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tif in Art]구두(shoes): 잃어버린 짝을 찾아서, 모호한 존재의 증명
입력 2017-03-03 14:20:44
수정 2017-03-03 14:20:44
[LIFE & 한경 머니 = 박은영 문학박사·서울하우스 편집장]신데렐라가 마법에서 풀려났을 때 왜 유리구두만 사라지지 않았을까?
재투성이 부엌데기였던 신데렐라는 마법으로 공주가 돼 화려한 파티에 참석한다. 왕자를 만나 즐거웠던 시간도 잠시, 정해진 시각이 되자 그녀는 허겁지겁 무도회장을 떠난다. 집으로 돌아온 신데렐라는 다시 누추해졌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간다. 그런데 한 가지 남은 게 있었다. 그것은 파티에서 신었던 유리구두 한 짝이다.
신데렐라가 마법에서 풀려났을 때 왜 유리구두는 사라지지 않았을까? 다른 소지품도 많은데 그녀는 왜 하필 구두 한 짝을 떨어뜨리고 왔을까? 왕자가 그 구두로 신데렐라를 찾을 때 왜 그 많은 여자들의 발에 하나도 맞지 않았을까?
신데렐라의 구두를 둘러싼 수수께끼 중에서 우선 마지막 세 번째 질문부터 풀어보자. 왜 구두가 다른 여자의 발에는 맞지 않았는지. 신발은 신었을 때 진가를 발휘한다. 주인의 발에 편하게 꼭 맞아야 하고, 그러면 그의 몸처럼 가는 곳마다 늘 함께한다. 신발은 그것을 신은 사람과 분리할 수 없으며, 따로 남겨졌을 때도 주인의 흔적으로써 그의 존재를 가리키는 지표가 된다. 신발을 가지고 주인의 성별, 신분, 직업, 나이, 취향, 습관까지도 유추할 수 있다. 신데렐라가 신었던 유리구두는 바로 그녀의 존재나 다름없다. 다른 사람이 절대로 대신할 수 없는 유일한 존재. 그러니 천 명, 만 명이 신어도 맞을 리가 없다. 오직 신데렐라만이 신을 수 있는 것이다.
유일한 주인의 존재가 신발을 통해 증명되듯이 신발 자체의 존재도 사용자에 따라 결정된다. 철학자 마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주인 없이 구두만 단독으로 그린 그림을 예로 들어 ‘존재’ 즉 ‘있음’이란 무엇인지 명쾌한 해석을 내렸다. 대상이 된 그림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가 1886년 낡은 구두 한 쌍을 묘사한 작품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아무리 잘 만든 구두라도 누가 신지 않는다면 그 구두는 그저 사물(존재자)이지 ‘존재’가 아니다. 구두는 도구이기 때문에 그 ‘존재’란 용도에 맞게 사용될 때 비로소 발휘된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반 고흐의 구두가 농촌 아낙의 신발이라고 생각했다. 그 신발은 그녀가 밭고랑을 누비고 다니며 축적한 강인함을 지니고 있으며, 소박하고 경건한 농촌의 세계에 속한다. 하이데거는 반 고흐가 이처럼 구두의 사용 과정을 알려줌으로써 구두라는 ‘존재’를 충실히 묘사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농촌 아낙의 신발이라는 하이데거의 주장은 사실 증거가 없기에 미술사학자 마이어 샤피로(Meyer Schapiro)의 반대에 부딪혔다. 샤피로는 그 구두가 도시에서 신는 구두로, 반 고흐가 신었던 것이라고 반박했다. 따라서 그 그림은 해지고 주름진 인상을 가진 낡은 구두 자체의 진실한 초상화이며, 반 고흐에게 그 구두는 추억의 단편이자 하나의 신성한 유물이라고 강조했다.
농촌 아낙의 구두와 화가의 구두라는 상반된 주장 중에서 과연 어느 쪽이 사실일까? 이에 대해 해체주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그 신발이 누구의 것인지 아무도 정확히 알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신발의 주인을 밝히는 일이 도대체 왜 중요한지 반문한다. 또한 비슷한 두 개의 신발이 함께 있으면 으레 한 켤레라고 여기는 것도 고정관념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즉 데리다는 반 고흐의 ‘구두’가 한 켤레가 아니라 각각 다른 짝 두 개일 수도 있고 심지어 둘 다 왼쪽 신발처럼 보인다고 말한다.
