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g Story] 킨포크 라이프에서 엿보다…행복한 밥상, ‘공유 식탁’
입력 2016-08-05 22:30:54
수정 2016-08-05 22:30:54
[한경 머니=이현주 기자] ‘미식의 시대’에 걸맞은 고품격 식 라이프란 무엇을 말하나. 행복, 그리고 건강이라는 두 단어의 관점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먼저 모두가 즐거운 밥상, 공유 식탁을 만나보자.
인천 산곡동에 사는 김홍곤(53) 씨는 1남 2녀의 자녀를 둔 50대 가장이다. 그에게는 남다른 취미가 하나 있는데, 바로 가족을 위한 밥상을 차리는 것이다. ‘요섹남’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할 만큼, 요리하는 남자가 늘어난 요즘이지만 50대 중년 직장인이 갑자기 요리의 재미에 빠지기는 쉬운 일이 아닐 것. 김 씨는 요리학원을 다닌 적은 없지만, 가족을 위해 자주 식탁을 차리다 보니 날로 실력이 늘어 이제는 집에서 직접 각종 김치까지 담고 있다. 김 씨의 집에는 언제나 손님들로 북적거리는데, 그의 요리 솜씨가 자녀의 친구들에게까지 입소문이 난 덕분이다.
‘엄마의 식탁’에서 ‘가족의 식탁’으로 가기 위한 첫째 조건은 바로 책임을 공유하고, 역할을 공유하고, 음식을 공유하는 ‘공유 식탁’이다. 누구 한 명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식탁은 행복해지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김 씨는 “친척들이나 친구들에게 화목한 느낌이 전달되면서 귀감이 되는 것 같다”며 “자녀들도 부모가 차려준 것만 먹는 게 아니라 서로 돌아가면서 상차림을 거들고 뒷정리를 하기 때문에 책임감을 일러주는 좋은 교육 방식이 된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먹는다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생존과 직결된 본능이다. 또한 식욕이라는 실현 가능한 욕망을 만족시키는 행위로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감각이다. 여기에 누군가와 함께 먹는다는 것은 생존에서 관계 맺기의 영역으로 들어간다는 의미다. 사람의 온기가 돌고 서로의 생각과 감성을 주고받는 공유의 장으로, 식탁의 즐거움이 확장되는 순간이다.
특히 가정의 식탁은 ‘가장 작은 단위의 커뮤니티’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박상현 음식 칼럼니스트는 “식탁의 커뮤니티가 확장되면 가족이 되고 가족이 확장되면 지역 커뮤니티가 되고, 학교와 직장 등으로 뻗어나가게 된다”며 “개인의 사회화 과정에서 처음 커뮤니티가 시작되는 곳이 바로 가정의 식탁으로, 거기에서부터 대화가 이뤄지고 소통이 시작돼야 비로소 건강한 사회가 구현된다”고 말했다. 각종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비정상적인 사회에 ‘식탁의 회복’이 던지는 메시지는 바로 여기에 있다.
밥을 생각하다
고품격 식 라이프를 위해 먼저 현재 우리의 식문화 수준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앞서 설문조사에서도 볼 수 있듯이, 현대인들은 하루 1~2번의 집밥을 먹고, 가정 내에서도 ‘혼밥’ 문화가 파고들고 있다. 김선희 청운대 교수는 “아침에도 가족들이 제각각 식사를 하는 풍경이 많고, 일종의 규칙을 정해서 아침을 다 같이 먹는 문화를 만들지 않는 이상 가족이 함께 모일 수 있는 시간은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일 것이다”라며 “현대인들이 너무 바빠지면서 전통적인 가정의 식문화가 많이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주목할 점은 ‘집밥에 집밥이 없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주부들이 칼을 놓으면서다. 맞벌이 부부와 일하는 중년 여성이 늘어났는데, 그에 비해 가정의 식탁에서는 ‘대안’을 찾지 못하고 있는 상황. 통계청에 따르면 2015년 기준 일터로 나간 중년 여성은 10년 전에 비해 110만 명 더 늘어났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어나는 것에 대해서는 공론화가 많이 되는 것에 비해, 식탁에 대해서는 잘 언급되지 않으면서 중요성이 축소돼 가고 나아가 홀대 받고 있는 상황이다.
‘남자는 부엌에 가는 것 아니다’라고 배운 세대가 처한 현실도 생각해볼 만하다. 지금의 노년 세대의 식생활에서 문제점으로 꼽히는 부분은 바로 독거노인의 결식과 영양 불균형이다. 특히 여성에 비해 독거 남성 노인들이 이와 같은 문제를 겪고 있다. 김옥선 장안대 식품영양학과 교수는 “실태 조사를 나가보면 할머니들은 다 하실 줄 아는 데 비해 할아버지들은 식사를 잘 챙기지 않고, 심한 경우에는 사별 후 식사라는 행위 자체를 거부해 주사만 맞고 사는 분까지 봤다”며 “돈이나 자식이 없어서가 아니고, 누군가 차려주는 밥만 먹은 세대가 홀로 남았을 때 느끼는 서러움이 크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삼식이(백수로서 집에 칩거하며 세 끼를 꼬박꼬박 찾아 먹는 사람)라는 신조어가 등장하는 요즘, 은퇴 이후의 삶의 질을 생각한다면 일찍이 식탁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차윤환 숭의여대 식품영양학과 교수는 “식구라는 의미가 ‘밥을 같이 먹는 입’인데, 최근에는 의미가 많이 퇴색됐다”며 “여기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게 심각할 정도로 가정의 식생활이 무너졌을 때 미치는 파급력이 크다”고 말했다. 첫째는 ‘밥상머리 교육’이라 불리는 식문화 교육, 둘째는 왁자지껄한 식탁에서의 사회화 과정 측면에서다. 한국 사회는 장기화된 저성장과 더 세진 경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너무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가정의 식탁이 ‘해독’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안정된 소속감을 주는 가족의 식탁이 해체되고 사회 전반적으로 ‘나는 혼자다’라는 인식이 퍼졌을 때 낳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영양학적인 문제는 차후에 다시 얘기하도록 하자.
