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이현주 기자] 대안 미술 공간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대안(alternative)이라는 용어답게 제도화된 미술 시장에 대응하며 새바람을 일으켜 왔다. 문제를 알아야 대안도 나온다. 알고 보면 대안 공간의 역사는 국내 미술 시장의 가장 뜨거운 이야기들의 흐름이다.
[SPECIAL Alternative Space]미술인들의 미술관
스타 작가의 요람, 그리고 새로운 질서
대안 공간은 최근 몇 년간 급부상한 복합 문화 공간과는 또 다른 공간이다. 주택가 골목, 건물 지하, 동네 어귀와 같이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숨어 있고, 규모도 작아 아는 사람만 찾아간다는 ‘작은 미술관’에 해당한다. ‘화이트 큐브’로 불리는 대형 갤러리와는 또 다른 매력을 가진 이곳은,미술인들 사이에선 꽤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곳이다. 대안 공간의 어제와 오늘, 그 속에서의 스타 작가 시스템에 대해 들여다봤다.
#설치미술가 양혜규(45)는 세계 미술 시장에서 근래 가장 종횡무진 활약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6월 스위스 아트바젤과 포르투갈 세할베스 현대미술관을 거쳐, 7월부터 프랑스 파리의 퐁피두센터에서 개인전을 갖는데 1층 중앙홀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했다. 양혜규가 유럽이 주무대라면, 아시아 쪽에서는 최정화(55)가 유명하다. 또한 정연두(47), 이용백(50), 함경아(50) 등도 해외에서 활동이 두드러진다.
#미술계의 올림픽인 베니스 비엔날레에서도 한국 작가들이 좋은 성적을 거뒀다. 작가 겸 영화감독 임흥순(47)이 지난해 한국인 최초로 베니스 비엔날레 은사자상을 수상한 것은 달라진 한국 현대미술의 위상을 보여준다. 같은 기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에서 전시를 한 전준호(47)는 세계 3대 비엔날레에 모두 초청되는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2년마다 한 번 열리는 이 글로벌 축제에서, 내년 초대 작가가 된 이완(38)은 젊은 작가로서 세대교체를 예고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한국 미술의 국제 위상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홍콩, 뉴욕 등 경매 시장에서 단색화의 눈부신 활약은 유례가 없는 것이었고, 한국 현대미술에 대한 조명이 함께 이뤄지고 있다. 세계 유수 갤러리와 미술관의 러브콜이 잇달면서, K(Korea)컬처로서 한국 미술의 가능성에도 청신호가 켜졌다. 앞에서 언급한 한국 현대미술의 대표 선수들이 선봉에 서 있다.
장르도, 이력도, 주 무대도 다른 이들 작가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대안 공간이라는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 대안 공간에서 배출됐거나 주요 개인전을 열고, 대안 공간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이들이다. 물론 미술계 파워 구성 요소는 갤러리, 옥션, 공공미술 등으로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대안 공간은 작가 중심의 자유로운 미술 실험이 가능하고, 동시대 예술 담론을 형성하며 국내외 네트워크를 통해 해외 활동의 기반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스타 작가 탄생의 숨은 조력자 역할을 한 셈이다.
놀랍게도 지금 한국 현대미술의 중심에 서 있는 주류 미술계의 8할은 대안 공간을 중심으로 성장해 왔다. 함영준 일민미술관 책임 큐레이터는 “지금 1965~1975년생 유명 작가들의 이름을 떠올리면 거의 대안 공간에서 배출됐다는 점을 알 수 있다”며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중반까지 한국 미술 역사에서 대안 공간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곳에서 주요 작가들이 성장을 해 지금의 주축이 됐다”고 말했다.
1세대 대안 공간의 성과, 미술계 지형도 변하다
이름도 낯선 대안 공간이 우리 시대 스타 작가들의 요람이라고 하면 다소 고개가 갸웃해진다. 과연 대안 공간은 어떤 곳이며 어떻게 주류 미술인들을 배출했나. 이를 위해서는 잠시 과거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대안(alternative)이라는 개념에는 기존 형식의 틀을 거부한다는 의미가 포함돼 있다. 대안 공간(alternative space)은 1970년대 미국에서 먼저 시작된 일종의 문화 운동으로, 새로운 예술로서의 대안적인 실험을 하는 장소의 개념이 강했다. 1990년대 말 국내에 들어온 대안 공간은 미술계의 구조적 문제점에서 독립(independent)한다는 취지로 더 잘 설명된다.
‘학맥’과 ‘인맥’이 좌우하는 작가 등단 시스템에서 독립적이고 새로운 등용문을 찾는 미술계의 움직임 속에 대안 공간이 싹튼 것. 많은 신진 작가들은 전시 공간이 절실했고 이곳을 통해 무명에서 유명으로 거듭났다.
국내에서 대안 공간의 출연은 1999년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졌다. 국내 대안 공간 시대를 연 1세대 대안 공간으로는 크게 3곳이 꼽힌다. 대안 공간 루프(1999년~), 사루비아 다방(1999년~), 아트스페이스 풀(1999년~)이 그곳이다. 여기에 지금은 문화예술위원회 산하기관으로 편입된 인사미술공간(2000년~)이 가세했고, 기업이 운영하는 쌈지스페이스(1998~2008년)도 비영리 전시 공간으로 중요한 축을 차지했다.
