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 Motif in Art] 상자(box): 호기심이 금기를 깨다
입력 2017-08-02 13:58:44
수정 2017-08-02 13:58:44
[한경 머니 = 박은영 문학박사·서울하우스 편집장] 뚜껑이 닫힌 상자가 있다. 뭔가 아주 중요한데 절대로 열어보면 안 된다고 봉인된 상자. 그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비밀은 언젠가 밝혀지고 금기는 깨지기 마련. 금지할수록 호기심은 더 커지고 결국 상자는 은밀히 개봉되고 말 것이다.
호기심을 자극한 ‘판도라의 상자’
호기심은 인간이 가진, 가장 인간다운 본성 중 하나가 아닐까? 커튼이 쳐져 있으면 걷어보고 싶고, 뚜껑이 덮여 있으면 열어봐야만 속이 시원하다. 보이지 않는 것, 감춰진 것에 대한 궁금증, 그 호기심은 인류가 발전하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대가로 인간은 파멸의 위험을 감수해야 할지도 모른다. 호기심을 잘 다루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신들의 왕 제우스는 인간의 호기심을 이용해 인류에게 재앙을 내리려 했다. 재앙의 원인은 인간이 프로메테우스의 도움으로 금지됐던 불을 가졌기 때문이다. 불은 빛과 온기뿐 아니라 지혜를 뜻하므로 불을 소유한 인간은 신에게 대항할 수 있는 위협적인 수단을 획득한 것이다.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에게 매일 독수리한테 간을 쪼아 먹히는 형벌을 내리고 인간에게는 한 여인을 보내 재앙을 내리기로 했다. 그때까지 세상에는 여자가 없었는데, 제우스는 솜씨 좋은 헤파이스토스를 시켜 아리따운 여자를 만들도록 했다. 그렇게 태어난 최초의 여성은 판도라. 그 이름은 ‘모든 선물을 받은 여인’이라는 뜻이다.
판도라는 여러 신들로부터 미모와 교태와 방직기술과 말솜씨 등 온갖 것을 선물로 받았다. 거기에 제우스는 항아리 하나를 얹어주며 절대로 열지 말라고 한 후 그녀를 프로메테우스의 동생 에피메테우스에게 보냈다. 판도라는 에피메테우스와 결혼해 잘 살다가 어느 날 문득 제우스가 준 항아리가 궁금해졌다. 제우스의 경고가 생각났지만 한번 호기심이 발동하자 멈출 수가 없었다. 몰래 항아리를 열면서 그녀는 무엇을 기대했을까?
어쩌면 판도라는 17세기 정물화처럼 호사스런 보물을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네덜란드 화가 에드바르트 콜리어(Edward Collier)가 그린 <바니타스 정물화>에는 활짝 열린 보석상자가 세밀하게 묘사돼 있다. 상자에서는 보석과 황금이 주렁주렁 달린 패물이 넘쳐 나와 테이블 위까지 늘어져 있고 주위에는 지구본, 검, 책, 왕관, 왕의 초상 등이 보인다. 세상 부귀영화의 상징이 모두 모인 이 그림은 눈을 현혹시키지만 왠지 흐뭇하기보다 불안할 만큼 과도한 느낌이 든다. 과잉된 것은 탐욕을 뜻하고 ‘바니타스’라는 제목이 가리키듯 헛되고 덧없을 따름이다.
판도라가 항아리를 열자, 탐욕을 불러일으키는 금은보화가 아니라 훨씬 더 무서운 온갖 재앙의 요소들이 마구 튀어나왔다. 그것은 슬픔, 고통, 질병, 가난, 증오, 질투와 같은 불행의 씨앗이었다. 놀란 판도라가 황급히 상자를 닫아 마지막으로 밑바닥에 남아 있던 희망만은 빠져 나가지 않았다. 이때부터 지상의 황금시대는 끝났고 인류는 온갖 불행에 시달리게 됐다. 하지만 상자 속에 희망이 남아 있기에 어떤 역경에서도 인간은 희망을 잃지 않는다고 한다. 판도라의 항아리는 나중에 ‘판도라의 상자’라는 이름으로 번안돼 뜻밖의 재앙을 유발할 잠재적 요인을 비유하는 말로 통용되고 있다.
‘치명적 여인’이 가져온 재앙과 희망
영국 화가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John William Waterhouse)는 판도라가 상자를 여는 긴장된 순간을 묘사했다. 그녀는 깊은 숲속에서 홀로 은밀하게 상자를 마주하고 있다. 제단 같은 바위 위에 황금빛 상자를 올려놓고 마치 신성한 의식을 치르듯 꿇어앉아 상자의 뚜껑을 조심스레 들어 올리는 중이다.