가까운 이웃, 일본에서도 우리와 비슷한 고민을 겪은 적이 있다. 차 교수는 “일본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여자들이여 칼을 들어라’라는 한 칼럼이 반향을 일으킨 적이 있다”며 “그만큼 집에서 요리하지 않는 가정이 늘고, 그 결과 일본이 몇천 년에 걸쳐 이뤄 왔던 일본의 음식 문화가 12세대 만에 단절될 위기에 처했다는 내용이었다”고 말했다. 여러 세대가 함께 된장, 간장을 담그면서 각 가정에서 알음알음 전수됐던 일본의 식문화가 무너지는 한편, 집에서 만든 것과 같은 품질의 된장을 사 먹기 위해서는 경제적으로도 더 많은 비용을 지출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이 실렸다.
그동안 우리는 밥에 대해서 꽤 오랜 기간 구호적인 관점을 취해 왔다. ‘밥은 먹었냐’는 인사말에서 엿볼 수 있듯이 생존을 위한 밥이 우선이었고, 정부 정책 또한 구호적인 관점에서 굶는 곳에 밥을 나눠주는 형태에 가까웠다. 그러나 식문화의 진화 관점에서, 밥은 이제 생존과 건강을 지나 문화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심기현 숙명여대 전통문화예술대학원 교수는 “옷을 입고 음악을 듣는 것으로 개성을 드러내는 것처럼 먹는 것을 통해 나를 드러내는 식문화가 정착됐고, 여기에서 핵심은 ‘즐거움’이다”라며 “주는 대로 먹는 밥이 아닌 이것과 저것을 섞어 가며 ‘재창조’하는 레시피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문화의 시대에 식탁은 ‘행복한 밥상’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즐거운 문화가 필요하다.
홀로 먹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면 식탁의 품격은, 한 끼를 먹더라도 제대로 챙겨 먹는 ‘나를 위한 밥상’에서 나온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간다면 ‘남을 위한 밥상’을 차릴 줄 아는 것이다. 김옥선 교수는 “체험 교육으로 영양 교육을 받고 직접 음식을 만들어본 학생들의 행복지수가 그렇지 않은 학생에 비해 더 높다는 연구 결과를 얻었다”며 “가정으로 적용해보면, 수동적으로 차려진 밥상을 먹는 사람보다 함께 요리에 대해 고민하고 음식을 나눠 먹는 가정의 삶의 만족도가 더 높은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일찍이 시인들은 밥을 소재로 시를 써 왔다. “밥을 같이 먹는다는 건, 삶을 같이 한다는 것” 시인 오인태는 그의 시 <혼자 먹는 밥>을 통해 팍팍하고 무미건조한 삶을 바꾸는 식사의 중요성을 말했다. <밥은 하늘이다>라는 시에서 “하늘을 혼자 못 가지듯 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이다”라고 강조한 시인 김지하도 있다. 시인들이 이와 같이 밥에 대해 시를 쓴 건 음식을 함께 나눠 먹는다는 것을 격이 높고 고귀한 것으로 바라봤기 때문이다. 식탁의 품격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바로 나눔의 식탁이다.
포틀랜드에서 시작된 킨포크 라이프
미국 오리건 주 포틀랜드에서 시작된 킨포크 라이프 문화를 보자. 킨포크(kinfolk)는 ‘가까운 이웃’을 뜻하는 단어로, 2011년 발행된 ‘킨포크’라는 잡지를 통해 전 세계에 확산된 새로운 삶의 문화다. 2011년 포틀랜드에 살던 한 부부는 작가, 화가, 사진가, 농부, 요리사 등 동네 이웃, 친구들과 함께 자신들의 일상을 잡지에 담았다. 1년에 4차례 ‘요리하기, 만들기, 하기’를 주제로 다양한 글과 사진을 보여주며 식사 에피소드만을 모아 <킨포크 테이블>을 발행하기도 한다.
킨포크 라이프의 식문화는 고품격 식 라이프의 행복한 밥상에 힌트를 제공한다. 킨포크 스타일을 요약하면 첫째, 텃밭을 통해 자연 친화적인 식재료를 수확한다. 둘째, 가족 및 지인들과 음식을 나누며 교류하는 즐거움을 추구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멋진 식탁에는 은제 빈티지 포크도 값비싼 유리잔도 없었다. 제철 음식을 담은 종이 접시가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곳에 모인 이들의 따뜻한 마음 덕분에 호화로운 상차림은 필요 없었고, 우리는 저녁 늦게까지 머물며 음식과 대화를 나누는 단순한 즐거움을 맛보고 도시의 풍요한 매력을 즐겼다.”(잡지 <킨포크> 중)
여기서 핵심은 ‘함께 만들기, 함께 먹기’다. 박상현 음식 칼럼니스트는 “지난해 연말 포틀랜드에 실제 가본 결과, 킨포크 라이프의 본질은 음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함께 참여하고, 함께 나눠 먹는 것이었다”며 “식재료를 선택하고 조리하고 먹는 것까지 누군가는 차리고 누군가는 대접받는 게 아니라 함께 준비하고 같이 나눠 먹는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포틀랜드가 뜬 배경은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 또한 경쟁이 가속화되면서 사람들의 여유가 사라졌고 그에 대한 해결책 중 하나로 제시된 게 포틀랜드를 중심으로 한 킨포크 문화다.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건 바로 삶의 질이다. 포틀랜드는 미국에서도 3년 연속 이주가 가장 많은 도시로, 특히 미국 뉴욕 등 대도시의 젊은이들이 가장 살고 싶어 하는 도시로 떠오른다. 포틀랜드는 또한 지역경제가 안정됐다는 게 장점으로 꼽히고 있다.
미국에서 온 킨포크 라이프가 한국에서 인기를 누린 데는 가수 이효리의 제주도 라이프가 소개되면서다. 포틀랜드의 환경과 한국 대도시의 상황은 많이 다르기에 라이프스타일이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지만, 킨포크 문화는 특히 한국 식문화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대표적인 예가 소셜 다이닝(social dining)으로 1인 가구 비중이 늘면서 20~30대에 빠르게 활성화됐다. 김예은 LIG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일상에 지친 현대인들이 여유를 추구하는 킨포크 라이프를 통해 외로움을 해소하려 한다”며 “킨포크 문화가 도입되면서 유기농 제품 판매, 자연주의 식재료, 친환경 밥상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고 말했다.
