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eat teaching]죽음을 엿본 청춘, 상실을 말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에는 소설 같은 사건이 없다. 다만 가장 친한 친구의
알 수 없는 죽음과 그의 여자 친구인 나오코의 이야기에서 죽음을 엿보고 만 청춘의 상실감이
비틀스의 노래 ‘노르웨이의 숲’으로 흘러나온다.

1968년 일본, 한 청년이 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대학 수업에서 라신을 읽고 에이젠슈타인을 배웠지만 그 책들이 아무것도 말해주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친구도 없었고 친구를 만들려고 하지도 않았다.

거리에는 지미 핸드릭스와 짐 모리슨의 노래가 울려 퍼졌고 여학생들의 스커트가 점점 짧아졌으며 데모의 열풍에 휩싸이던 시절이었다. 적어도 그가 보기엔 그랬다. 이 청년의 이름은 와타나베다.

와타나베가 자주 읽는 책은 ‘위대한 개츠비’였다. 그의 주변에 ‘위대한 개츠비’를 읽어본 사람도 없었고 읽으려고 하는 자도 없었다. 어느 누구도 자살한 미국의 젊은이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전공투(전국학생공동투쟁회의) 탓으로 돌렸지만, 그조차도 설득력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와타나베는 ‘위대한 개츠비’를 좋아했다. 그가 ‘위대한 개츠비’를 손에서 놓을 수 없었던 것은 친구 기즈키 때문일지도 몰랐다. 기즈키는 열일곱의 나이에 생을 등졌다. 가장 친한 친구였고 죽기 전날까지 같이 당구를 치며 어울렸다.

기즈키의 마지막을 같이 했다는 이유만으로 경찰에 불려가기도 했으나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어떤 기미도 없었고 특별한 징후도 없었다. 그렇게 기즈키는 죽었고 와타나베는 그 이유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기즈키의 여자 친구였던 나오코에게 연락하는 일 정도였다. 그런데 나오코조차 요양원에 들어가서 연명하듯 목숨을 이어갔다. 그리고 결국 살아남지 못했다. 기즈코와 나오코, 일본 고도 성장기에 부족함 없이 자란 아이들이었다. 인공낙원을 향해 가듯 세련된 것들로 무장하며 미래를 향해 달려가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생을 등졌다.

“내가 어떻게 너를 잊을 수 있겠어”
‘노르웨이의 숲’은 와타나베의 이야기지만 이른바 ‘소설 같은’ 사건은 하나도 벌어지지 않는다. 친구의 알 수 없는 죽음과 그의 여자 친구인 나오코가 요양원에서 지내는 이야기, 그리고 이들을 향해 “내가 어떻게 너를 잊을 수 있겠어”라고 말하는 와타나베의 자잘한 일상뿐이다. 기승전결로 이어지는 파국적 사건의 매듭도 없고, 그 속에서 느껴지는 삶의 애환 같은 것도 없다.

그는 지나친 삶의 생기를 가짜라 생각했고, 모든 것을 극복할 것처럼 달려드는 열정도 거짓이라고 생각했다. “요 몇 년 동안 도대체 내가 어떤 풍경에 익숙할 수 있단 말인가. 내 기억 속에서 친밀하게 다가오는 마지막 풍경은 기즈키와 둘이서 당구를 친 항구 가까이에 있는 당구장의 정경이었다. 그날 밤 기즈키는 죽어 버렸고 그 이후로 나와 세계 사이에는 뭔가 삐걱대고 차가운 공기가 스며들고 말았다.” 와타나베는 이렇듯 청춘의 기능이 완전하게 망가져 버린 것 같다고 말했다. 삶 속에 깃들어 있는 죽음을 엿본 청춘. 그래서 그는 열정이나 저항조차 신파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저 세계와 접속하지 않은 채 삶 속에 놓인 심연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들에겐 성장해야 할 세계도 없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미래도 없었다. 그건 어른들이 좋아하는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고,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와타나베가 유일하게 하는 일은 같이 수업 듣는 미도리 곁에 있어주는 일 정도였다.

오글거리는 말이나 심금을 울리는 대사 없이 아버지의 죽음을 감내하고 있는 미도리 옆에 기꺼이 있어주는 소소한 일, 소설의 마지막 장에서 와타나베는 미도리에게 말한다. “너와 꼭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아. 꼭 해야 할 말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 어쩌면 그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 겨운 말을 할지도 모르겠으나 어찌됐든 와타나베는 용기를 내고 있다.

소설은 이렇게 끝이 난다. 이미 알려진 것처럼 ‘노르웨이의 숲’은 한국에서 이정표가 된 작품이다. 1989년 발간 이후 15년간 베스트셀러였고, 2009년 대한출판문화협회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일본 소설이다. 1989년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발간됐을 때 한국에서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하루키 신드롬이라고 할 정도였다.

하루키 이전과 이후로 일본 문학에 대한 이해가 달라진다고 볼 만큼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이 낳은 파장은 대단했다. 그렇다면 왜 ‘노르웨이의 숲’인가. 매사 심드렁한 태도로 일관하는 와타나베의 이야기에서 독자들은 무엇을 읽고 있었던 것일까. 분명한 것은 와타나베가 이 세계 속에 놓인 숱한 구멍과 균열을 엿보고 있으며, 이 삶 속에 놓인 죽음을 쉽게 지워내며 짐짓 발랄한 얼굴로 가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온전히 한 개인의 몫으로 그 무게를 견뎌내려고 한다. 때로 지나치게 폐쇄적으로 보일 정도로.

그래서일까. 와타나베의 사랑에서는 지독할 정도로 날것의 냄새가 난다. 낭만적 사랑 안에서 보이지 않았던 것들은 있는 그대로 드러나고, 세상의 마지막을 같이 하는 것처럼 뜨겁도록 즉물적이다. ‘젊은 날 슬프고 감미로운 사랑 이야기’라고 책을 광고하는 것이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들의 사랑은 죽음을 옆에 둔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삶의 거처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마땅한 대의 속에 가려져서 말하지 않았던 감각들, 세련된 감정 밑에 가려진 뜨거운 본능을 머뭇거리지 않고 드러낸다. 그래서 포르노 속에서나 만날 수 있었던 몸의 감각들이 외설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표현된다. 그의 사랑은 무분별한 소비와 다름없는 욕망의 배설이 아니라 몸의 기억인 동시에 온기에 대한 열망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이들의 사랑이 낯 뜨거울 수 있지만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와타나베는 어느 순간에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머뭇거리지도 않는다. 어디에 있는지도,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조차 모르지만 어느 순간에도 죽음의 도랑 옆에 있는 것처럼 사랑한다. 간절하고 유일한 것에 대한 의지. 와타나베는 1990년대 전후로 등장하고 있는 새로운 인간형이다.

나와 세계 사이에 메꿔질 수 없는 심연을 엿본 자, 그리고 그것을 애써 외면하거나 쉽게 긍정하려고 하지 않는 자, 그래서 사랑에서조차 판타지 없이 돌진하는 자. 만약 어느 자리에서든 나오코와 같이 들었던 비틀스의 ‘노르웨이의 숲’ 노래가 들려온다면 와타나베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내가 어떻게 너를 잊을 수 있겠니”라고 말할 것이다. 늘 그 중심에 놓인 허방을 주시하고 있었던 것처럼.
박숙자 경기대 교양학부 조교수 / 일러스트 김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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