청와대 내부에서는 ‘SD(김석동의 약자) 카드’를 미는 장하성 정책실장과 이를 반대하는 조국 민정수석의 갈등설이 흘러나왔다. 이후 시민단체를 비롯해 금융권 노조가 김 전 위원장을 ‘관치의 화신(化身)’으로 규정하면서 한 달 넘게 세간에 떠돌았던 내정설은 전격 철회됐다.
경기고 인맥이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김 전 위원장과 장 실장은 경기고 68회 동기로, 하영구 은행연합회장(68회)과 민유성 전 산업은행장(69회)도 같은 고교 출신이다. 이후 ‘SD 카드’를 대체한 인사가 최종구 금융위원장인데 최 위원장은 장 실장과 MB 정부 때 득세했던 ‘고려대’를 공통분모로 하는 막역한 사이로 알려졌다. 문 대통령도 금융위원장 임명 과정에서 장 실장의 천거를 공식화하기도 했다.
금융감독원장 인선을 둘러싼 논란이 거센 것은 김승유 전 회장의 인사 개입설(說)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김 전 회장은 장 실장과 ‘경기고-고려대’라는 이중 교집합을 갖고 있다. 물론 김 전 회장 개입설의 실체가 드러난 것은 아니지만, 지방 최대 금융지주사인 BNK금융지주 회장에 김지완 전 하나금융 부회장이 낙점되면서 ‘막후 실세론’에 힘이 실리는 분위기다. 김지완 회장 역시 하나금융 재직 시절 김 전 회장의 핵심 라인으로 꼽혔었다.
일부 시민단체와 금융권 노조 등은 민간 출신 금감원장의 ‘포획’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지만, 최 원장의 경험이 직무 수행 과정에서 어떤 형태로 발현될지는 미지수다.
◆ 국책은행도 민간 출신 ‘낙하산’ 인사?
금융 공기업 인사 역시 장 실장의 복심이 핵심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앞서 정부는 산업은행 신임 회장과 수출입은행장에 이동걸 동국대 교수와 은성수 한국투자공사(KIC) 사장을 각각 선임했다. 대표적 친박(親朴) 인사로 꼽혔던 이동걸 전 회장과 동명이인인 이 회장은 과거 김대중 정부에서는 대통령 비서실 행정관으로 근무했고, 노무현 정부 때는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과 금융연구원장을 지낸 만큼 현 정부의 대표적 ‘보은인사’로 꼽힌다.
장 실장과는 경기고 동문(68회)으로 둘은 노무현 정부 때부터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는(?)’ 사이로도 알려져 있다. 반면 은성수 수출입은행장의 경우 정통 재무 관료로 장 실장과는 뚜렷한 공통분모를 갖고 있지는 않다. 다만 노무현 정부 때 대통령 비서실 행정관을 지낸 경력을 갖고 있어 문 대통령의 각별한 신임을 얻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재인 정부의 이 같은 인사 시스템과 관련해서는 평가가 다소 엇갈린다. 일각에서는 개혁적 성향의 국정 철학에 기반을 둔 예측 가능한 인사라는 시각도 있지만, 금융경제 라인의 핵심 보직이 특정 인사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현상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새 정부 들어 반(反)시장 친(親)노동 기조의 정책 쏠림에 대한 우려가 갈수록 비등해지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소위 ‘인사 참사’의 발단이 된 좁은 인사풀에 대한 지적도 나온다. 참신한 인사가 이뤄지기보다는 과거 정권에서 뒤로 물러났던 인사들이 재기용되며, ‘올드 보이(?)의 귀환’이라는 쓴소리도 적지 않다. 이 과정에서 부적절한 내정설이 반복되면서 특정 인사의 무혈입성을 돕기 위한 의도적 잡음이 아니냐는 의혹까지 나온다. 대표적인 사례가 전격적으로 철회된 ‘김조원 내정설(금융감독원장)’이다.
일각에서는 김 전 사무총장을 둘러싼 금융 비(非)전문가라는 비판이 내정 철회의 배경이 됐을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오지만, 이는 내정 전 충분히 예측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더욱이 김석동(금융위원장) 내정설이 불거졌을 당시와 비교하면 시민단체의 반발 강도도 크지 않았다. 오히려 금감원 노조는 ‘힘 있는’ 관료 출신에 대한 환영의 뜻을 밝혀 눈길을 끌기도 했다.
반면 첫 민간 출신인 최 원장의 경우 연공서열을 중시하는 관료 집단인 금융위원회와의 관계 정립부터가 쉽지 않은 과제로 등장했다. 벌써부터 일부 금융관련 정책 발표를 놓고 월권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여기에 최 원장이 8·2 부동산대책이 정면으로 겨누고 있는 ‘부동산 갭 투자’ 논란에 휩싸였다는 점에서 금감원의 워치독(감시자) 역할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갈수록 높아질 수 있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현 정부 들어 문 대통령의 KKK(경남중, 경남고, 경희대) 출신의 일명 ‘경금회’ 인사 대신 장하성 정책실장의 경기고·고려대 인맥이 뜨면서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며 “문 대통령의 약속대로 관치금융 논란에서는 일부 비켜섰지만 보은·코드인사 논란을 피하기는 어렵게 됐다”고 꼬집었다.
한편, 금융기관장 인사가 마무리 국면에 들어서면서 연내 임기가 만료되는 금융권 협회장 자리에도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미 공석 상태인 손해보험협회장의 경우 후보자 선정 작업에 착수했고, 하영구 은행연합회장은 11월 말 임기가 만료된다. 또 이수창 생명보험협회장은 12월 8일, 황영기 금융투자협회장은 내년 2월 임기가 끝난다.
공인호 기자 ball@hankyung.com
일러스트 허라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