한국식 킨포크 라이프로, 고품격 식 라이프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바로 텃밭을 일구는 도시 농부들이다. 과거 주말 농장 등을 통해 교외로 나가던 사람들이 도심 속 주택과 아파트에서 녹색 작물을 심는 일이 늘고 있다. 도심 속 텃밭은 지난해 850헥타르로 5년 사이 8배 이상 늘었다.
조성희(52) 씨는 도심 속 킨포크 라이프를 실천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그의 식탁에는 언제나 직접 심고 가꾼 제철 채소들이 올라와 있다. 기존에는 주택 옥상 텃밭을 활용했는데, 최근 그는 서울 종로구 한 한옥집으로 이사를 오면서 화분들을 활용해 식물들을 가꾸고 있다. 조 씨는 “여름에는 가지가 달고 맛있고 오이도 따서 먹으면 사서 먹는 것과는 다른 깊은 맛이 느껴진다”며 “케일로 장아찌를 담가 먹고, 허브로 모히토를 만들거나 허브를 말려 꽃차를 만들어 집에 찾아오는 지인들에게 대접하면 반응이 아주 좋다”고 말했다.
은퇴 이후 제2의 인생을 사는 박정기(71) 씨도 있다. 건축업에 종사한 후 15년 전 은퇴한 그는 산악회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킨포크 라이프를 즐기고 있다. 서울 미아동 다가구주택에 사는 그는 옥상 텃밭에 각종 식물을 키우고 제철 식재료를 수확하고 있다. 산악회 회장인 그는 집을 커뮤니티의 아지트처럼 활용하고 있는데, 옥상에 함께 모여 고기를 구워 먹고, 옆에 있는 채소들을 뜯어 쌈을 싸 먹는 저녁식사 자리를 즐겨한다. 또한 회원들에게 배추, 무, 상추, 오이, 호박 등을 나눠주는데 “가족이 충분히 먹고도 남기 때문에 지인들과 나눌 수밖에 없다”고 한다.
도시를 조금만 벗어나면 좀 더 고즈넉한 식 라이프를 즐길 수 있다. 이현수 씨는 소셜 벤처 꼬마농부의 대표이면서, 경기도 고양시의 전원주택 마을 단지에서 버섯 농사를 짓고 있다. 그는 농사를 지으면서 자연스럽게 먹거리나 요리에 관심을 갖게 됐고, 가정에서 아침식사 준비를 주로 도맡게 됐다. 아침엔 간단한 빵과 과일, 달걀, 치즈 등을 주로 먹고 저녁은 반찬을 사거나 직접 재배한 버섯 등으로 한 상을 차린다. 또한 주말이면 그는 전원 마을의 이웃들과 함께 바비큐 파티를 즐겨 여는데, 주민들이 각자 먹거리를 들고 와서 같이 나눠 먹는다. 미국에서 보편화된 ‘포틀록 파티’인 셈이다. 이 씨는 “가까운 지인들은 부부가 식탁에서 역할을 분담하는 것에 대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각 가정마다 돌아가면서 파티를 연다”며 “해외 경험이 있는 젊은 부부들이 늘고, 매체를 통해 자연스럽게 파티 문화를 접하면서 함께 어울려 나눠 먹는 즐거움을 시도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먹는다는 것을 우리 삶의 관계를 돌아보고 함께 나눠 먹는 즐거움을 찾는 과정이다”라고 말한다.
프랑스 식문화의 2가지 교훈
세계적인 미식의 국가 프랑스는 식문화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또 다른 국가다. 프랑스의 미식 문화가 유네스코 세계 무형 문화유산에 등재될 정도다. 프랑스인에게 식사의 의미는 사회화가 일어나고 화목한 분위기를 만드는 사교의 장이다. 이탈리아는 슬로라이프를 기반으로 한 슬로푸드를 강조한다. 슬로라이프는 먹는 것뿐만 아니라 생활방식 자체에 초점을 맞춘 식생활 교육으로, 가족과 함께 즐기는 식탁, 농업과 환경의 소중함을 아는 식생활, 전통 식품 위주의 식생활 실천 등을 포함한다.
이들 국가는 특히 ‘미각 교육’에 관심이 많다. 음식을 통해 정체성을 찾고 나아가 창의성을 키우려는 노력이다. 또한 일본은 식생활 기본 지침으로
‘지산지소(地産地消: 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은 그 지역에서 소비하자)’를 강조하고 있다.
한국의 식문화는 산업과 비교할 때 지금은 산업적으로는 성장기, 문화적으로는 태동기의 단계로 이해할 수 있다.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생기기 시작한 1980년대 이후로 식 산업이 발달했다면, 2000년대 들어 먹방 열풍을 만나 성장기의 정점을 지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 문화의 관점에서 보면 이제 막 식문화의 질적 성장을 논의하는 태동기로 볼 수 있다. 박상현 음식 칼럼니스트는 “먹방으로 일어난 식 열풍은 우리만의 독특한 현상은 아니며, 이미 다른 국가에서 겪었던 일들이다”라며 “그렇다면 이다음에 무엇이 올 것이냐 하는 전망에 대해 고민하고 대응할 시점이다”라고 말했다.
앞서 언급한 해외 사례에서 힌트를 얻어볼 수 있다. 먹방 이후의 논의는 바로 식재료를 중심으로 이뤄질 것으로 전망된다. 일본이 지산지소 운동을 통해 먹거리에 대한 관심을 키우고, 이탈리아가 슬로푸드 운동을 하면서 식재료의 품질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것과 같다. 이는 첫째,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물리적, 심리적 거리를 줄인다. 둘째, 자신이 직접 식물을 길러봐야 한다는 형태가 혼재돼서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보다 큰 관점에서는 농업의 부상과 맥을 같이 한다. 서점 신작 코너에 가보면 시골, 농부라는 타이틀이 매우 현대적이고 트렌드를 반영하는 단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시골의 발견(가든 디자이너가 안내하는 도시보다 세련되고 질 높은 시골 생활 배우기)>이 대표적이다. 이와 같은 농업의 재발견, 농업에서 미래 찾기는 식문화 선진국에서 이미 진행된 흐름이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가장 최고의 직업이 농부였다는 것은 뜬금없는 설정이 아니었다.