2000년대 이후 중반까지는 대안 공간의 전성기로 불린다. 2000년대 초반 1.5세대로 분류되는 대안 공간들이 속속 나왔고, 전국 각지에서 지역성을 강조한 2세대 공간도 출연했다. 대안 공간의 성장과 함께 굵직한 역사들도 쓰였다. 2000년 공공기금의 지원이 시작됐고, 2004년 대안 공간들의 모임인 비영리전시공간협의회가 결성되며, 2005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아르코)가 생겼다. 부산에서 오픈 스페이스 배를 운영하는 서상호 비영리전시공간협의회 회장은 “우리가 하는 실험을 보고 정책이 만들어지고, 개별 작가나 기획자에 대한 지원도 시작됐다”며 “이때가 호시절이었다”고 회상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위기론이 부상했으나 2016년 현재 비영리전시공간협의회에 등록된 대안 공간은 20곳, 비회원까지 포함하면 50여 곳으로 여전히 그 수가 적지 않다.
미술 시장에서 대안 공간의 주된 역할이라 함은 ‘제3의 플랫폼’ 기능에 있다. 대안 공간은 생산(창작), 유통(매개), 소비(향유)의 관점에서 유통에 해당하는 공간이다. 세부적으로 보면 국공립·사립 미술관, 상업 화랑(갤러리), 대관 화랑(코엑스, 예술의 전당 등), 대안 공간으로 구분되고, 대안 공간은 다른 플랫폼에 비해 ‘실험성’이 중시되는 게 특징이다. ‘비영리성’, ‘독립성’도 함께 추구했다. 뭔지 모르지만 일단 실험해보고, 비평에 비평을 더하면서 ‘지금 여기’ 동시대 예술(컨템퍼러리 아트)을 정의해 온 것이다. 일부 블루칩 작가군이 주요 갤러리에서 고가의 작품을 거래하는 기존 제도권 패턴에서, 대안 공간이 종적, 횡적 다양성을 추구했다는 게 성과로 꼽힌다. 서상호 대표는 “출신 학교와 교수 추천에 의해 작가 데뷔가 결정됐던 관행이 많이 없어지고 작가의 가능성으로 미술계 내에서 평가받는 구조가 정착된 것은 대안 공간이 바꾼 지형이면서 중요한 변화다”라고 말했다. 큐레이터십이 강조되고, 강화된 것도 대안 공간을 통해 확산된 문화다.
그동안 대안 공간을 거쳐 간 작가들은 수없이 많다. 한 작가가 여러 대안 공간을 거치기도 하지만, 공간별로 주요 작가군이 나뉜다. 작가들의 면면은 이렇다. 함경아·권오상·박미나·홍영인·이동기·김기라·성낙희·이환권·임민욱·정연두 등(이상 루프), 임흥수·믹스라이스·김용익·박찬경·황세준·정은영·송상희·옥정호·조습·권용주 등(풀), 함진·정수진·배종선·김주현·김을·오인환·박기원·박소영·강영민·안두진·남화연 등(사루비아 다방).
지금은 40~50대 중견 작가들이지만 당시만 해도 신인이었다. 특히 미술계 고질적인 파벌(서울대 vs 홍익대) 싸움에서 대안 공간을 통해 제3의 대학 출신들이 주목 받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베니스 비엔날레 은사자상 주인공, 임흥순이다. 그는 가천대 출신인데, 한 가지 재밌는 부분은 대안 공간에서 가장 주목 받은 대학 중 하나가 가천대라는 것이다. 루프를 만든 서진석 전 디렉터를 비롯해 김기라, 조습, 함진, 홍경택 등이 모두 같은 대학 출신이다. 제3의 대학 출신들이 국제무대에서 스타 작가로 부상하는 것은 미술계에서는 ‘이변’으로 통했다.
대안 공간이 현재의 한국 미술계 지형을 만드는 데 중요한 요람 역할을 한 데는 작가뿐만 아니라 큐레이터, 디렉터, 비평가 등도 함께 성장하면서다. 특히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장은 전 쌈지스페이스의 관장으로서, 수많은 신인들을 발굴했다. 김홍희 관장 시절 쌈지스페이스 레지던시를 거친 이들 중 이형구, 박찬경, 정연두, 김홍석, 앙혜규, 조습, 함진 등 스타 작가가 많다. 이 밖에 올해 미디어시티 서울 디렉터를 맡은 백지숙 전시감독은 풀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온 이론가다.
1세대 대안 공간 출신 작가들은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스타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이성희 풀 디렉터는 “일례로 풀의 전임 디렉터가 임흥순, 믹스라이스 등의 작가들을 해외 비엔날레와 기획전시에 적극적으로 추천해서, 해외 활동에 기반을 마련해준 것으로 안다”며 “현재 풀에서는 작가 분들을 젊은 작가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에 심사위원이나 멘토로 초대하기도 하고, 자문을 구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루프 관계자는 “전시 공간을 지원할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프로모션하고 긴밀한 국내외 네트워크를 통해 국제 프로그램에 지원하는 노력을 한다”며 “국내 대안 공간에서 대안성이라는 것은 대항이나 저항이 아닌 보안이나 보충의 개념으로, 주류 미술계와 관계성을 갖고 작가를 발굴하고 연결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징검다리’ 역할을 한 대안 공간
미술 시장 스타 시스템의 측면에서도 대안 공간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아이돌 스타가 기획사, 미디어, 팬에 의해 탄생하듯이, 미술계에서도 한 명의 스타 작가가 탄생하기까지 여러 이해관계자들이 작가를 중심으로 원을 형성한다. 대안 공간, 레지던시, 창작 공간 등에서 발굴돼 국공립·사립 미술관, 상업 화랑으로 진출하는 경로가 일반적인 등단 과정이다. 현대미술에서 좋은 작품은 양질의 작업과 의미 부여와 해석을 통해 만들어진다. 중요한 건, 미술 관계자들의 ‘크리틱(평론)’, 또한 미술 관계자들이 형성하고 있는 궤도 안으로의 진입이다. 한 공공미술 전문 업체 A 대표는 “소수 대형 갤러리에 자본이 집중되고 기업화되면서, 대형 갤러리가 직접 작가를 발굴하기보다는 작은 갤러리나 대안 공간에서 발굴하는 작가를 ‘스카우트’하는 형태가 고착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예술경영지원센터의 2015년 미술 시장 실태조사에 따르면 국내 상위 톱 10 갤러리가 전체 매출의 82.6%를 차지한다. 또한 국내 대형 갤러리의 전시 규모는 점점 커지고 있다.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스타 작가를 선호하기 마련이다. 이 때문에 직접 신진 작가를 발굴하기보다 ‘검증된 작가’를 스카우트하는 쪽을 택한다. A 대표는 “개인적으로도 작가를 찾을 때 대안 공간이나 비영리 스튜디오 등을 먼저 찾는 편이다”라고 말했다.
