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을 품은 평면…시각의 초월을 꿈꾸다

Beyond the Visible, 나무 프레임에 에폭시 레진 및 아크릴릭, 70×70cm, 2009년

LIFE & ● Artist 김윤섭 소장의 바로 이 작가 - 김현식

[한경 머니 = 김윤섭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미술사 박사]

김현식 작가의 작품은 보기엔 쉬운데,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가 참 힘들다.
보면 볼수록 더 그렇다. 첫인상은 강렬한 색감이 발산하는 묘한 기운 때문에 홀리듯 끌려가게 된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헛갈리기 시작한다.

말끔하게 칠한 회화에 두꺼운 투명 코팅 처리를 해 놓은 것 같기도 하다. 선명하게 채색된 덩어리를 넙죽하고 두툼하게 조각해 놓은 입체작품 같기도 하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그 안에서 수천 가닥 이상의 가는 실선들을 발견하게 된다면, 머릿속엔 ‘이게 뭐지’ 싶은 혼돈으로 잠시 멍해진다. 이처럼 보는 이에게 미지의 설렘과 화두를 선사하는 것이 김현식 작가의 작품만이 지닌 통찰의 시작이다.

“대학 졸업 이후 주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고찰의 연속이었어요. 동양 철학의 용어를 차용하자면 유위법 (有爲法, samskrta)과 무위법(無爲法, asamskrta-dharma) 사이에 대한 탐구일 거예요.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차원, 작가라는 차원 안에서 눈을 뜨는 경험을 하면서 저는 더 좋은 사람이 되기를 희망했고, 가식을 버리기로 다짐하게 됩니다. 혼란스러운 감정을 깨워줄 수 있는 작가가 되기를 희망해요. 바로 그 ‘사이의 공간’에 들어서고서야 관중과의 관계가 명백해지게 될 것입니다.”

김 작가의 말처럼 그의 작품은 출발부터 이미 철학적 담론을 전제하고 있다. 말로는 쉽게 유위법 혹은 무위법이란 용어를 나열했지만, 이 개념의 깊이를 가늠하기란 ‘심해(深海)에 동전을 던져보는 것’만큼이나 허망할 수도 있다. 그래도 이와 관련해 자료를 찾다 보면 노자사상이 함께 걸려든다. 노자 역시 유위와 무위의 개념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풀어놓은 내용을 일부 인용하면 대략 ‘유위는 현상에서 일어나는 개별적인 낱낱의 사실이나 물질적 요소로 보고, 무위는 모든 현상을 포함한 전체로서의 현상을 의미하는 개념’이라고 한다. 이처럼 무슨 ‘현상적인 존재’라든가, ‘생멸하지 않는 영원한 실재’ 혹은 ‘절대적이고 형이상학적 실재’라는 용어들은 도통 힘들기 그지없다.

쉽게 ‘사랑하는 현상’으로 예를 든 것은 좀 낫다. 누구나 소중하게 여기는 ‘사랑’엔 그 이면에 ‘이별’이란 요소를 포함하기 마련이다. 깊은 사랑일수록 이별도 더욱 강렬하게 다가온다. 따라서 ‘사랑이라는 현상’을 정확히 보기 위해선 사랑 그 자체와 함께 그 이면에 숨은 이별도 동시에 인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거부할 수 없는 진실은 사랑도 이별에 다가가는 과정이란 것. 여기에서 유위는 ‘분명하게 인지하게 되는 사랑의 감정’ 정도라면, 무위는 ‘이별처럼 다가올 변화적 요인들’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김현식 작품의 경우도 ‘사랑의 이면은 이별’이란 전제처럼 ‘있음과 없음’이나 ‘시각적 실상과 인지적 가상’ 등 상이하고 다양한 관점을 동시에 품고 있다. 그런데 심오하게 내재된 철학적 의미를 시각화하는 과정은 의외로 간단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칼로 긁는 행위’의 연속이다. 일정하게 숨을 고르는 과정 속에서 속도의 완급 조절이나 힘의 강약 조율만이 관건이다. 이런 단순한 작업 과정은 사뭇 수행자의 자세와 닮아 있다. 작품에 나타난 결과물은 호흡을 통해 드러난 내면 기운의 흔적인 셈이다.

최근 작품들의 특징이 명료해진 시점은 대략 2000년대 초중반이다. 물론 1992년 대학 졸업 이후부터 줄곧 투명 접착제류인 에폭시 레진(epoxy resin)을 사용했다. 초기엔 작품 소재 자체를 레진에 통째로 담갔다면, 이때부터는 레진의 얇은 층을 여러 겹 쌓는 방식을 선택했다. 우선 평면판(캔버스를 씌운 나무 프레임 혹은 알루미늄)에 레진을 부어 평평히 굳히고, 그 위에 송곳으로 긁은 드로잉 선(線)을 빼곡하게 채워 넣는다. 그다음 팬 선들에 원하는 색을 입히고 닦아내면 상감기법처럼 무수한 선들이 색으로 변환된다. 이 과정을 대략 10여 회 이상 반복해야 완성된다. 웬만한 크기 한 작품이 완성되기까진 적어도 1만 번 이상의 송곳 선 긋기를 거쳐야 한다.