좋은 품질의 식재료를 찾는 것은 소비자와 생산자의 관계도 변화시킨다. 지금은 유통의 영역이 생산을 주도하는 시장이라면 좋은 식재료에 기꺼이 비용을 지불할 의향이 있는 소비자들의 출현으로 소비자가 생산자를 변화시킬 수 있다. 다시 말해,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유통 과정이 축소되고, 농사짓는 방법이 소품종 대량 생산에서 다품종 소량 생산으로 바뀌게 된다.
고품격 식 라이프를 추구하는 백정림 갤러리 이고 대표의 경우, 식재료를 크게 3가지 방법을 통해 구하고 있다. 제철 채소는 텃밭을 통해 수확한다. 과일 등은 마트에서 좋은 품질의 것을 구입한다. 육류와 해산물 등은 각각 최고의 산지를 찾아 현지 직송을 통해 배송 받는다. 예를 들면, 지리산 유기농 닭이 낳은 청란, 울진에서 공수한 갈치와 꽃게, 남해마을에서 받는 대저 토마토 등이다. 그는 지인들과 함께 생산자의 연락처를 공유하면서 생산자의 판로를 개척해주기도 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소비자가 생산자를 변화시키는 대표적인 사례다.
유기농의 인기는 신세계백화점의 프리미엄 마켓 청담동 SSG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강남 사모님들이 자주 가는 이 마켓의 콘셉트가 바로 유기농, 신선식품, 친환경 식재료 등 건강 식재료다. 최근에는 유기농을 4단계까지 나눠 ‘사람이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채취한 버섯’까지 등장했다. SSG 마켓은 별다른 홍보를 하지 않았지만, 매년 두 자릿수 신장률을 보이고 있다. SSG 마켓 관계자는 “한쪽에서는 오히려 식재료의 고급화를 원하고 있다”며 “최근 백화점들이 공통적으로 주목하는 시장이 바로 이 프리미엄 마켓이며, 그만큼 시장성을 높게 평가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단지 비싼 식재료를 식탁에 올려놓는 것이 식탁의 품격을 말해주진 않는다. 식탁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서 즐거운 문화가 생겨난다. 박상현 칼럼니스트는 “내가 먹는 이 간장은 진짜 간장인지, 내가 쓰는 이 된장은 진짜 발효 식품인지 등을 고민하기 시작할 때, 식탁의 품격 또한 올라갈 것이다”라며 “삼겹살에 상추쌈을 먹을 때, 어떻게 해야 더 맛있을까가 지금의 관심이라면, 삼겹살과 상추는 어디에서 왔는지를 생각하게 되는 게 밥상의 진화다”라고 말했다.
밥상머리 교육, 대화의 회복은 핵심이 되는 조건이다. ‘밥상에서 떠들면 안 된다’는 엄숙주의 문화에서 가족이 자유롭게 의견을 주고받는 소통의 장으로의 변신이 필요하다. 아침식사를 같이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고품격 식 라이프를 미각의 관점에서 보면, 현재는 ‘길들여진 맛’에 익숙한 상태로 볼 수 있다. 미각의 측면에서 ‘나만의 맛’을 찾아가는 단계로 나아가는 것도 식문화의 고급화 방향이다. 그제야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미식의 시대’라 말할 수 있다.
한식의 재발견
가족이 함께 만들고 함께 먹는 문화를 위한 또 하나의 변화는 바로 한식의 재발견이다. 한식은 많은 장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찬의 가짓수가 너무 많고 손이 많이 간다는 것이 단점으로 지적된다. 번거롭기 때문에 잘 안 해 먹는다는 것이다. 집밥은 꼭 주식과 부식을 모두 갖춘 한식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과 표준화된 레시피에서 벗어나 간소화 식단으로 쉽게 만들 수 있는 다양한 음식들을 시도해볼 수 있다. 또한 가족의 식탁이 회복되면, 그다음은 초대 식탁이다. 최근 홈파티를 즐기는 사람이 부쩍 늘었는데, 이를 위한 전제조건이 집에서 요리를 할 줄 아는 것이다. 나만의 메뉴를 개발하고 자랑할 수 있어야 멋들어진 초대 식탁을 차릴 수 있다.
거실로 들어온 식탁
공유 식탁이란 개념은 혼자 밥 먹기 싫은 1인 가구들이 밥을 먹기 위한 커뮤니티 ‘소셜 다이닝’에서 사용되는 직사각형 모양의 식탁으로, 처음 보는 사람들도 서로의 취미를 공유하며 소통하는 곳이다. 요즘과 같이 가족의 개념이 확대되고 전통적 가족에서 벗어나 1인 가구들이 서로 자유롭게 모이고 흩어지는 새로운 가족시대의 대표적인 식탁 연대다. 공유 식탁은 스타벅스를 비롯해 많은 카페들이 도입하고 있는데, 교보문고 광화문점이 지난해 11월 100여 명이 앉을 수 있는 공유 식탁을 설치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함께 모여 요리는 만드는 ‘공유 부엌’까지 등장했는데, 이 개념이 가정에 적용된 것이다.
함께 만들고 함께 먹는 문화를 만들기 위해 식탁이라는 곳을 ‘엄마의 공간’에서 ’가족의 공간‘으로 바꾸는 것이다. 박상현 음식 칼럼니스트는 최근 새로운 시도를 했다. 식탁을 주방에서 거실로 옮겨온 것이다. 일본 TV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좌탁과 같이 다용도로 쓰기 위해 쇼파를 치운 자리에 식탁을 들여놨다. 프리랜서인 박상현 칼럼니스트는 평소 그곳에 앉아 글을 쓰기도 하고 그의 자녀들은 숙제를 하기도 한다. TV도 보고 대화도 한다. 그러다 식사 시간이 되면, 다함께 테이블 세팅을 시작하고 함께 식사를 한다. 박 칼럼니스트는 “식탁은 밥 먹을 때만 가는 장소이다 보니 엄마의 공간이 되고 아이들은 각각 자기의 방을 중심으로 생활하게 되는데 가족 유일의 공통 공간인 거실에 식탁을 들여놓음으로써 가족이 함께하는 밥상을 만들 수 있다”며 “엄마의 공간이 아니다 보니, 밥만 먹고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수저라도 같이 놓고 마무리까지 같이 하는 교육적 효과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백정림 대표의 초대 식탁 가보니…
6월 16일 오후 11시, 백정림 이고 갤러리 대표의 서울 서초동 자택을 찾았다. 백 대표가 취재진을 위해 초대 식탁을 마련해서다. 이날의 메뉴는 7월 여름 별미식인 콩국수 한 상 차림. 식사 후 커피와 디저트까지 한 상에 담았다. 테이블 세팅은 여름과 잘 어울리는 블루 코발트 계열이다.