만약 대안 공간에서 국공립·사립 미술관, 상업 화랑으로 진출하는 작가의 성장 과정에서, 해외 비엔날레의 경력이 추가된다면 이것은 확실한 이력으로 통한다. 폴 도렐의 도서 <미술가로 살아가기>에 따르면 비엔날레나 대안 공간은 직접 미술품 거래가 이루어지는 시장은 아니지만 유망한 미술품의 발굴과 가치 상승을 도와줌으로써 시장에서 그 거래를 활성화하는 간접적인 매개 역할을 한다. 특히 비엔날레를 통해 발굴되며 주목을 받게 된 아티스트들은 이후 미술 시장에서도 주요한 생산자로 부각된다. 따라서 미술 시장에서 세계 유수의 비엔날레들이 어느 시장주체들 못지않게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국내에 대안 공간이 출현한 지도 어언 17년이 지났다. 명암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평가를 얻는 가운데, 최근 이슈는 ‘경제성’에 모아진다. 공공기금에 의존하는 형태는 여러 문제를 낫는다. 대안 공간을 지원하는 공공기금은 문화예술진흥위원회의 시각예술창작산실 공간 지원으로, 2016년 기준 연간 1억 원 예산을 34개 공간에 배분한다. 대안 공간(약 40%)뿐 아니라 소규모 갤러리(약 40%), 창작 공간(약 20%)도 지원 대상으로 적은 수에게만 혜택이 돌아간다. 더욱이 문화진흥기금은 2018년 고갈될 예정이다. 비영리 공간을 ‘영리한 공간’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에 따라 ‘자립’과 ‘자생’의 관점에서 최근 중요한 흐름이 포착되는데, 바로 ‘신생 공간’이다. 대안 공간의 3세대 격으로 해석되는 신생 공간은, “대안 공간이 더 이상 대안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20~30대 젊은 작가들에 의해 시도되는 실험이다. 과거 1세대 대안 공간들이 기존 제도권 미술에 대응하며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낸 뒤 17년 만에 ‘대안에 대한 대안’을 내놓은 새로운 세대의 출현이다.
아트스페이스 풀·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다방
1세대 대안 공간의 진화는 현재 진행 중
“17년의 궤적…우리만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
아트스페이스 풀은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 볼 수 있는 외형과는 조금 달랐다. 오래된 단층 주택을 개조한 공간으로, 고즈넉한 동네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7월 현재 <퇴폐미술전>이 열리는데, 이곳 전시는 모두 무료로 개방되고 있다. “아는 분들은 일부러 찾아서 오시는 편이고,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공간은 아니지만 미술인들에게는 놀이터와 같은 곳이다.” 김미정 큐레이터의 설명이다.
과거 대안 공간의 주요 역할이었던 신진 작가 발굴과 공모전 및 레지던시 프로그램이 미술계 전반적으로 확산되면서, ‘대안의 대안’은 대안 공간 사이에서도 꾸준히 논의돼 왔다. 1세대 대안 공간들은 ‘진화’하는 방향을 택했다. 다른 곳과 차별된 풀의 역할에 대해 이성희 아트스페이스 풀 디렉터는 “작가의 행보를 함께하는 것으로 전시를 같이 했던 것이 계기가 돼 계속 교류하고 작가 작업에 조언하기도 하며, 출판 작업을 같이 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풀은 일종의 커뮤니티 공간이며, 작가들에게 플랫폼 역할을 한다.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다방은 서울 종로구 인사동 정독도서관 인근에 자리하고 있다. 2014년 운영 체계를 확 바꾼 사루비아 다방은 미술인 회원들의 순수 기부(연회비)로 운영되고 있다. 이관훈 사루비아 다방 큐레이터 겸 대표는 “그동안 어려움도 있었지만, 이곳 출신 작가들과 사루비아 다방을 아끼는 이들이 먼저 힘이 돼 줘서,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다”며 “기존 공간들은 그곳만이 할 수 있는 나름대로의 역할이 분명히 있다”고 말했다.
사루비아 다방은 ‘공간을 십분 활용한 전시’에 오랜 기간 강점이 있어 왔다. 모든 전시에 프로젝트 개념을 강조하고, 작가가 공간에 최적화된 작업을 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이와 함께 1999년 22세의 대학생이었던 함진 작가를 시작으로 최근까지 신진 작가 발굴에 힘쓰고 있다. 일례로, 내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에 초대 받은 젊은 작가 이완이 최근 사루비아 다방을 통해 발굴된 스타 작가다. 또한 2012년 전시를 연 양정욱은 이곳 전시를 출발선 삼아, OCI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일본 도쿄의 국립신미술관 등으로 진출한 라이징 스타다. 지난해 전시를 연 유목연은 곧바로 두산연강예술상을 받고 파리국제예술공동체 시테에 선정되는 단계를 밟아 나갔다.
