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혼외자는 상속 문제에 있어 적어도 법률적 불평등은 받지 않는다. 다만 사회적 편견이 상당할 뿐이다. 그들이 외롭게 전쟁을 벌이는 이유다.
고(故) 이맹희 CJ그룹 명예회장의 혼외자인 이 모(52) 씨가 배다른 형제인 이재현(56) CJ그룹 회장, 이미경(58) CJ그룹 부회장, 이재환(54) 재산커뮤니케이션즈 대표 3남매와 손복남(83) 고문을 상대로 벌이고 있는 ‘유류분반환청구 소송’이 세간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지난 4월 1일 첫 재판이 열린 이 사건은 고 이맹희 명예회장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간에 벌어진 7000억 원대 상속 소송에 비견될 바는 아니지만 상황에 따라 수백, 수천억 원의 소송전으로 비화될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하지 못한다.
지난해 말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혼외자 딸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자진 고백해 재계에 충격을 던져주기도 했다. 최 회장의 재산 대부분이 SK그룹의 지배구조 정점에 있는 (주)SK의 지분(23.4%)이라는 점에서 자칫 이혼 소송으로 번질 경우 SK그룹의 지배구조까지 심하게 흔들 수 있기 때문이다.
조금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2013년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혼외자 문제가 불거지며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 수사를 지시한 채 전 검찰총장 찍어내기라는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같은 해 차영 민주당 대변인과 조희준 전 국민일보 회장 간 친자확인 소송이 이슈가 되기도 했다. 정치인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도 혼외자 문제로 몸살을 앓아야 했다.
사실 혼외자를 둘러싼 분쟁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일부일처제를 법으로 정해 놓은 한국에서 ‘혼외자’라는 존재는 ‘분쟁의 씨앗’이 될 소지가 크기 때문이다. 특히 혼외자의 상속 문제를 방치할 경우 가족 간 상속재산 갈등이 더욱 첨예화될 수밖에 없으며, 기업지배구조의 안정성도 장담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늘어나는 혼외자 상속 분쟁 어쩌나
최근 언론을 뜨겁게 달구는 혼외자 상속 문제. 실제로도 혼외자와 관련된 소송이 늘고 있을까? 사실 은밀한 가족사의 한 부분인 혼외자 소송을 간단한 수치로 알기는 쉽지 않다. 다만 혼외자와 관련된 인지(認知, 혼인 외에 출생한 자녀에 대해 부모가 자신의 자녀라고 인정하는 행위) 청구의 소나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친생자관계존부확인 또는 친생부인청구(친생자 관계가 존재하는 여부를 확인하거나 부인하는 청구) 소송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2015년에 발간한 대법원의 사법연감에 따르면 인지에 관한 소송(제1심 접수 기준)은 2005년 247건에 불과했지만 10년 뒤인 2014년에는 2배 가까운 489건으로 늘었다. 2014년 인지에 관한 소송만 놓고 봤을 때 원고가 이긴 소송은 234건(일부 승소 포함)에 달했으며, 원고가 패하거나 각하된 건수는 8건에 불과했다. 또 소취하는 102건, 조정이나 화해는 52건이었다. 친생자관계존부확인 또는 친생부인청구(제1심 접수 기준)도 꾸준히 늘어 2005년 2292건이었던 것이 10년 뒤인 2014년에는 5224건으로 2배를 훌쩍 넘었다.
그렇다면 최근 들어 혼외자들이 급격히 늘어난 것일까? 전문가들은 최근 상속과 관련된 소송이 늘면서 그에 수반해 혼외자 문제도 동시에 부각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임채웅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는 “최근 암 환자들이 늘고 있다고 하는데 이는 인구의 고령화와 검진 기법의 발달 등에 의한 영향이 클 것”이라며 “혼외자 문제도 최근 상속 문제가 부각되면서 권리 찾기 측면에서 크게 부각된 면이 있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혼외자와 관련된 상속 문제가 다소 까다로운 것은 특유의 비밀스러움 때문이다. 자칫 자신에게 도덕적 타격이 될지도 모를 혼외자의 존재를 평생 동안 꼭꼭 숨기거나, 혼외자에 대한 사전증여 역시 자금이체 경로를 파악하기 쉽지 않은 경우가 많다.
또 본처 소생의 자녀들에게는 혼외자가 불편한 존재일 수밖에 없고, 상속재산분할이나 경영권 지분과 관련해서는 어떻게 해서든 배제하려고 하기 때문에 다소 감정적인 상속 분쟁으로 불거질 소지가 크다.
혼외자, 법률 앞에서는 평등
임채웅 변호사는 “혼외자에 대한 법률적 차별은 없으며, 상속도 마찬가지다”라며 “혼외자들이 상속재산에 대한 정보에서 밀려나 어려움이 있다고 하는데 이는 재혼한 가정에서 본처 소생의 자식들도 똑같이 겪는 어려움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지적대로 상속에 있어 혼외자이기 때문에 받는 법률적 차별은 없다. 다만 혼외자의 경우 상속권을 주장하기에 앞서 인지를 통해 법률적인 자녀의 지위를 확인해야 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최근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혼외자의 상속분을 본처 소생의 자녀의 절반으로 하도록 한 규정이 위헌이라는 결정이 내려졌는데 이와 비교해도 한국의 혼외자에 대한 법률적 평등권은 한참을 앞서간 것이다.