인천 산곡동에 사는 김홍곤(53) 씨는 1남 2녀의 자녀를 둔 50대 가장이다. 그에게는 남다른 취미가 하나 있는데, 바로 가족을 위한 밥상을 차리는 것이다. ‘요섹남’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할 만큼, 요리하는 남자가 늘어난 요즘이지만 50대 중년 직장인이 갑자기 요리의 재미에 빠지기는 쉬운 일이 아닐 것. 김 씨는 요리학원을 다닌 적은 없지만, 가족을 위해 자주 식탁을 차리다 보니 날로 실력이 늘어 이제는 집에서 직접 각종 김치까지 담고 있다. 김 씨의 집에는 언제나 손님들로 북적거리는데, 그의 요리 솜씨가 자녀의 친구들에게까지 입소문이 난 덕분이다.
‘엄마의 식탁’에서 ‘가족의 식탁’으로 가기 위한 첫째 조건은 바로 책임을 공유하고, 역할을 공유하고, 음식을 공유하는 ‘공유 식탁’이다. 누구 한 명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식탁은 행복해지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김 씨는 “친척들이나 친구들에게 화목한 느낌이 전달되면서 귀감이 되는 것 같다”며 “자녀들도 부모가 차려준 것만 먹는 게 아니라 서로 돌아가면서 상차림을 거들고 뒷정리를 하기 때문에 책임감을 일러주는 좋은 교육 방식이 된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먹는다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생존과 직결된 본능이다. 또한 식욕이라는 실현 가능한 욕망을 만족시키는 행위로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감각이다. 여기에 누군가와 함께 먹는다는 것은 생존에서 관계 맺기의 영역으로 들어간다는 의미다. 사람의 온기가 돌고 서로의 생각과 감성을 주고받는 공유의 장으로, 식탁의 즐거움이 확장되는 순간이다.
특히 가정의 식탁은 ‘가장 작은 단위의 커뮤니티’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박상현 음식 칼럼니스트는 “식탁의 커뮤니티가 확장되면 가족이 되고 가족이 확장되면 지역 커뮤니티가 되고, 학교와 직장 등으로 뻗어나가게 된다”며 “개인의 사회화 과정에서 처음 커뮤니티가 시작되는 곳이 바로 가정의 식탁으로, 거기에서부터 대화가 이뤄지고 소통이 시작돼야 비로소 건강한 사회가 구현된다”고 말했다. 각종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비정상적인 사회에 ‘식탁의 회복’이 던지는 메시지는 바로 여기에 있다.
밥을 생각하다
고품격 식 라이프를 위해 먼저 현재 우리의 식문화 수준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앞서 설문조사에서도 볼 수 있듯이, 현대인들은 하루 1~2번의 집밥을 먹고, 가정 내에서도 ‘혼밥’ 문화가 파고들고 있다. 김선희 청운대 교수는 “아침에도 가족들이 제각각 식사를 하는 풍경이 많고, 일종의 규칙을 정해서 아침을 다 같이 먹는 문화를 만들지 않는 이상 가족이 함께 모일 수 있는 시간은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일 것이다”라며 “현대인들이 너무 바빠지면서 전통적인 가정의 식문화가 많이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주목할 점은 ‘집밥에 집밥이 없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주부들이 칼을 놓으면서다. 맞벌이 부부와 일하는 중년 여성이 늘어났는데, 그에 비해 가정의 식탁에서는 ‘대안’을 찾지 못하고 있는 상황. 통계청에 따르면 2015년 기준 일터로 나간 중년 여성은 10년 전에 비해 110만 명 더 늘어났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어나는 것에 대해서는 공론화가 많이 되는 것에 비해, 식탁에 대해서는 잘 언급되지 않으면서 중요성이 축소돼 가고 나아가 홀대 받고 있는 상황이다.
‘남자는 부엌에 가는 것 아니다’라고 배운 세대가 처한 현실도 생각해볼 만하다. 지금의 노년 세대의 식생활에서 문제점으로 꼽히는 부분은 바로 독거노인의 결식과 영양 불균형이다. 특히 여성에 비해 독거 남성 노인들이 이와 같은 문제를 겪고 있다. 김옥선 장안대 식품영양학과 교수는 “실태 조사를 나가보면 할머니들은 다 하실 줄 아는 데 비해 할아버지들은 식사를 잘 챙기지 않고, 심한 경우에는 사별 후 식사라는 행위 자체를 거부해 주사만 맞고 사는 분까지 봤다”며 “돈이나 자식이 없어서가 아니고, 누군가 차려주는 밥만 먹은 세대가 홀로 남았을 때 느끼는 서러움이 크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삼식이(백수로서 집에 칩거하며 세 끼를 꼬박꼬박 찾아 먹는 사람)라는 신조어가 등장하는 요즘, 은퇴 이후의 삶의 질을 생각한다면 일찍이 식탁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차윤환 숭의여대 식품영양학과 교수는 “식구라는 의미가 ‘밥을 같이 먹는 입’인데, 최근에는 의미가 많이 퇴색됐다”며 “여기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게 심각할 정도로 가정의 식생활이 무너졌을 때 미치는 파급력이 크다”고 말했다. 첫째는 ‘밥상머리 교육’이라 불리는 식문화 교육, 둘째는 왁자지껄한 식탁에서의 사회화 과정 측면에서다. 한국 사회는 장기화된 저성장과 더 세진 경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너무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가정의 식탁이 ‘해독’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안정된 소속감을 주는 가족의 식탁이 해체되고 사회 전반적으로 ‘나는 혼자다’라는 인식이 퍼졌을 때 낳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영양학적인 문제는 차후에 다시 얘기하도록 하자.
가까운 이웃, 일본에서도 우리와 비슷한 고민을 겪은 적이 있다. 차 교수는 “일본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여자들이여 칼을 들어라’라는 한 칼럼이 반향을 일으킨 적이 있다”며 “그만큼 집에서 요리하지 않는 가정이 늘고, 그 결과 일본이 몇천 년에 걸쳐 이뤄 왔던 일본의 음식 문화가 12세대 만에 단절될 위기에 처했다는 내용이었다”고 말했다. 여러 세대가 함께 된장, 간장을 담그면서 각 가정에서 알음알음 전수됐던 일본의 식문화가 무너지는 한편, 집에서 만든 것과 같은 품질의 된장을 사 먹기 위해서는 경제적으로도 더 많은 비용을 지출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이 실렸다.