데리다의 의도는 상투적 관념이나 인습의 틀을 깨려는 것이었다. 그러한 노력은 역으로 우리의 생각이나 행동이 얼마나 뿌리 깊이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지 확인시켜준다. 우리는 신발이 한 짝만 있으면 나머지 짝은 어디 있는지 궁금해하고 찾게 된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항상 잃어버린 것이나 부재하는 것을 채워야만 안심이 되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자들은 이런 짝짓기 본능은 우리가 태어나 어머니로부터 분리를 경험하며 생긴 근본적인 상실감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럼 다시 신데렐라 이야기로 돌아가 두 번째 질문에 답해보자. 신데렐라는 왜 하필 신발 한 짝을 떨어뜨리고 왔을까? 그녀가 잃어버린 유리구두는 자신의 반쪽인 짝을 부르는 신호인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짝짓기 본능을 자극한다. 당연히 구두를 습득한 왕자는 부재하는 나머지 한 짝을 떠올리고 찾아 나서게 된다. 신데렐라가 지닌 물건 중에서 꼭 필요하고 몸에 밀착돼 어디든 함께 가며 반드시 한 쌍으로 존재해야 하는 것이라면 신발 말고 무엇이 있겠는가?
이제 끝으로 첫 번째 질문. 마법이 풀린 후에도 유리구두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남은 이유는 무엇일까? 유리구두는 현실과 환상이라는 두 세계를 연결하는 매체이자 통로다. 환상이 깨진 후에도 구두가 남아 있었기에 신데렐라는 암담한 처지에서 탈출할 기회를 얻었다. 양쪽 세계에 또렷이 존재하는 유리구두는 단순히 신분 상승을 위한 끈이 아니라 현실이 아닌 또 다른 세계에 대한 일말의 단서를 남긴다. 마치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가 잃어버린, 혹은 동경하는 환상의 세계가 허구만은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반짝이는 유리구두는 두 세계에 걸쳐 있는 우리 존재의 모호한 명멸, 그러면서도 확실한 현존의 증거가 아닐까?
재투성이 부엌데기였던 신데렐라는 마법으로 공주가 돼 화려한 파티에 참석한다. 왕자를 만나 즐거웠던 시간도 잠시, 정해진 시각이 되자 그녀는 허겁지겁 무도회장을 떠난다. 집으로 돌아온 신데렐라는 다시 누추해졌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간다. 그런데 한 가지 남은 게 있었다. 그것은 파티에서 신었던 유리구두 한 짝이다.
신데렐라가 마법에서 풀려났을 때 왜 유리구두는 사라지지 않았을까? 다른 소지품도 많은데 그녀는 왜 하필 구두 한 짝을 떨어뜨리고 왔을까? 왕자가 그 구두로 신데렐라를 찾을 때 왜 그 많은 여자들의 발에 하나도 맞지 않았을까?
신데렐라의 구두를 둘러싼 수수께끼 중에서 우선 마지막 세 번째 질문부터 풀어보자. 왜 구두가 다른 여자의 발에는 맞지 않았는지. 신발은 신었을 때 진가를 발휘한다. 주인의 발에 편하게 꼭 맞아야 하고, 그러면 그의 몸처럼 가는 곳마다 늘 함께한다. 신발은 그것을 신은 사람과 분리할 수 없으며, 따로 남겨졌을 때도 주인의 흔적으로써 그의 존재를 가리키는 지표가 된다. 신발을 가지고 주인의 성별, 신분, 직업, 나이, 취향, 습관까지도 유추할 수 있다. 신데렐라가 신었던 유리구두는 바로 그녀의 존재나 다름없다. 다른 사람이 절대로 대신할 수 없는 유일한 존재. 그러니 천 명, 만 명이 신어도 맞을 리가 없다. 오직 신데렐라만이 신을 수 있는 것이다.
