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forum]철학·문학 속 오만

인문학자가 바라본 오만

오만은 철학자의 사색 속에서, 작가들의 작품 속에서 오랜 기간 치열하게 탐구해 온 화두였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일리어드>, <오디세이>, <아큐정전>, <오셀로> 등에서 보듯이 오만은 문학의 단골 메뉴다.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인문학자 김경집 작가는 오만을 어떻게 바라봤을까. <편집자 주>

인간은 비극적 존재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슬퍼질까. 그러나 그걸 외면한다고 삶이 행복으로 가득한 희극이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인간은 그 비극의 실체를 인식하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의 힘으로 존재한다. 그것이 인간 실존의 굳건한 뿌리다. 겉으로는 아무 문제없이 행복해 보일지 모르지만 비극의 실체와 그 가능성을 깨닫지 못하면 언제나 어설픈 이분법의 틀 안에서 자의적 해석으로 인지부조화에 빠지기 쉽다.

인간은 그러한 자신의 비극적 실존을 이겨내기 위해 위대하게 투쟁한다. 그것이 인간의 위대함이며 존재의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그것은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요구한다. 그래서 쉬운 방법을 선택한다. 자신의 잘난 면을 과대평가하고 포장해 그 막으로 자신을 보호하려 한다. 오만은 바로 그러한 선택의 결과다. 오만의 사전적 의미는 ‘태도나 행동이 건방지거나 거만함’이다. 스스로는 잘났다고 여겨서 그런 태도를 보이지만 보는 사람은 기분이 나쁘고 불편하다. 물론 실제로 그런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오만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존경과 권위는 생기지 않는다.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 오만이 아니라 겸손을 택했을 때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고 그의 권위에 동의한다.

오만에 대한 철학적 탐구는 단편적이다. 어쩌면 너무나 판단의 결과가 명백한 것이어서 굳이 철학적 성찰의 대상이 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문학에서는 다르다. 문학에서 오만은 매우 중요한 모티프가 되고 사건이 꼬이게 만드는, 즉 인간을 비극적으로 만드는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그것은 오만이 사유의 대상 혹은 주제가 아니라 태도와 심리의 그것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상 오만으로 인해 인생을 망치고 남들까지 비극으로 몰아넣는 경우를 흔히 만날 수 있다.

오만은 자기 보호의 그물망
일찍이 고대 그리스신화 또는 비극을 살펴보면 인간의 재앙은 바로 이 오만함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는 불의에 맞서는 인간의 정의와 인격의 고결함을 드높이지만 그 과정에 깔린 비극의 원인이 오만함 때문임을 보여준다. 비극의 씨앗은 안티고네의 아버지인 오이디푸스에서 비롯된다. 그는 스핑크스의 숙제를 풀어낸 영웅이지만 늘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고 타인의 의견을 가볍게 무시하는 오만한 인물이었다. 그의 비극적 운명은 신탁의 결과가 아니라 그 신탁을 두려워하면서도 정작 그마저도 이겨내려 한 인간의 욕망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일리어드>와 <오디세이> 또한 마찬가지 구조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이러한 의식을 다른 누구보다 강하게 품은 것은 아마도 다른 어떤 나라와는 달리 일찍이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통해 ‘자유로운 개인’의 의식이 강했던 환경의 영향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오만함은 자만, 자신감, 자존감과 종이 한 장 차이로 확연하게 갈리는 묘한 숙명을 지녔다. 물론 완전히 인지부조화에 빠진 오만, 혹은 자신의 부족함을 위장하기 위해 과장의 가면을 쓰는 루쉰의 <아큐정전>의 ‘아큐(Q)’ 같은 인물의 어설픈 오만도 있지만, 대부분의 오만은 자신에 대한 지나친 자신감이나 자존감과 섞여 있는 까닭에 스스로 오만하다고 인식하는 것은 어렵다. 오만의 판단은 자신이 아니라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인지하고 느끼는 것이다. 그것을 직설적으로 말해주는 건, 오만한 사람에게는 용납되기 어려운 까닭에 기피할지언정 말해주기는 어렵다. 결국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오만이 삶을 망가뜨리는 것을 수수방관하기 쉽다.

오만함에 대해 가장 깊이, 그리고 적확하게 표현한 인물을 꼽자면 아마도 셰익스피어를 첫손에 꼽을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세상의 이분법, 선과 악, 미와 추 같은 구분법이 낳은 편견과 오만에 도전했다. 그의 작품, 예를 들어 4대 비극의 주인공들은 오만의 아이콘과도 같다. <오셀로>는 인종주의적 편견, 권력을 가진 자의 오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아름다운 베니스의 백인 처녀 데스데모나를 얻은 나이 든 흑인 오셀로는 극단주의적인 이분법에 사로잡혀 결국 사랑을 비극으로 치닫게 하지만 그 바탕에는 자신이 모든 판단을 완벽하게 내릴 수 있다는 오만이 자리 잡고 있다. 그 오만은 결국 그로 하여금 극단주의에 빠지게 만들었다. <리어왕>의 주인공 리어왕도 온갖 어리석은 판단을 내리면서도 자신은 왕으로서 권위와 위엄을 가졌을 뿐 아니라 가장 현명한 판단을 내리는 인격이라는 착각에 빠져 자신뿐 아니라 세 딸의 파멸을 자초한다. 어리석음과 오만은 사이좋은 친구라는 걸 이 작품은 여실히 보여준다.