그동안 우리는 밥에 대해서 꽤 오랜 기간 구호적인 관점을 취해 왔다. ‘밥은 먹었냐’는 인사말에서 엿볼 수 있듯이 생존을 위한 밥이 우선이었고, 정부 정책 또한 구호적인 관점에서 굶는 곳에 밥을 나눠주는 형태에 가까웠다. 그러나 식문화의 진화 관점에서, 밥은 이제 생존과 건강을 지나 문화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심기현 숙명여대 전통문화예술대학원 교수는 “옷을 입고 음악을 듣는 것으로 개성을 드러내는 것처럼 먹는 것을 통해 나를 드러내는 식문화가 정착됐고, 여기에서 핵심은 ‘즐거움’이다”라며 “주는 대로 먹는 밥이 아닌 이것과 저것을 섞어 가며 ‘재창조’하는 레시피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문화의 시대에 식탁은 ‘행복한 밥상’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즐거운 문화가 필요하다.
홀로 먹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면 식탁의 품격은, 한 끼를 먹더라도 제대로 챙겨 먹는 ‘나를 위한 밥상’에서 나온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간다면 ‘남을 위한 밥상’을 차릴 줄 아는 것이다. 김옥선 교수는 “체험 교육으로 영양 교육을 받고 직접 음식을 만들어본 학생들의 행복지수가 그렇지 않은 학생에 비해 더 높다는 연구 결과를 얻었다”며 “가정으로 적용해보면, 수동적으로 차려진 밥상을 먹는 사람보다 함께 요리에 대해 고민하고 음식을 나눠 먹는 가정의 삶의 만족도가 더 높은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일찍이 시인들은 밥을 소재로 시를 써 왔다. “밥을 같이 먹는다는 건, 삶을 같이 한다는 것” 시인 오인태는 그의 시 <혼자 먹는 밥>을 통해 팍팍하고 무미건조한 삶을 바꾸는 식사의 중요성을 말했다. <밥은 하늘이다>라는 시에서 “하늘을 혼자 못 가지듯 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이다”라고 강조한 시인 김지하도 있다. 시인들이 이와 같이 밥에 대해 시를 쓴 건 음식을 함께 나눠 먹는다는 것을 격이 높고 고귀한 것으로 바라봤기 때문이다. 식탁의 품격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바로 나눔의 식탁이다.
포틀랜드에서 시작된 킨포크 라이프
미국 오리건 주 포틀랜드에서 시작된 킨포크 라이프 문화를 보자. 킨포크(kinfolk)는 ‘가까운 이웃’을 뜻하는 단어로, 2011년 발행된 ‘킨포크’라는 잡지를 통해 전 세계에 확산된 새로운 삶의 문화다. 2011년 포틀랜드에 살던 한 부부는 작가, 화가, 사진가, 농부, 요리사 등 동네 이웃, 친구들과 함께 자신들의 일상을 잡지에 담았다. 1년에 4차례 ‘요리하기, 만들기, 하기’를 주제로 다양한 글과 사진을 보여주며 식사 에피소드만을 모아 <킨포크 테이블>을 발행하기도 한다.
킨포크 라이프의 식문화는 고품격 식 라이프의 행복한 밥상에 힌트를 제공한다. 킨포크 스타일을 요약하면 첫째, 텃밭을 통해 자연 친화적인 식재료를 수확한다. 둘째, 가족 및 지인들과 음식을 나누며 교류하는 즐거움을 추구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멋진 식탁에는 은제 빈티지 포크도 값비싼 유리잔도 없었다. 제철 음식을 담은 종이 접시가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곳에 모인 이들의 따뜻한 마음 덕분에 호화로운 상차림은 필요 없었고, 우리는 저녁 늦게까지 머물며 음식과 대화를 나누는 단순한 즐거움을 맛보고 도시의 풍요한 매력을 즐겼다.”(잡지 <킨포크> 중)
여기서 핵심은 ‘함께 만들기, 함께 먹기’다. 박상현 음식 칼럼니스트는 “지난해 연말 포틀랜드에 실제 가본 결과, 킨포크 라이프의 본질은 음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함께 참여하고, 함께 나눠 먹는 것이었다”며 “식재료를 선택하고 조리하고 먹는 것까지 누군가는 차리고 누군가는 대접받는 게 아니라 함께 준비하고 같이 나눠 먹는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포틀랜드가 뜬 배경은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 또한 경쟁이 가속화되면서 사람들의 여유가 사라졌고 그에 대한 해결책 중 하나로 제시된 게 포틀랜드를 중심으로 한 킨포크 문화다.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건 바로 삶의 질이다. 포틀랜드는 미국에서도 3년 연속 이주가 가장 많은 도시로, 특히 미국 뉴욕 등 대도시의 젊은이들이 가장 살고 싶어 하는 도시로 떠오른다. 포틀랜드는 또한 지역경제가 안정됐다는 게 장점으로 꼽히고 있다.
미국에서 온 킨포크 라이프가 한국에서 인기를 누린 데는 가수 이효리의 제주도 라이프가 소개되면서다. 포틀랜드의 환경과 한국 대도시의 상황은 많이 다르기에 라이프스타일이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지만, 킨포크 문화는 특히 한국 식문화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대표적인 예가 소셜 다이닝(social dining)으로 1인 가구 비중이 늘면서 20~30대에 빠르게 활성화됐다. 김예은 LIG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일상에 지친 현대인들이 여유를 추구하는 킨포크 라이프를 통해 외로움을 해소하려 한다”며 “킨포크 문화가 도입되면서 유기농 제품 판매, 자연주의 식재료, 친환경 밥상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고 말했다.
한국식 킨포크 라이프로, 고품격 식 라이프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바로 텃밭을 일구는 도시 농부들이다. 과거 주말 농장 등을 통해 교외로 나가던 사람들이 도심 속 주택과 아파트에서 녹색 작물을 심는 일이 늘고 있다. 도심 속 텃밭은 지난해 850헥타르로 5년 사이 8배 이상 늘었다.
