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 ● Artist 김윤섭 소장의 바로 이 작가 - 박성민
[한경 머니 = 김윤섭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미술사 박사]
최근 제4차 산업혁명이나 인공지능(AI)에 대한 관심이 부쩍 커지고 있다. 20년 이내엔 지금의 직업이 50% 이상 없어질 것이란다. 하지만 반대급부로 ‘인간적 감성’에 관한 분야는 더욱 비중이 높아지겠단 전망이다. 당연히 미술 장르도 여기에 포함된다. 그러다 보니 일명 ‘손맛’이 더욱 그리운 세상이 생각보다 빨리 닥칠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박성민 작가의 작품은 ‘손맛의 정수’를 보여준다. 너무나 정교하게 옮겨진 화면의 대상들이 모두 ‘100% 수작업’이다.
쉽고 간편한 화법을 선호하는 현대미술의 일반적인 성향을 감안한다면 박성민 작가의 집중력이 돋보이는 작품은 예술가로서의 장인정신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웬만한 작품 한 점을 완성하기 위해선 하루 꼬박 10시간씩 일주일 이상 걸리는 제작 과정은 수도자의 진지한 수행 과정이나 다름없다. 이렇듯 박 작가는 세상을 얼음 속에 가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청명한 얼음 속에 자신의 체온과 열정으로 새로운 세상의 꿈을 구현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2002년부터 박 작가 작품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아이스캡슐(Ice Capsule)’ 시리즈를 ‘삶의 아름다운 기억을 보관하는 사유의 장’이라 여겨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제 작품은 사물을 보고 그리는 정물화보다는 상상 속에서 연출한 이미지에 가깝습니다. 동시에 사진으로서는 가능하지 않은 회화적 효과들이 내재된 작품입니다. 굳이 작품의 매력을 꼽으라면 ‘사진과는 또 다른 상상으로 연출된 극사실적 이미지’가 아닐까 싶네요. 그래서 추상적으로 모티브를 구성해 사실적인 구상 표현으로 완성하다 보니, 추상과 구상의 두 영역을 함께 아우르고 있다는 평을 받기도 합니다.”
순수한 물질이 취할 수 있는 상태는 ‘고체·액체·기체’ 세 가지다. 따라서 모든 물질은 일반적으로 이 세 가지 상태인 삼태 (三態) 중 한 가지를 취하고 있다. 박성민의 그림에 등장하는 얼음은 바로 이 물질의 삼태(三態)와 직결돼 있다. 얼음은 한 몸에 이 세 요소의 특성을 동시에 품고 있기 때문이다. 고체이면서 액체 성질이나 기체 상태로 언제든지 변모할 수 있는 얼음이야말로 우리 삶의 또 다른 모습을 대변한다. 가령 ‘액체는 유기적 사고, 고체는 고정된 기억, 기체는 망각의 존재성’ 등을 상징한다면, 얼음엔 이 모든 감정이 잠들어 있는 셈이다. 그래서일까. 박성민의 얼음 그림을 보고 있으면 작은 이야기 한 토막을 읽고 있는 느낌이 든다. 여러 감정들이 얽힌 한 편의 시(詩)나 수필을 마주한 것 같다.
“순수, 고립, 인내, 격차, 반감. 흔히 문학적 측면에서 얼음이 지닌 함축적 의미를 이 다섯 가지로 적은 걸 읽은 기억이 납니다. 물론 평소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얼음을 표현해 온 제 작가적 입장과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얼음이란 평범한 소재이지만, 그 안에 담긴 문학적이고 철학적인 코드를 찾게 되는 건, 마치 진중함과 가벼움을 동시에 손에 쥐려는 것과 같겠지요. 진중함은 진중해서 좋고 가벼움은 가벼워서 좋지 않을까요.”
박 작가는 작품의 특성상 그림을 그리기 전에 바탕의 질감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보통 바탕화면의 밑칠 작업은 일곱 번 정도를 거친다. 엷게 칠하고 말리기를 여러 번 마친 후 아주 고운 사포질을 통해 표면을 아주 매끄럽게 정리한다. 그런 이후에만 미세한 선묘의 경계마저 구분할 수 없는 이미지를 얻을 수 있다. 최소한의 연필 윤곽 드로잉 위에 전체적으로 1차 색칠 작업을 하고 나면, 아주 가느다란 세필(細筆)로 점을 찍듯 재차 색칠 작업을 거쳐 완성한다. 겉보기엔 굉장한 깊이가 느껴지는 장면이라도, 하이라이트 덧칠까지 거의 두세 번의 붓질로 완성한 결과다. 결국 작품의 구상 단계에 이미 머릿속엔 작품의 제작 과정이나 완성될 이미지가 스캔되듯 각인된 셈이다.
“차가운 얼음은 ‘극적인 만남’을 보여줍니다.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생명의 양 극단을 교차시키기도 하고, 얼음에 갇힌 이미지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것은 일정한 틀 속에 갇혀 정체성을 잃어버린 현대인의 삶에 대한 은유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얼음은 시간의 흐름을 타는 생명을 ‘절정의 순간에서 멈추게 하고 그 순간을 연장시켜 주는 상징적 존재’입니다.”