호기심이 얼마나 집요하고 간절했는지 판도라는 어깨에서 옷자락이 흘러내리는지도 모르고 뭔가에 홀린 듯 상자 속을 들여다보고 있다. 상자는 겨우 조금 열렸을 뿐인데 한쪽에서 벌써 연기 같은 것이 빠져 나오고 있다. 형태도 없이 세상 어디든 쉽게 퍼져 나갈 재앙의 근원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다. 뚜껑이 활짝 열리고 나서야 비로소 돌이킬 수 없는 사태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런데 워터하우스의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상자의 내용물보다 판도라의 아름다움에 더 매료되지 않을까? 이 그림이 나온 19세기 말에는 매혹적인 여성이 남자에게 재앙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하는 뜻에서 ‘치명적 여인’ 즉 ‘팜 파탈(femme fatale)’의 이미지가 유행했다. 워터하우스는 판도라를 통해 그처럼 치명적인 여성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다. 제우스가 판도라를 만들어 지상에 보낼 때부터 여성은 재앙을 불러오는 존재로 정해져 있었다. 이는 전통적인 부계사회의 가치관에 따른 남성 본위의 시각을 나타낸다.
‘판도라의 상자’는 우리 사회에 감춰진 정의롭지 못한 사실이 어떤 계기로 드러나기 시작할 때마다 심심찮게 등장하는 용어가 됐다. 그리고 신화가 말하듯이 우리는 어떤 충격과 고난을 겪어도 다시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간다. 그런데 신화에 대해 의문이 하나 생긴다. 희망이 상자 속에 갇혀 있다면 어떻게 우리가 그것을 누릴 수 있을까? 희망도 다른 재앙들과 함께 빠져 나와 세상에 돌아다녀야 우리가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가난, 전쟁, 질병, 죽음처럼 재앙은 현실에 실제로 존재하지만, 희망은 그렇게 구체적이거나 객관적인 실체도 현상도 아니다. 어쩌면 희망은 상자 속 깊숙이 갇혀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믿음만이 있을 뿐 현실에는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졌다고 생각하는 희망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엄밀히 말해 진짜 희망이 아니라 각자가 마음속에 형성한 희망에 대한 믿음, 즉 희망의 허상이다.
희망의 허상을 품고 살아가는 인간은 어리석고 불행한 존재일까? 희망은 세상에 떠도는 재앙처럼 돌연히 만날 수 없지만 안전하게 숨어 있어 그에 대한 믿음을 항상 지닐 수 있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건 희망의 허상뿐이지만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스스로 행복하게 살기 위해 붙잡은 지극히 현명한 수단이 아닐까?
호기심을 자극한 ‘판도라의 상자’
호기심은 인간이 가진, 가장 인간다운 본성 중 하나가 아닐까? 커튼이 쳐져 있으면 걷어보고 싶고, 뚜껑이 덮여 있으면 열어봐야만 속이 시원하다. 보이지 않는 것, 감춰진 것에 대한 궁금증, 그 호기심은 인류가 발전하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대가로 인간은 파멸의 위험을 감수해야 할지도 모른다. 호기심을 잘 다루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신들의 왕 제우스는 인간의 호기심을 이용해 인류에게 재앙을 내리려 했다. 재앙의 원인은 인간이 프로메테우스의 도움으로 금지됐던 불을 가졌기 때문이다. 불은 빛과 온기뿐 아니라 지혜를 뜻하므로 불을 소유한 인간은 신에게 대항할 수 있는 위협적인 수단을 획득한 것이다.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에게 매일 독수리한테 간을 쪼아 먹히는 형벌을 내리고 인간에게는 한 여인을 보내 재앙을 내리기로 했다. 그때까지 세상에는 여자가 없었는데, 제우스는 솜씨 좋은 헤파이스토스를 시켜 아리따운 여자를 만들도록 했다. 그렇게 태어난 최초의 여성은 판도라. 그 이름은 ‘모든 선물을 받은 여인’이라는 뜻이다.
판도라는 여러 신들로부터 미모와 교태와 방직기술과 말솜씨 등 온갖 것을 선물로 받았다. 거기에 제우스는 항아리 하나를 얹어주며 절대로 열지 말라고 한 후 그녀를 프로메테우스의 동생 에피메테우스에게 보냈다. 판도라는 에피메테우스와 결혼해 잘 살다가 어느 날 문득 제우스가 준 항아리가 궁금해졌다. 제우스의 경고가 생각났지만 한번 호기심이 발동하자 멈출 수가 없었다. 몰래 항아리를 열면서 그녀는 무엇을 기대했을까?