왜 신생 공간인가?
[신생 공간이란, 젊은 미술 작가들이 주축이 돼 전시 공간의 문턱을 낮추기 위해 직접 만든 공간으로,대체로 저렴한 임대료의 소규모를 지향한다.]
최근 신생 공간이 주목 받는 건,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공통된 목소리를 내는 하나의 ‘군’을 형성하면서다. 과거 1세대 대안 공간이 동시다발적으로 생겨난 것은 당시 외환위기 관리 체제를 지나오는 격변기, 유학파를 중심으로 형성된 새로운 흐름이었다. 2014년 이후 현재까지, 우후죽순 뜨고 지는 신생 공간은 미술계 내에서 하나의 새로운 흐름을 예고하는 것처럼 보인다.
대안 공간이 ‘연대’로 통한다면, 신생 공간은 ‘개별성’을 띠는 게 특징이다. 제각각 흩어져 활동하고 공간의 성격이나 운영 방식도 다르다. 주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금세 생겼다 없어지는 공간이 많은 것도 독특한 점이다.
“기존 대안 공간이 다 똑같지 않지만 예술계의 모순적 상황을 극복해보려는 명료한 대안성이 있었다면, 최근 1~2년 사이 생겨나는 신생 공간들은 공공성이나 담론을 표현하기보다 자조적이고 ‘뭐라도 해보자’는 심정으로 단발적인 활동을 하는 경향을 보인다.”(백기영 서울시립미술관 학예연구부장)
자조적이고 초단발적인 성격이면서 동시에 감각적이다. 이름도 구탁소(세탁소가 있던 자리에 만든 공간), 우정국(옛 창전동 우체국을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 지금 여기(자조적이고 현실 직시적인 표현), 청량 엑스포(지역 이름을 땀), 800/40(전세 800만 원에 월세 40만 원의 물리적인 현실을 표현) 등으로 다양하다. 이들 신생 공간의 비평 담론 웹진인 크리티칼은 분류 체계가 ‘긴 글’, ‘짧은 글’로 딱 2개뿐이다. 주제도 진지하고 무거운 담론이 아닌 생업 조건의 문제, 부조리한 미술 현실 등 오늘의 삶이다.
대안 공간과 신생 공간은 세대론으로 구분되기도 한다. 대안 공간과 신생 공간의 중간 즈음에 있는 스페이스 오뉴월 관계자는 “대안 공간의 운영 주체가 더 이상 신진이 아니라는 데서 요즘 젊은 작가들과는 세대로 구분되는데, 젊은 작가들이 이미 이름이 많이 알려진 공간에 들어간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라며 “작가로 살아가기 어려운 현실에 대한 대안으로 누군가의 선택을 받기를 기다리지 않고, 자발적으로 공간을 만들고 하고 싶은 활동을 하는 움직임이다”라고 말했다. 이들은 SNS를 통해 자체 팬과 브랜드를 확보하고, 신생 공간끼리의 소통도 SNS를 통해 빠르게 이뤄진다.
그렇게 만든 신생 공간의 아트페어, <굿-즈>는 지난해 10월 화제를 모으며 2박 3일간 6000명 관객, 약 1억 원 매출이라는 하나의 기록을 썼다.
특히 반지하에서 프로젝트를 하고, 일민미술관의 <뉴 스킨:본뜨고 연결하기>전에 참여한 후,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바벨>전과 최근 국제 갤러리 <유명한 무명> 그룹전에 초대된 김희천 작가는 미술계의 주목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신생 공간 커먼센터를 2년간 운영하고, 현재 일민미술관 책임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는 함영준은 “커먼센터에 있을 때 김희천 작가를 눈여겨보면서 일민미술관 전시에 초대를 했는데, 뒤이어 국공립 미술관과 상업 갤러리로도 진출하게 됐다”고 말했다.
올해 2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신생 공간들의 전시 <서울 바벨>전은 제도권 미술계에서 진지하게 신생 공간의 경향성을 이해하고 미술 지형의 변화를 모색해보는 자리였다. 백기영 학예연구부장은 “전시에 참여했던 이들이 여러 기획전에 선발되는 것을 보면서 단순히 외형적인 변화가 아니라 태도적인 변화를 포함한 미술계의 미학적 체계나 담론 체계가 바뀌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최근 서울시립미술관이 진행한 평론 공모전에서 80%가량은 모두 신생 공간에 대한 연구였다. 백기영 학예연구부장은 “SNS로 소통해서인지 동시대 해외 미술 경향을 풀어내는 데는 신생 공간이 더 빠르게 움직이는 것 같다”며 “아직 신생 공간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기 때문에 앞으로 어떻게 지형이 바뀌어갈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부분이다”라고 말했다.
신생 공간 미니 인터뷰 - 합정지구
“워크숍 모델을 통해 자체 수입 낸다”
서울 마포구 합정동 동네 어귀에 위치한 합정지구는 지난해 문을 연 주목 받는 신생 공간 중 한 곳이다. 이곳 이제 대표는 30대의 미술 작가다. 작가 5명과 함께 공간을 꾸리고 있다. 이제 대표는 공간 운영의 몇 가지 원칙을 갖고 있다. 합정지구는 작가들의 작업과 전시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또한 운영 방식은 공적 기금에서 독립적인 방향을 지향한다.