유일한 주인의 존재가 신발을 통해 증명되듯이 신발 자체의 존재도 사용자에 따라 결정된다. 철학자 마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주인 없이 구두만 단독으로 그린 그림을 예로 들어 ‘존재’ 즉 ‘있음’이란 무엇인지 명쾌한 해석을 내렸다. 대상이 된 그림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가 1886년 낡은 구두 한 쌍을 묘사한 작품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아무리 잘 만든 구두라도 누가 신지 않는다면 그 구두는 그저 사물(존재자)이지 ‘존재’가 아니다. 구두는 도구이기 때문에 그 ‘존재’란 용도에 맞게 사용될 때 비로소 발휘된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반 고흐의 구두가 농촌 아낙의 신발이라고 생각했다. 그 신발은 그녀가 밭고랑을 누비고 다니며 축적한 강인함을 지니고 있으며, 소박하고 경건한 농촌의 세계에 속한다. 하이데거는 반 고흐가 이처럼 구두의 사용 과정을 알려줌으로써 구두라는 ‘존재’를 충실히 묘사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농촌 아낙의 신발이라는 하이데거의 주장은 사실 증거가 없기에 미술사학자 마이어 샤피로(Meyer Schapiro)의 반대에 부딪혔다. 샤피로는 그 구두가 도시에서 신는 구두로, 반 고흐가 신었던 것이라고 반박했다. 따라서 그 그림은 해지고 주름진 인상을 가진 낡은 구두 자체의 진실한 초상화이며, 반 고흐에게 그 구두는 추억의 단편이자 하나의 신성한 유물이라고 강조했다.
농촌 아낙의 구두와 화가의 구두라는 상반된 주장 중에서 과연 어느 쪽이 사실일까? 이에 대해 해체주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그 신발이 누구의 것인지 아무도 정확히 알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신발의 주인을 밝히는 일이 도대체 왜 중요한지 반문한다. 또한 비슷한 두 개의 신발이 함께 있으면 으레 한 켤레라고 여기는 것도 고정관념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즉 데리다는 반 고흐의 ‘구두’가 한 켤레가 아니라 각각 다른 짝 두 개일 수도 있고 심지어 둘 다 왼쪽 신발처럼 보인다고 말한다.
데리다의 의도는 상투적 관념이나 인습의 틀을 깨려는 것이었다. 그러한 노력은 역으로 우리의 생각이나 행동이 얼마나 뿌리 깊이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지 확인시켜준다. 우리는 신발이 한 짝만 있으면 나머지 짝은 어디 있는지 궁금해하고 찾게 된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항상 잃어버린 것이나 부재하는 것을 채워야만 안심이 되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자들은 이런 짝짓기 본능은 우리가 태어나 어머니로부터 분리를 경험하며 생긴 근본적인 상실감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럼 다시 신데렐라 이야기로 돌아가 두 번째 질문에 답해보자. 신데렐라는 왜 하필 신발 한 짝을 떨어뜨리고 왔을까? 그녀가 잃어버린 유리구두는 자신의 반쪽인 짝을 부르는 신호인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짝짓기 본능을 자극한다. 당연히 구두를 습득한 왕자는 부재하는 나머지 한 짝을 떠올리고 찾아 나서게 된다. 신데렐라가 지닌 물건 중에서 꼭 필요하고 몸에 밀착돼 어디든 함께 가며 반드시 한 쌍으로 존재해야 하는 것이라면 신발 말고 무엇이 있겠는가?
이제 끝으로 첫 번째 질문. 마법이 풀린 후에도 유리구두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남은 이유는 무엇일까? 유리구두는 현실과 환상이라는 두 세계를 연결하는 매체이자 통로다. 환상이 깨진 후에도 구두가 남아 있었기에 신데렐라는 암담한 처지에서 탈출할 기회를 얻었다. 양쪽 세계에 또렷이 존재하는 유리구두는 단순히 신분 상승을 위한 끈이 아니라 현실이 아닌 또 다른 세계에 대한 일말의 단서를 남긴다. 마치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가 잃어버린, 혹은 동경하는 환상의 세계가 허구만은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반짝이는 유리구두는 두 세계에 걸쳐 있는 우리 존재의 모호한 명멸, 그러면서도 확실한 현존의 증거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