그의 작품의 큰 비밀은 바로 ‘공중에 중첩된 수많은 드로잉 선들’이다. 마치 깊은 바닷속에 수많은 물고기 떼들이 층층이 유영하고 있는 격이다. 그렇게 보면 바다도 공기 대신 물이 꽉 들어찬 공간이다. 그의 그림이 2차원적인 평면회화의 속성을 지녔음에도 수천, 수만 가닥의 선들로 이뤄진 3차원 공간을 품을 수 있는 까닭도 그 연장선이다. 3차원 공간을 품은 2차원 평면, 말로만 들어도 설레고 흥분되는 창의적인 발상이 아닌가. 있고 없고의 경계를 넘어 관념의 통찰이 열리는 순간이다.

“저는 시각의 초월성을 꿈꿉니다. 시선의 자유로움은 투명한 물질을 통해 비물질적이고 비형태화한 궁극적인 미지의 세계에 다다를 것입니다. 평면인 제 작품 속에는 공간이 존재하죠. 불가능하지만 시각적으로는 분명 공간을 느낄 수 있어요. 겹겹이 쌓인 레진의 레이어와 레이어 사이의 모호한 경계 속에 존재하는 ‘사이공간’이에요. 사이공간은 궁극의 미지의 세계에 다다르기 전까지의 공간이죠. 이 투명하게만 보이는 사이의 공간들에는 각별히 중요했던 장소, 기억, 순간들이 있고, 또 채워 나가야 할 사유가 잠든 곳이기도 합니다. 저는 여전히 꿈꿔요. 자유로운 상상의 여행을. 저의 사이공간은 (유위의) 시적·창조적 공간이죠.”

일명 ‘공간을 품은 평면’ 작품의 제목은 크게 두 번의 시즌으로 구분된다. 초창기부터 2010년 전후까지는 머릿결 시리즈인 <사이공간(Beyond The Visible)>과 폭포 시리즈인 <일루전(Illusion)>이었다면, 최근 들어서는 시리즈를 선보이고 있다. 전자의 경우는 다소 구상적인 요소를 띠었다. 주로 여성의 뒷모습 혹은 옆모습을 기본자세로 부드러운 머릿결을 강조한 작품이었다. 또는 화면을 가득 채운 폭포 형상을 차용해 역시 머릿결처럼 수많은 물줄기를 표현했다. 그러다가 결국 지금의 선들만을 활용한 추상 형식으로 자연스럽게 옮겨 왔다.
Half of It, 나무 프레임에 에폭시 레진 및 아크릴릭, 184×111×6cm, 2017년

김현식의 작품이 시기별로 시각적인 표현 방식은 다소 변화를 보였다 해도, 그 원형적 대원칙은 변함이 없다. 여성의 머릿결이든, 시원한 폭포의 물줄기이든, 원색의 향연이든 간에 본질적인 맥락은 ‘공간에 대한 재해석’이다. 온전한 형상의 집착에서 벗어나 오직 선과 색이란 가장 기본적인 조형 요소로써 ‘보이는 것 너머의 미지의 세계’를 구현해내는 창의적 실험의 연속이다. 색면 추상을 연출한 무수한 드로잉 선들은 김 작가만의 창조된 침묵의 공간을 일깨우는 음표 역할을 한다. 그 스스로 지휘자가 돼 새로운 다악장 형식의 교향곡을 선사해주고 있다.

김 작가는 순수 국내파 작가다. 한 번의 해외 유학 경험도 없는 그가 최근엔 국내보다 해외 전시로 더 분주하다. 런던의 모거모던아트(Mauger Modern Art) 갤러리, 뉴욕의 ACNY 등의 러브콜 전시 활동은 물론 해외 유명 아트페어(아트파리 8점, 아트뉴욕 8점, 마이애미 10점)에서 모든 출품 작품이 솔드아웃 돼 큰 관심을 받았다. 최근에는 벨기에와 상하이에서 개인전을 가졌고, 파리 퐁피두뮤지엄에서도 공식 자료 요청을 받았다고 한다. 내년 1월에는 전속 화랑인 학고재갤러리에서 7년 만의 국내 개인전을 준비 중이다. 작품의 전시 가격은 국내외에서 동일하게 ‘100×100cm’ 기준으로 2000만 원 선이다.


김윤섭은…
김윤섭은 미술평론가로서 명지대 대학원 미술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월간 미술세계 편집팀장, 월간 아트프라이스 편집이사를 역임했다. 현재는 국립현대미술관 및 서울시립미술관 작품가격 평가위원, (사)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 전문위원, 대한적십자사 문화나눔프로젝트 아트디렉터, 교보문고 교보아트스페이스 기획위원, 숙명여대 겸임교수, 2017서울국제조각페스타 전시감독,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 등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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