이를 위해 새롭게 시도한 실험은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워크숍이다. 일종의 아마추어 화실인 셈인데, 소그룹으로 모여 그림도 그리고, 강의도 듣고, 토론도 연다. 동네 중학생부터 직장인, 주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알음알음 모여들었다. 이제 대표는 “워크숍을 통해 월세 정도는 내고 있다”며 “전체 수익 구조의 약 50%가 자체 수입이고 20%가 지자체의 마을사업 예산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SPECIAL Alternative Space]미술인들의 미술관
스타 작가의 요람, 그리고 새로운 질서
대안 공간은 최근 몇 년간 급부상한 복합 문화 공간과는 또 다른 공간이다. 주택가 골목, 건물 지하, 동네 어귀와 같이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숨어 있고, 규모도 작아 아는 사람만 찾아간다는 ‘작은 미술관’에 해당한다. ‘화이트 큐브’로 불리는 대형 갤러리와는 또 다른 매력을 가진 이곳은,미술인들 사이에선 꽤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곳이다. 대안 공간의 어제와 오늘, 그 속에서의 스타 작가 시스템에 대해 들여다봤다.
#설치미술가 양혜규(45)는 세계 미술 시장에서 근래 가장 종횡무진 활약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6월 스위스 아트바젤과 포르투갈 세할베스 현대미술관을 거쳐, 7월부터 프랑스 파리의 퐁피두센터에서 개인전을 갖는데 1층 중앙홀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했다. 양혜규가 유럽이 주무대라면, 아시아 쪽에서는 최정화(55)가 유명하다. 또한 정연두(47), 이용백(50), 함경아(50) 등도 해외에서 활동이 두드러진다.
#미술계의 올림픽인 베니스 비엔날레에서도 한국 작가들이 좋은 성적을 거뒀다. 작가 겸 영화감독 임흥순(47)이 지난해 한국인 최초로 베니스 비엔날레 은사자상을 수상한 것은 달라진 한국 현대미술의 위상을 보여준다. 같은 기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에서 전시를 한 전준호(47)는 세계 3대 비엔날레에 모두 초청되는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2년마다 한 번 열리는 이 글로벌 축제에서, 내년 초대 작가가 된 이완(38)은 젊은 작가로서 세대교체를 예고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한국 미술의 국제 위상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홍콩, 뉴욕 등 경매 시장에서 단색화의 눈부신 활약은 유례가 없는 것이었고, 한국 현대미술에 대한 조명이 함께 이뤄지고 있다. 세계 유수 갤러리와 미술관의 러브콜이 잇달면서, K(Korea)컬처로서 한국 미술의 가능성에도 청신호가 켜졌다. 앞에서 언급한 한국 현대미술의 대표 선수들이 선봉에 서 있다.
장르도, 이력도, 주 무대도 다른 이들 작가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대안 공간이라는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 대안 공간에서 배출됐거나 주요 개인전을 열고, 대안 공간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이들이다. 물론 미술계 파워 구성 요소는 갤러리, 옥션, 공공미술 등으로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대안 공간은 작가 중심의 자유로운 미술 실험이 가능하고, 동시대 예술 담론을 형성하며 국내외 네트워크를 통해 해외 활동의 기반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스타 작가 탄생의 숨은 조력자 역할을 한 셈이다.
놀랍게도 지금 한국 현대미술의 중심에 서 있는 주류 미술계의 8할은 대안 공간을 중심으로 성장해 왔다. 함영준 일민미술관 책임 큐레이터는 “지금 1965~1975년생 유명 작가들의 이름을 떠올리면 거의 대안 공간에서 배출됐다는 점을 알 수 있다”며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중반까지 한국 미술 역사에서 대안 공간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곳에서 주요 작가들이 성장을 해 지금의 주축이 됐다”고 말했다.
1세대 대안 공간의 성과, 미술계 지형도 변하다
이름도 낯선 대안 공간이 우리 시대 스타 작가들의 요람이라고 하면 다소 고개가 갸웃해진다. 과연 대안 공간은 어떤 곳이며 어떻게 주류 미술인들을 배출했나. 이를 위해서는 잠시 과거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대안(alternative)이라는 개념에는 기존 형식의 틀을 거부한다는 의미가 포함돼 있다. 대안 공간(alternative space)은 1970년대 미국에서 먼저 시작된 일종의 문화 운동으로, 새로운 예술로서의 대안적인 실험을 하는 장소의 개념이 강했다. 1990년대 말 국내에 들어온 대안 공간은 미술계의 구조적 문제점에서 독립(independent)한다는 취지로 더 잘 설명된다.
‘학맥’과 ‘인맥’이 좌우하는 작가 등단 시스템에서 독립적이고 새로운 등용문을 찾는 미술계의 움직임 속에 대안 공간이 싹튼 것. 많은 신진 작가들은 전시 공간이 절실했고 이곳을 통해 무명에서 유명으로 거듭났다.
국내에서 대안 공간의 출연은 1999년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졌다. 국내 대안 공간 시대를 연 1세대 대안 공간으로는 크게 3곳이 꼽힌다. 대안 공간 루프(1999년~), 사루비아 다방(1999년~), 아트스페이스 풀(1999년~)이 그곳이다. 여기에 지금은 문화예술위원회 산하기관으로 편입된 인사미술공간(2000년~)이 가세했고, 기업이 운영하는 쌈지스페이스(1998~2008년)도 비영리 전시 공간으로 중요한 축을 차지했다.
2000년대 이후 중반까지는 대안 공간의 전성기로 불린다. 2000년대 초반 1.5세대로 분류되는 대안 공간들이 속속 나왔고, 전국 각지에서 지역성을 강조한 2세대 공간도 출연했다. 대안 공간의 성장과 함께 굵직한 역사들도 쓰였다. 2000년 공공기금의 지원이 시작됐고, 2004년 대안 공간들의 모임인 비영리전시공간협의회가 결성되며, 2005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아르코)가 생겼다. 부산에서 오픈 스페이스 배를 운영하는 서상호 비영리전시공간협의회 회장은 “우리가 하는 실험을 보고 정책이 만들어지고, 개별 작가나 기획자에 대한 지원도 시작됐다”며 “이때가 호시절이었다”고 회상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위기론이 부상했으나 2016년 현재 비영리전시공간협의회에 등록된 대안 공간은 20곳, 비회원까지 포함하면 50여 곳으로 여전히 그 수가 적지 않다.