“켄트 백작은 아무 말 마오! 용왕의 노여움에 맞서지 마오. 나는 그 애를 가장 사랑하고 있었소. 그 애의 정다운 위로를 받으면서 여생을 보내려고 생각했었소. 나가라. 사라져 버려라. 그 애에 대한 아비로서의 마음을 버린 이상, 이제 무덤만이 내게는 안식처로구나! 이 3분의 1의 영지를 둘이서 분배하오. 그 애는 스스로 ‘정직’이라고 부르는 ‘오만’과 결혼하면 된다.”

리어왕의 이 대사는 의미심장하다. 정직과 오만의 경계가 얼마나 교묘한지 날카롭게 구별한다. 따라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셋째 딸 코딜리아다. 흔히 코딜리아는 거짓과 위선 혹은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자신의 이익을 취하지 않는 가장 현명한 딸로 인식하고 있지만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자신이 옳고 언니들의 교언이 거짓이라는 강한 자부심이 자리 잡고 있다. 아버지 리어왕의 분노에도 꺾이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고수하는 것도 굳이 따진다면 코딜리아의 오만이다. 결국 <리어왕>은 오만과 아부가 교묘하게 이중주로 연주되며 인간이 얼마나 처절하게 그 값을 치러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리어왕>은 인생의 깊이와 인간 본성의 오만함에 대한 비극으로 혈육 간의 유대마저 파괴하는 극단을 보여준다. 인생의 깊이와 권력 혹은 인간 본성의 오만함이 빚어낸 비극을 셰익스피어는 완벽하게 극화시킨다. 아마도 셰익스피어의 작품 가운데 ‘오만’에 대해 가장 잘 표현한 것은 <자에는 자로>(Measure for Measure)일 것이다.

“오만한 인간은 겨우 한동안 권력을 빌려 있는데 지나지 않으면서, 자기가 유리처럼 취약한 존재라는 뻔한 사실도 알지 못하고, 성난 원숭이같이 터무니없는 장난을 하느님 앞에서 제멋대로 해대며 천사들을 울리고 있습니다.”

오만은 스스로 인식하고 극복하기 어렵다. 누구나 오만을 경계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오만을 정직이나 자신감 혹은 자존감으로 착각한다. 그래서 스스로 인식하고 극복하기 어렵다. 그러나 오만은 무수히 많은 작품을 통해 그것이 어떻게 인간을 갉아먹고 끝내 파멸에 이르게 하는지 보여준다. 그 구체화된 오만의 실체를 인식하고 성찰해 자신을 수양하는 것은 바로 문학이 주는 선물이다.



철학자 가운데 오만의 실체와 그것의 양면성을 가장 잘 드러내고 표현한 인물은 바로 니체일 것이다. 니체는 오만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물론 그가 드러내놓고 오만을 부추기거나 찬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니체는 노예근성과 비굴함을 인간이 스스로 주인이 돼 초탈할 수 있는 가능성을 버리게 만드는 원흉으로 본다. 니체는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간이 초인(übermensch, suuperman)이 돼 스스로 주인으로서 당당하게 존재해야 함을 강조했다. 초인은 가장 이상적이고 당찬 인간의 전형이다. 그러기 위해 인간은 굴종과 비겁을 버려야 한다. 니체는 인류가 지난 5000년 동안 낙타와 같은 삶을 살았다고 비판한다.

굴종과 인내가 낙타의 미덕으로 여겨지며 학습되고 스스로 체화했을 때 더 이상 인간은 자존적 존재가 아니다. 인류가 초인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허구적이고 왜소한 탈을 스스로 벗어야 한다. 낙타의 비굴함과 사자의 오만함을 벗어나 순진무구하고 희망찬 아이처럼 돼야 인간 해방을 이룰 수 있다. 니체는 비굴과 오만을 모두 비판했지만 굳이 하나를 택하라면 낙타의 비굴보다는 사자의 오만을 고르라고 부추긴다. 사자는 비록 난폭하고 약탈적이나(오만의 나쁜 면) 가장 용맹하고 숭엄함을(오만의 긍정적인 면) 지녔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쩌면 서양 철학은 지적 오만에 대한 경계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는 긴 역사를 지녔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소피스트들 가운데 알량한 지식을 팔며 권력에 기생하는 자들이 많았다. 인간의 오만 가운데 하나인 지식에 대한 오만은 그것이 하나의 권력으로 자리 잡을 때 병이 된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지식을 자랑해도 그게 대단할 것도 없거니와 자신과 타인을 다치게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소크라테스는 그런 오만에 대해 근원적인 반성을 촉구한다. 지식이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치달으면 필연적으로 오만의 병폐에 맞닿는다.

그러나 모든 오만이 다 병은 아니다. 다시 문학작품으로 돌아와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펼치면 성격과 신분, 계급, 부가 다양한 방식으로 부여한 오만을 만난다. 그러나 소설은 오만이 거만이 아니라 진정한 자긍심과 동의어가 될 수 있음을 결론에서 보여준다. 다시가 엘리자베스에게 했던 말은 그 백미다.

“허영은 진짜 결점인 반면 오만은 진정으로 뛰어난 지성의 소유자라면 그것을 늘 잘 통제하기 마련이고 그것은 오만이라기보다 자긍심이라고 해야 한다.”

독이 치명적이지 않은 함량이면 오히려 가장 강력한 약이 되는 것처럼 오만은 인간을 파멸에 이르게 할 수도 있지만 자신을 지켜내는 성채가 될 수도 있다. 결국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끝까지 내적 긴장의 경계심을 갖을 수 있느냐가 문제일 것이다. 자신감과 자존감이 부족하면 비굴하기 쉽고, 과하면 오만하기 쉽다. 그 어느 쪽도 인간을 자유롭고 당당하게 하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오만에서 우리가 만나는 지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Mesotes, the Golden Mean)이라는 키 플레이어일 것이다.

김경집 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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