조성희(52) 씨는 도심 속 킨포크 라이프를 실천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그의 식탁에는 언제나 직접 심고 가꾼 제철 채소들이 올라와 있다. 기존에는 주택 옥상 텃밭을 활용했는데, 최근 그는 서울 종로구 한 한옥집으로 이사를 오면서 화분들을 활용해 식물들을 가꾸고 있다. 조 씨는 “여름에는 가지가 달고 맛있고 오이도 따서 먹으면 사서 먹는 것과는 다른 깊은 맛이 느껴진다”며 “케일로 장아찌를 담가 먹고, 허브로 모히토를 만들거나 허브를 말려 꽃차를 만들어 집에 찾아오는 지인들에게 대접하면 반응이 아주 좋다”고 말했다.
은퇴 이후 제2의 인생을 사는 박정기(71) 씨도 있다. 건축업에 종사한 후 15년 전 은퇴한 그는 산악회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킨포크 라이프를 즐기고 있다. 서울 미아동 다가구주택에 사는 그는 옥상 텃밭에 각종 식물을 키우고 제철 식재료를 수확하고 있다. 산악회 회장인 그는 집을 커뮤니티의 아지트처럼 활용하고 있는데, 옥상에 함께 모여 고기를 구워 먹고, 옆에 있는 채소들을 뜯어 쌈을 싸 먹는 저녁식사 자리를 즐겨한다. 또한 회원들에게 배추, 무, 상추, 오이, 호박 등을 나눠주는데 “가족이 충분히 먹고도 남기 때문에 지인들과 나눌 수밖에 없다”고 한다.
도시를 조금만 벗어나면 좀 더 고즈넉한 식 라이프를 즐길 수 있다. 이현수 씨는 소셜 벤처 꼬마농부의 대표이면서, 경기도 고양시의 전원주택 마을 단지에서 버섯 농사를 짓고 있다. 그는 농사를 지으면서 자연스럽게 먹거리나 요리에 관심을 갖게 됐고, 가정에서 아침식사 준비를 주로 도맡게 됐다. 아침엔 간단한 빵과 과일, 달걀, 치즈 등을 주로 먹고 저녁은 반찬을 사거나 직접 재배한 버섯 등으로 한 상을 차린다. 또한 주말이면 그는 전원 마을의 이웃들과 함께 바비큐 파티를 즐겨 여는데, 주민들이 각자 먹거리를 들고 와서 같이 나눠 먹는다. 미국에서 보편화된 ‘포틀록 파티’인 셈이다. 이 씨는 “가까운 지인들은 부부가 식탁에서 역할을 분담하는 것에 대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각 가정마다 돌아가면서 파티를 연다”며 “해외 경험이 있는 젊은 부부들이 늘고, 매체를 통해 자연스럽게 파티 문화를 접하면서 함께 어울려 나눠 먹는 즐거움을 시도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먹는다는 것을 우리 삶의 관계를 돌아보고 함께 나눠 먹는 즐거움을 찾는 과정이다”라고 말한다.
프랑스 식문화의 2가지 교훈
세계적인 미식의 국가 프랑스는 식문화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또 다른 국가다. 프랑스의 미식 문화가 유네스코 세계 무형 문화유산에 등재될 정도다. 프랑스인에게 식사의 의미는 사회화가 일어나고 화목한 분위기를 만드는 사교의 장이다. 이탈리아는 슬로라이프를 기반으로 한 슬로푸드를 강조한다. 슬로라이프는 먹는 것뿐만 아니라 생활방식 자체에 초점을 맞춘 식생활 교육으로, 가족과 함께 즐기는 식탁, 농업과 환경의 소중함을 아는 식생활, 전통 식품 위주의 식생활 실천 등을 포함한다.
이들 국가는 특히 ‘미각 교육’에 관심이 많다. 음식을 통해 정체성을 찾고 나아가 창의성을 키우려는 노력이다. 또한 일본은 식생활 기본 지침으로
‘지산지소(地産地消: 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은 그 지역에서 소비하자)’를 강조하고 있다.
한국의 식문화는 산업과 비교할 때 지금은 산업적으로는 성장기, 문화적으로는 태동기의 단계로 이해할 수 있다.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생기기 시작한 1980년대 이후로 식 산업이 발달했다면, 2000년대 들어 먹방 열풍을 만나 성장기의 정점을 지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 문화의 관점에서 보면 이제 막 식문화의 질적 성장을 논의하는 태동기로 볼 수 있다. 박상현 음식 칼럼니스트는 “먹방으로 일어난 식 열풍은 우리만의 독특한 현상은 아니며, 이미 다른 국가에서 겪었던 일들이다”라며 “그렇다면 이다음에 무엇이 올 것이냐 하는 전망에 대해 고민하고 대응할 시점이다”라고 말했다.
앞서 언급한 해외 사례에서 힌트를 얻어볼 수 있다. 먹방 이후의 논의는 바로 식재료를 중심으로 이뤄질 것으로 전망된다. 일본이 지산지소 운동을 통해 먹거리에 대한 관심을 키우고, 이탈리아가 슬로푸드 운동을 하면서 식재료의 품질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것과 같다. 이는 첫째,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물리적, 심리적 거리를 줄인다. 둘째, 자신이 직접 식물을 길러봐야 한다는 형태가 혼재돼서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보다 큰 관점에서는 농업의 부상과 맥을 같이 한다. 서점 신작 코너에 가보면 시골, 농부라는 타이틀이 매우 현대적이고 트렌드를 반영하는 단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시골의 발견(가든 디자이너가 안내하는 도시보다 세련되고 질 높은 시골 생활 배우기)>이 대표적이다. 이와 같은 농업의 재발견, 농업에서 미래 찾기는 식문화 선진국에서 이미 진행된 흐름이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가장 최고의 직업이 농부였다는 것은 뜬금없는 설정이 아니었다.
좋은 품질의 식재료를 찾는 것은 소비자와 생산자의 관계도 변화시킨다. 지금은 유통의 영역이 생산을 주도하는 시장이라면 좋은 식재료에 기꺼이 비용을 지불할 의향이 있는 소비자들의 출현으로 소비자가 생산자를 변화시킬 수 있다. 다시 말해,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유통 과정이 축소되고, 농사짓는 방법이 소품종 대량 생산에서 다품종 소량 생산으로 바뀌게 된다.