미술 시장에서 대안 공간의 주된 역할이라 함은 ‘제3의 플랫폼’ 기능에 있다. 대안 공간은 생산(창작), 유통(매개), 소비(향유)의 관점에서 유통에 해당하는 공간이다. 세부적으로 보면 국공립·사립 미술관, 상업 화랑(갤러리), 대관 화랑(코엑스, 예술의 전당 등), 대안 공간으로 구분되고, 대안 공간은 다른 플랫폼에 비해 ‘실험성’이 중시되는 게 특징이다. ‘비영리성’, ‘독립성’도 함께 추구했다. 뭔지 모르지만 일단 실험해보고, 비평에 비평을 더하면서 ‘지금 여기’ 동시대 예술(컨템퍼러리 아트)을 정의해 온 것이다. 일부 블루칩 작가군이 주요 갤러리에서 고가의 작품을 거래하는 기존 제도권 패턴에서, 대안 공간이 종적, 횡적 다양성을 추구했다는 게 성과로 꼽힌다. 서상호 대표는 “출신 학교와 교수 추천에 의해 작가 데뷔가 결정됐던 관행이 많이 없어지고 작가의 가능성으로 미술계 내에서 평가받는 구조가 정착된 것은 대안 공간이 바꾼 지형이면서 중요한 변화다”라고 말했다. 큐레이터십이 강조되고, 강화된 것도 대안 공간을 통해 확산된 문화다.
그동안 대안 공간을 거쳐 간 작가들은 수없이 많다. 한 작가가 여러 대안 공간을 거치기도 하지만, 공간별로 주요 작가군이 나뉜다. 작가들의 면면은 이렇다. 함경아·권오상·박미나·홍영인·이동기·김기라·성낙희·이환권·임민욱·정연두 등(이상 루프), 임흥수·믹스라이스·김용익·박찬경·황세준·정은영·송상희·옥정호·조습·권용주 등(풀), 함진·정수진·배종선·김주현·김을·오인환·박기원·박소영·강영민·안두진·남화연 등(사루비아 다방).
지금은 40~50대 중견 작가들이지만 당시만 해도 신인이었다. 특히 미술계 고질적인 파벌(서울대 vs 홍익대) 싸움에서 대안 공간을 통해 제3의 대학 출신들이 주목 받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베니스 비엔날레 은사자상 주인공, 임흥순이다. 그는 가천대 출신인데, 한 가지 재밌는 부분은 대안 공간에서 가장 주목 받은 대학 중 하나가 가천대라는 것이다. 루프를 만든 서진석 전 디렉터를 비롯해 김기라, 조습, 함진, 홍경택 등이 모두 같은 대학 출신이다. 제3의 대학 출신들이 국제무대에서 스타 작가로 부상하는 것은 미술계에서는 ‘이변’으로 통했다.
대안 공간이 현재의 한국 미술계 지형을 만드는 데 중요한 요람 역할을 한 데는 작가뿐만 아니라 큐레이터, 디렉터, 비평가 등도 함께 성장하면서다. 특히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장은 전 쌈지스페이스의 관장으로서, 수많은 신인들을 발굴했다. 김홍희 관장 시절 쌈지스페이스 레지던시를 거친 이들 중 이형구, 박찬경, 정연두, 김홍석, 앙혜규, 조습, 함진 등 스타 작가가 많다. 이 밖에 올해 미디어시티 서울 디렉터를 맡은 백지숙 전시감독은 풀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온 이론가다.
1세대 대안 공간 출신 작가들은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스타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이성희 풀 디렉터는 “일례로 풀의 전임 디렉터가 임흥순, 믹스라이스 등의 작가들을 해외 비엔날레와 기획전시에 적극적으로 추천해서, 해외 활동에 기반을 마련해준 것으로 안다”며 “현재 풀에서는 작가 분들을 젊은 작가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에 심사위원이나 멘토로 초대하기도 하고, 자문을 구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루프 관계자는 “전시 공간을 지원할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프로모션하고 긴밀한 국내외 네트워크를 통해 국제 프로그램에 지원하는 노력을 한다”며 “국내 대안 공간에서 대안성이라는 것은 대항이나 저항이 아닌 보안이나 보충의 개념으로, 주류 미술계와 관계성을 갖고 작가를 발굴하고 연결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징검다리’ 역할을 한 대안 공간
미술 시장 스타 시스템의 측면에서도 대안 공간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아이돌 스타가 기획사, 미디어, 팬에 의해 탄생하듯이, 미술계에서도 한 명의 스타 작가가 탄생하기까지 여러 이해관계자들이 작가를 중심으로 원을 형성한다. 대안 공간, 레지던시, 창작 공간 등에서 발굴돼 국공립·사립 미술관, 상업 화랑으로 진출하는 경로가 일반적인 등단 과정이다. 현대미술에서 좋은 작품은 양질의 작업과 의미 부여와 해석을 통해 만들어진다. 중요한 건, 미술 관계자들의 ‘크리틱(평론)’, 또한 미술 관계자들이 형성하고 있는 궤도 안으로의 진입이다. 한 공공미술 전문 업체 A 대표는 “소수 대형 갤러리에 자본이 집중되고 기업화되면서, 대형 갤러리가 직접 작가를 발굴하기보다는 작은 갤러리나 대안 공간에서 발굴하는 작가를 ‘스카우트’하는 형태가 고착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예술경영지원센터의 2015년 미술 시장 실태조사에 따르면 국내 상위 톱 10 갤러리가 전체 매출의 82.6%를 차지한다. 또한 국내 대형 갤러리의 전시 규모는 점점 커지고 있다.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스타 작가를 선호하기 마련이다. 이 때문에 직접 신진 작가를 발굴하기보다 ‘검증된 작가’를 스카우트하는 쪽을 택한다. A 대표는 “개인적으로도 작가를 찾을 때 대안 공간이나 비영리 스튜디오 등을 먼저 찾는 편이다”라고 말했다.