박 작가가 말한 ‘극적인 만남’은 꼭 삶과 죽음까지 언급하지 않더라도, 그림의 시각적 요소로 쉽게 만날 수 있다. 작품 속에 함께 등장하는 ‘도자기’와 ‘얼음’이 그 주인공이다. 1000도의 열을 거쳐야만 완성되는 도자기와 차가운 물질의 대명사인 얼음이 극적으로 만나는 장면이 연출됐다. 둘은 불과 물의 이미지를 대변하는 상징적인 소재다. 불로 탄생한 도자기에 물이 빚어낸 얼음이 담겨 있는 셈이다. 또한 그 얼음엔 사방으로 삐죽삐죽 나온 식물들로 구성돼 있다. 일명 ‘얼음 속 생명 이야기’는 서로 다른 양극의 하모니로 전혀 다른 조형적 완성미를 구현했다.
박 작가 작품의 ‘고유한 스타일’이 화단에서 빛을 발하게 된 것은 2004년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하면서일 것이다. 얼핏 봐도 극사실기법의 작품임에도 구상이 아닌 비구상 부문에서 대상을 받았다. 그만큼 그가 선보인 작품은 초기부터 미술계 내에서도 남다른 의미로 평가받았다. 또한 그와 함께 신사임당미술대전 대상이나 동아미술상 수상 이력 역시 그의 작가적 역량을 뒷받침해주는 대목이다. 물론 공모전 수상 이력이 작품의 질적 수준까지 가늠하는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지만, 대표성 있는 수상 이력은 장차 유망한 작가로서의 성장 가능성과 비전(vision)을 담보하는 객관적 수단이 되기도 한다.
박 작가의 최근 작품에선 새로운 변화의 시도가 엿보인다. 얼음 형상의 틀 속에 갇혔던 여러 소재들이나 얼음을 담았던 도자기는 사라졌다. 얼음 자체만으로 화면 전체를 채우고 있다. 마치 영화 <매트리스>의 한 장면을 보여주는 것처럼 신비스런 장면의 연출이다. 거대한 폭포의 물줄기를 클로즈업한 것 같기도 하고, 투명한 보석 줄기들이 영롱한 빛을 발산한다. 어쩌면 초창기부터 추구해 온 ‘물질의 삼태(三態)’를 또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려는 과정으로도 보인다. 어떤 형식이든 그의 ‘아이스캡슐’ 시리즈는 보는 이에게 아주 특별한 감성적 힐링을 선사한다. 변치 않는 삶의 환희를 꿈꾸게 한다. 현재 전시 작품 가격은 50호(90×116cm) 1800만 원, 100호(130×162cm) 2600만 원 정도로 형성돼 있다.
아티스트 박성민
1968년생. 홍익대 미술대학과 동 대학원에서 회화를 전공했으며, 노화랑(서울), S+갤러리(부산), 브라운베런스(독일), 박영덕화랑(서울) 등 국내외에서 개인전 10회를 가졌다. KIAF(코엑스, 서울), 마니프서울국제아트페어 특별전(한가람미술관, 서울), 극사실회화-눈을 속이다전(서울시립미술관), 부산비엔날레 한·중·일 극사실작가전(부산), 코리안 아트 쇼(미국 뉴욕), 마이애미 아트페어(미국), 미래의 작가전(노화랑, 서울), 칼슈르헤 아트페어(독일), 시카고 아트페어(미국), 더 솔 오브 코리안 컨템퍼러리 아트(인사아트센터, 서울), 현대미술 한·일전(오노갤러리, 일본) 등 다수의 기획단체전에 참여했다. 또한 이미 30대 시절 제23회 대한민국미술대전 대상, 제27회 동아미술제 동아미술상, 제4회 신사임당 미술대전 대상 등을 수상했다. 그의 작품은 현재 서울시립미술관, 용인민속미술관, 문화체육관광부, 문예진흥원, 거제삼성호텔, 강릉시청, 안동 MBC, 교원경주연수원, 일산삼성병원, 울산동서발전 등 여러 곳에 소장돼 있다.
1 <아이스캡슐>, 캔버스에 유채, 80×116cm, 2007년
2 <아이스캡슐>, 캔버스에 유채, 145×90cm, 2012년
3 <아이스캡슐>, 캔버스에 유채, 73×52cm, 2013년
4 , 캔버스에 유채, 140×140cm, 2017년
5 <아이스캡슐>, 캔버스에 유채, 100×100cm, 2015년
6 <아이스캡슐>, 캔버스에 유채, 50×50cm, 2011년
김윤섭은…
김윤섭은 미술평론가로서 명지대 대학원 미술사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및 서울시립미술관 작품가격 평가위원, (사)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 전문위원, 대한적십자사 문화나눔프로젝트 아트디렉터, 교보문고 교보아트스페이스 기획위원, 숙명여대·세종대 겸임교수, 2017 서울국제조각페스타 전시감독,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 등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