고품격 식 라이프를 추구하는 백정림 갤러리 이고 대표의 경우, 식재료를 크게 3가지 방법을 통해 구하고 있다. 제철 채소는 텃밭을 통해 수확한다. 과일 등은 마트에서 좋은 품질의 것을 구입한다. 육류와 해산물 등은 각각 최고의 산지를 찾아 현지 직송을 통해 배송 받는다. 예를 들면, 지리산 유기농 닭이 낳은 청란, 울진에서 공수한 갈치와 꽃게, 남해마을에서 받는 대저 토마토 등이다. 그는 지인들과 함께 생산자의 연락처를 공유하면서 생산자의 판로를 개척해주기도 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소비자가 생산자를 변화시키는 대표적인 사례다.
유기농의 인기는 신세계백화점의 프리미엄 마켓 청담동 SSG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강남 사모님들이 자주 가는 이 마켓의 콘셉트가 바로 유기농, 신선식품, 친환경 식재료 등 건강 식재료다. 최근에는 유기농을 4단계까지 나눠 ‘사람이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채취한 버섯’까지 등장했다. SSG 마켓은 별다른 홍보를 하지 않았지만, 매년 두 자릿수 신장률을 보이고 있다. SSG 마켓 관계자는 “한쪽에서는 오히려 식재료의 고급화를 원하고 있다”며 “최근 백화점들이 공통적으로 주목하는 시장이 바로 이 프리미엄 마켓이며, 그만큼 시장성을 높게 평가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단지 비싼 식재료를 식탁에 올려놓는 것이 식탁의 품격을 말해주진 않는다. 식탁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서 즐거운 문화가 생겨난다. 박상현 칼럼니스트는 “내가 먹는 이 간장은 진짜 간장인지, 내가 쓰는 이 된장은 진짜 발효 식품인지 등을 고민하기 시작할 때, 식탁의 품격 또한 올라갈 것이다”라며 “삼겹살에 상추쌈을 먹을 때, 어떻게 해야 더 맛있을까가 지금의 관심이라면, 삼겹살과 상추는 어디에서 왔는지를 생각하게 되는 게 밥상의 진화다”라고 말했다.
밥상머리 교육, 대화의 회복은 핵심이 되는 조건이다. ‘밥상에서 떠들면 안 된다’는 엄숙주의 문화에서 가족이 자유롭게 의견을 주고받는 소통의 장으로의 변신이 필요하다. 아침식사를 같이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고품격 식 라이프를 미각의 관점에서 보면, 현재는 ‘길들여진 맛’에 익숙한 상태로 볼 수 있다. 미각의 측면에서 ‘나만의 맛’을 찾아가는 단계로 나아가는 것도 식문화의 고급화 방향이다. 그제야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미식의 시대’라 말할 수 있다.
한식의 재발견
가족이 함께 만들고 함께 먹는 문화를 위한 또 하나의 변화는 바로 한식의 재발견이다. 한식은 많은 장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찬의 가짓수가 너무 많고 손이 많이 간다는 것이 단점으로 지적된다. 번거롭기 때문에 잘 안 해 먹는다는 것이다. 집밥은 꼭 주식과 부식을 모두 갖춘 한식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과 표준화된 레시피에서 벗어나 간소화 식단으로 쉽게 만들 수 있는 다양한 음식들을 시도해볼 수 있다. 또한 가족의 식탁이 회복되면, 그다음은 초대 식탁이다. 최근 홈파티를 즐기는 사람이 부쩍 늘었는데, 이를 위한 전제조건이 집에서 요리를 할 줄 아는 것이다. 나만의 메뉴를 개발하고 자랑할 수 있어야 멋들어진 초대 식탁을 차릴 수 있다.
거실로 들어온 식탁
공유 식탁이란 개념은 혼자 밥 먹기 싫은 1인 가구들이 밥을 먹기 위한 커뮤니티 ‘소셜 다이닝’에서 사용되는 직사각형 모양의 식탁으로, 처음 보는 사람들도 서로의 취미를 공유하며 소통하는 곳이다. 요즘과 같이 가족의 개념이 확대되고 전통적 가족에서 벗어나 1인 가구들이 서로 자유롭게 모이고 흩어지는 새로운 가족시대의 대표적인 식탁 연대다. 공유 식탁은 스타벅스를 비롯해 많은 카페들이 도입하고 있는데, 교보문고 광화문점이 지난해 11월 100여 명이 앉을 수 있는 공유 식탁을 설치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함께 모여 요리는 만드는 ‘공유 부엌’까지 등장했는데, 이 개념이 가정에 적용된 것이다.
함께 만들고 함께 먹는 문화를 만들기 위해 식탁이라는 곳을 ‘엄마의 공간’에서 ’가족의 공간‘으로 바꾸는 것이다. 박상현 음식 칼럼니스트는 최근 새로운 시도를 했다. 식탁을 주방에서 거실로 옮겨온 것이다. 일본 TV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좌탁과 같이 다용도로 쓰기 위해 쇼파를 치운 자리에 식탁을 들여놨다. 프리랜서인 박상현 칼럼니스트는 평소 그곳에 앉아 글을 쓰기도 하고 그의 자녀들은 숙제를 하기도 한다. TV도 보고 대화도 한다. 그러다 식사 시간이 되면, 다함께 테이블 세팅을 시작하고 함께 식사를 한다. 박 칼럼니스트는 “식탁은 밥 먹을 때만 가는 장소이다 보니 엄마의 공간이 되고 아이들은 각각 자기의 방을 중심으로 생활하게 되는데 가족 유일의 공통 공간인 거실에 식탁을 들여놓음으로써 가족이 함께하는 밥상을 만들 수 있다”며 “엄마의 공간이 아니다 보니, 밥만 먹고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수저라도 같이 놓고 마무리까지 같이 하는 교육적 효과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백정림 대표의 초대 식탁 가보니…
6월 16일 오후 11시, 백정림 이고 갤러리 대표의 서울 서초동 자택을 찾았다. 백 대표가 취재진을 위해 초대 식탁을 마련해서다. 이날의 메뉴는 7월 여름 별미식인 콩국수 한 상 차림. 식사 후 커피와 디저트까지 한 상에 담았다. 테이블 세팅은 여름과 잘 어울리는 블루 코발트 계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