만약 대안 공간에서 국공립·사립 미술관, 상업 화랑으로 진출하는 작가의 성장 과정에서, 해외 비엔날레의 경력이 추가된다면 이것은 확실한 이력으로 통한다. 폴 도렐의 도서 <미술가로 살아가기>에 따르면 비엔날레나 대안 공간은 직접 미술품 거래가 이루어지는 시장은 아니지만 유망한 미술품의 발굴과 가치 상승을 도와줌으로써 시장에서 그 거래를 활성화하는 간접적인 매개 역할을 한다. 특히 비엔날레를 통해 발굴되며 주목을 받게 된 아티스트들은 이후 미술 시장에서도 주요한 생산자로 부각된다. 따라서 미술 시장에서 세계 유수의 비엔날레들이 어느 시장주체들 못지않게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국내에 대안 공간이 출현한 지도 어언 17년이 지났다. 명암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평가를 얻는 가운데, 최근 이슈는 ‘경제성’에 모아진다. 공공기금에 의존하는 형태는 여러 문제를 낫는다. 대안 공간을 지원하는 공공기금은 문화예술진흥위원회의 시각예술창작산실 공간 지원으로, 2016년 기준 연간 1억 원 예산을 34개 공간에 배분한다. 대안 공간(약 40%)뿐 아니라 소규모 갤러리(약 40%), 창작 공간(약 20%)도 지원 대상으로 적은 수에게만 혜택이 돌아간다. 더욱이 문화진흥기금은 2018년 고갈될 예정이다. 비영리 공간을 ‘영리한 공간’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에 따라 ‘자립’과 ‘자생’의 관점에서 최근 중요한 흐름이 포착되는데, 바로 ‘신생 공간’이다. 대안 공간의 3세대 격으로 해석되는 신생 공간은, “대안 공간이 더 이상 대안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20~30대 젊은 작가들에 의해 시도되는 실험이다. 과거 1세대 대안 공간들이 기존 제도권 미술에 대응하며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낸 뒤 17년 만에 ‘대안에 대한 대안’을 내놓은 새로운 세대의 출현이다.
아트스페이스 풀·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다방
1세대 대안 공간의 진화는 현재 진행 중
“17년의 궤적…우리만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
아트스페이스 풀은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 볼 수 있는 외형과는 조금 달랐다. 오래된 단층 주택을 개조한 공간으로, 고즈넉한 동네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7월 현재 <퇴폐미술전>이 열리는데, 이곳 전시는 모두 무료로 개방되고 있다. “아는 분들은 일부러 찾아서 오시는 편이고,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공간은 아니지만 미술인들에게는 놀이터와 같은 곳이다.” 김미정 큐레이터의 설명이다.
과거 대안 공간의 주요 역할이었던 신진 작가 발굴과 공모전 및 레지던시 프로그램이 미술계 전반적으로 확산되면서, ‘대안의 대안’은 대안 공간 사이에서도 꾸준히 논의돼 왔다. 1세대 대안 공간들은 ‘진화’하는 방향을 택했다. 다른 곳과 차별된 풀의 역할에 대해 이성희 아트스페이스 풀 디렉터는 “작가의 행보를 함께하는 것으로 전시를 같이 했던 것이 계기가 돼 계속 교류하고 작가 작업에 조언하기도 하며, 출판 작업을 같이 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풀은 일종의 커뮤니티 공간이며, 작가들에게 플랫폼 역할을 한다.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다방은 서울 종로구 인사동 정독도서관 인근에 자리하고 있다. 2014년 운영 체계를 확 바꾼 사루비아 다방은 미술인 회원들의 순수 기부(연회비)로 운영되고 있다. 이관훈 사루비아 다방 큐레이터 겸 대표는 “그동안 어려움도 있었지만, 이곳 출신 작가들과 사루비아 다방을 아끼는 이들이 먼저 힘이 돼 줘서,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다”며 “기존 공간들은 그곳만이 할 수 있는 나름대로의 역할이 분명히 있다”고 말했다.
사루비아 다방은 ‘공간을 십분 활용한 전시’에 오랜 기간 강점이 있어 왔다. 모든 전시에 프로젝트 개념을 강조하고, 작가가 공간에 최적화된 작업을 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이와 함께 1999년 22세의 대학생이었던 함진 작가를 시작으로 최근까지 신진 작가 발굴에 힘쓰고 있다. 일례로, 내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에 초대 받은 젊은 작가 이완이 최근 사루비아 다방을 통해 발굴된 스타 작가다. 또한 2012년 전시를 연 양정욱은 이곳 전시를 출발선 삼아, OCI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일본 도쿄의 국립신미술관 등으로 진출한 라이징 스타다. 지난해 전시를 연 유목연은 곧바로 두산연강예술상을 받고 파리국제예술공동체 시테에 선정되는 단계를 밟아 나갔다.
왜 신생 공간인가?