혼외자가 상속권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인지 효력을 인정받아야 한다. 아버지가 생전에 혼외자를 임의로 인지해 관공서에 신고하면 인지 효력이 발생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는 혼외자나 그 직계비속(아들, 딸, 손자, 손녀) 또는 법정대리인이 재판상 인지를 청구할 수 있다.
친자 여부는 유전자검사 등을 통해 밝힐 수 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친자 판정에 오류가 생길 확률은 4조7000억 분의 1에 불과하다. 이만의 전 환경부 장관처럼 유전자검사에 불응하는 경우도 있지만 2011년 대법원은 그와 딸의 친자관계를 확정한 바 있다.
재판을 통해 인지 효력이 발생하면 혼외자는 출생 시로 소급해 친자관계를 인정받게 되며, 아버지가 자신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고 해도 혼인 중의 자녀와 동일한 상속 지위를 보장받게 된다.
문제는 부모가 사망한 경우다. 부모의 사망을 안 날로부터 2년 내에 검사를 상대로 인지청구를 해야 자녀임을 인정받을 수 있다. 실제 재판 과정에서는 부모의 사망을 안 날이 언제인가를 놓고 신경전을 펼칠 때가 많다는 것이 법조계의 귀띔이다.
인지청구는 혼외자는 물론 그의 자녀들도 할 수 있는데 법조계에 따르면 미국 국적의 한 상속인이 돌아가신 아버지가 한국의 한 재력가의 이복형제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고서 뒤늦게 인지청구를 통해 유류분청구를 주장한 경우도 있었다.
임채웅 변호사는 “인지청구는 혼외자의 자식들이 할 수도 있는데 인지의 대상이 되는 부모가 사망한 사실을 언제 알았는지 여부를 놓고 법적 공방이 벌어지기도 한다”며 “만약 부모의 사망을 안 날로부터 2년이 지났다면 인지청구는 물론 상속권도 주장할 수 없다”고 전했다.
부모가 사망한 후 인지 효력을 인정받았지만 이미 다른 형제들이 상속재산을 처분해 상속분을 침해받았다면 어떻게 해야 될까? 이 경우 다른 상속인들을 상대로 상속회복청구를 할 수 있다. 상속회복청구는 그 침해를 알게 된 날부터 3년 또는 상속권 침해 행위가 있는 날부터 10년 내에 하면 되는데 이 두 기간 중에 하나라도 종료된다면 상속회복청구가 불가능하다.
여기서 주의할 점이 바로 상속재산의 가치평가다. 상속분의 가치평가는 피상속인의 사망으로 인한 상속 개시 시를 기준으로 하지만 다른 공동상속인이 이미 재산을 나눠가져 혼외자가 이에 대해 상속분지급청구를 하게 된 경우 재판이 종료되는 시점(사실심 변론종결일)을 재산 가격 산정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김상훈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는 “상속 개시 후 인지 또는 재판에 의해 공동상속인이 된 자가 상속재산분할을 청구할 경우 다른 공동상속인이 이미 재산을 나눠가졌다면 혼외자에게 상속분에 해당하는 가액을 지급하도록 하고 있다”며 “가액 반환의 경우 상속분을 청구하는 사건의 재판이 종료되는 시점을 상속분 가치를 평가하는 시점으로 본다”고 설명했다.
그러면 부모가 돌아가시기 전에 작성해 둔 혼외자의 상속 포기 각서는 유효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상속 개시 전 유류분을 포함한 상속의 포기는 무효다.
예를 들어 혼외자 A씨가 아버지의 본처와 배다른 형제들에게 일정 금액을 받는 대신 상속과 유류분을 주장하지 않겠다고 각서를 썼다고 치자. 하지만 당시 아버지가 살아 있어 상속이 개시되기 전이라면 각서는 효력을 인정받을 수가 없다.
법조계에 따르면 최근 판결에서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상속재산분할 협의를 하면서 부제소합의(향후 민·형사상 일체의 소송을 하지 않겠다는 합의)를 했더라도 그 합의가 ‘착오나 기망에 의한 합의’라면 효력을 잃을 수 있다.
실례로 최근에 종결된 한 재판에서 부제소합의 당시 생전 증여가 100억 원이라고 해 10억 원 정도를 받고 합의를 했던 혼외자 형제들이 차후 생전 증여의 가치가 1000억 원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서 공동상속인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사전 합의에도 불구하고 추가적으로 100억 원 상당의 유류분을 추가로 인정받기도 했다.
임채웅 변호사는 “혼외자라고 해서 상속에 있어서 차별하지는 않지만 사회적·도덕적 편견으로 인한 상처를 받을 수는 있다”며 “인지청구 소송을 통해 효력을 인정받기 전에는 상속자의 지위가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정보 제공 요청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는데, 공동상속인들이 작심하고 상속재산을 빼돌리게 되면 재산 파악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피상속인 입장에서는 숨기고 싶겠지만 생전에 혼외자의 존재를 밝히고 상속인들에게 생전 증여한 내용을 꼼꼼하게 기록해 둘 필요가 있다”며 “혼외자의 존재가 갑자기 드러나고 사후에 상속재산을 놓고 다툼이 벌어질 경우 남은 가족들이 입게 되는 상처는 배가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한용섭 기자 poem197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