어쩌면 판도라는 17세기 정물화처럼 호사스런 보물을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네덜란드 화가 에드바르트 콜리어(Edward Collier)가 그린 <바니타스 정물화>에는 활짝 열린 보석상자가 세밀하게 묘사돼 있다. 상자에서는 보석과 황금이 주렁주렁 달린 패물이 넘쳐 나와 테이블 위까지 늘어져 있고 주위에는 지구본, 검, 책, 왕관, 왕의 초상 등이 보인다. 세상 부귀영화의 상징이 모두 모인 이 그림은 눈을 현혹시키지만 왠지 흐뭇하기보다 불안할 만큼 과도한 느낌이 든다. 과잉된 것은 탐욕을 뜻하고 ‘바니타스’라는 제목이 가리키듯 헛되고 덧없을 따름이다.
판도라가 항아리를 열자, 탐욕을 불러일으키는 금은보화가 아니라 훨씬 더 무서운 온갖 재앙의 요소들이 마구 튀어나왔다. 그것은 슬픔, 고통, 질병, 가난, 증오, 질투와 같은 불행의 씨앗이었다. 놀란 판도라가 황급히 상자를 닫아 마지막으로 밑바닥에 남아 있던 희망만은 빠져 나가지 않았다. 이때부터 지상의 황금시대는 끝났고 인류는 온갖 불행에 시달리게 됐다. 하지만 상자 속에 희망이 남아 있기에 어떤 역경에서도 인간은 희망을 잃지 않는다고 한다. 판도라의 항아리는 나중에 ‘판도라의 상자’라는 이름으로 번안돼 뜻밖의 재앙을 유발할 잠재적 요인을 비유하는 말로 통용되고 있다.
‘치명적 여인’이 가져온 재앙과 희망
영국 화가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John William Waterhouse)는 판도라가 상자를 여는 긴장된 순간을 묘사했다. 그녀는 깊은 숲속에서 홀로 은밀하게 상자를 마주하고 있다. 제단 같은 바위 위에 황금빛 상자를 올려놓고 마치 신성한 의식을 치르듯 꿇어앉아 상자의 뚜껑을 조심스레 들어 올리는 중이다.
호기심이 얼마나 집요하고 간절했는지 판도라는 어깨에서 옷자락이 흘러내리는지도 모르고 뭔가에 홀린 듯 상자 속을 들여다보고 있다. 상자는 겨우 조금 열렸을 뿐인데 한쪽에서 벌써 연기 같은 것이 빠져 나오고 있다. 형태도 없이 세상 어디든 쉽게 퍼져 나갈 재앙의 근원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다. 뚜껑이 활짝 열리고 나서야 비로소 돌이킬 수 없는 사태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런데 워터하우스의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상자의 내용물보다 판도라의 아름다움에 더 매료되지 않을까? 이 그림이 나온 19세기 말에는 매혹적인 여성이 남자에게 재앙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하는 뜻에서 ‘치명적 여인’ 즉 ‘팜 파탈(femme fatale)’의 이미지가 유행했다. 워터하우스는 판도라를 통해 그처럼 치명적인 여성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다. 제우스가 판도라를 만들어 지상에 보낼 때부터 여성은 재앙을 불러오는 존재로 정해져 있었다. 이는 전통적인 부계사회의 가치관에 따른 남성 본위의 시각을 나타낸다.
‘판도라의 상자’는 우리 사회에 감춰진 정의롭지 못한 사실이 어떤 계기로 드러나기 시작할 때마다 심심찮게 등장하는 용어가 됐다. 그리고 신화가 말하듯이 우리는 어떤 충격과 고난을 겪어도 다시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간다. 그런데 신화에 대해 의문이 하나 생긴다. 희망이 상자 속에 갇혀 있다면 어떻게 우리가 그것을 누릴 수 있을까? 희망도 다른 재앙들과 함께 빠져 나와 세상에 돌아다녀야 우리가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가난, 전쟁, 질병, 죽음처럼 재앙은 현실에 실제로 존재하지만, 희망은 그렇게 구체적이거나 객관적인 실체도 현상도 아니다. 어쩌면 희망은 상자 속 깊숙이 갇혀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믿음만이 있을 뿐 현실에는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졌다고 생각하는 희망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엄밀히 말해 진짜 희망이 아니라 각자가 마음속에 형성한 희망에 대한 믿음, 즉 희망의 허상이다.
희망의 허상을 품고 살아가는 인간은 어리석고 불행한 존재일까? 희망은 세상에 떠도는 재앙처럼 돌연히 만날 수 없지만 안전하게 숨어 있어 그에 대한 믿음을 항상 지닐 수 있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건 희망의 허상뿐이지만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스스로 행복하게 살기 위해 붙잡은 지극히 현명한 수단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