[신생 공간이란, 젊은 미술 작가들이 주축이 돼 전시 공간의 문턱을 낮추기 위해 직접 만든 공간으로,대체로 저렴한 임대료의 소규모를 지향한다.]
최근 신생 공간이 주목 받는 건,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공통된 목소리를 내는 하나의 ‘군’을 형성하면서다. 과거 1세대 대안 공간이 동시다발적으로 생겨난 것은 당시 외환위기 관리 체제를 지나오는 격변기, 유학파를 중심으로 형성된 새로운 흐름이었다. 2014년 이후 현재까지, 우후죽순 뜨고 지는 신생 공간은 미술계 내에서 하나의 새로운 흐름을 예고하는 것처럼 보인다.
대안 공간이 ‘연대’로 통한다면, 신생 공간은 ‘개별성’을 띠는 게 특징이다. 제각각 흩어져 활동하고 공간의 성격이나 운영 방식도 다르다. 주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금세 생겼다 없어지는 공간이 많은 것도 독특한 점이다.
“기존 대안 공간이 다 똑같지 않지만 예술계의 모순적 상황을 극복해보려는 명료한 대안성이 있었다면, 최근 1~2년 사이 생겨나는 신생 공간들은 공공성이나 담론을 표현하기보다 자조적이고 ‘뭐라도 해보자’는 심정으로 단발적인 활동을 하는 경향을 보인다.”(백기영 서울시립미술관 학예연구부장)
자조적이고 초단발적인 성격이면서 동시에 감각적이다. 이름도 구탁소(세탁소가 있던 자리에 만든 공간), 우정국(옛 창전동 우체국을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 지금 여기(자조적이고 현실 직시적인 표현), 청량 엑스포(지역 이름을 땀), 800/40(전세 800만 원에 월세 40만 원의 물리적인 현실을 표현) 등으로 다양하다. 이들 신생 공간의 비평 담론 웹진인 크리티칼은 분류 체계가 ‘긴 글’, ‘짧은 글’로 딱 2개뿐이다. 주제도 진지하고 무거운 담론이 아닌 생업 조건의 문제, 부조리한 미술 현실 등 오늘의 삶이다.
대안 공간과 신생 공간은 세대론으로 구분되기도 한다. 대안 공간과 신생 공간의 중간 즈음에 있는 스페이스 오뉴월 관계자는 “대안 공간의 운영 주체가 더 이상 신진이 아니라는 데서 요즘 젊은 작가들과는 세대로 구분되는데, 젊은 작가들이 이미 이름이 많이 알려진 공간에 들어간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라며 “작가로 살아가기 어려운 현실에 대한 대안으로 누군가의 선택을 받기를 기다리지 않고, 자발적으로 공간을 만들고 하고 싶은 활동을 하는 움직임이다”라고 말했다. 이들은 SNS를 통해 자체 팬과 브랜드를 확보하고, 신생 공간끼리의 소통도 SNS를 통해 빠르게 이뤄진다.
그렇게 만든 신생 공간의 아트페어, <굿-즈>는 지난해 10월 화제를 모으며 2박 3일간 6000명 관객, 약 1억 원 매출이라는 하나의 기록을 썼다.
특히 반지하에서 프로젝트를 하고, 일민미술관의 <뉴 스킨:본뜨고 연결하기>전에 참여한 후,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바벨>전과 최근 국제 갤러리 <유명한 무명> 그룹전에 초대된 김희천 작가는 미술계의 주목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신생 공간 커먼센터를 2년간 운영하고, 현재 일민미술관 책임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는 함영준은 “커먼센터에 있을 때 김희천 작가를 눈여겨보면서 일민미술관 전시에 초대를 했는데, 뒤이어 국공립 미술관과 상업 갤러리로도 진출하게 됐다”고 말했다.
올해 2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신생 공간들의 전시 <서울 바벨>전은 제도권 미술계에서 진지하게 신생 공간의 경향성을 이해하고 미술 지형의 변화를 모색해보는 자리였다. 백기영 학예연구부장은 “전시에 참여했던 이들이 여러 기획전에 선발되는 것을 보면서 단순히 외형적인 변화가 아니라 태도적인 변화를 포함한 미술계의 미학적 체계나 담론 체계가 바뀌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최근 서울시립미술관이 진행한 평론 공모전에서 80%가량은 모두 신생 공간에 대한 연구였다. 백기영 학예연구부장은 “SNS로 소통해서인지 동시대 해외 미술 경향을 풀어내는 데는 신생 공간이 더 빠르게 움직이는 것 같다”며 “아직 신생 공간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기 때문에 앞으로 어떻게 지형이 바뀌어갈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부분이다”라고 말했다.
신생 공간 미니 인터뷰 - 합정지구
“워크숍 모델을 통해 자체 수입 낸다”
서울 마포구 합정동 동네 어귀에 위치한 합정지구는 지난해 문을 연 주목 받는 신생 공간 중 한 곳이다. 이곳 이제 대표는 30대의 미술 작가다. 작가 5명과 함께 공간을 꾸리고 있다. 이제 대표는 공간 운영의 몇 가지 원칙을 갖고 있다. 합정지구는 작가들의 작업과 전시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또한 운영 방식은 공적 기금에서 독립적인 방향을 지향한다.
이를 위해 새롭게 시도한 실험은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워크숍이다. 일종의 아마추어 화실인 셈인데, 소그룹으로 모여 그림도 그리고, 강의도 듣고, 토론도 연다. 동네 중학생부터 직장인, 주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알음알음 모여들었다. 이제 대표는 “워크숍을 통해 월세 정도는 내고 있다”며 “전체 수익 구조의 약 50%가 자체 수입이고 20%가 지자체의 마을사업 예산에 해당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