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 때문에 뜻하지 않은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것이 바로 성년후견제도다. 포커스 자체가 롯데가(家)의 경영권 분쟁에 맞춰져 있다 보니 늘 소품처럼 화면 밖에 가려져 있지만 이 제도는 고령 상속의 열쇠를 쥐고 있다.
TV 화면에 휠체어를 탄 신격호 총괄회장의 모습이 비춰진다. 1922년생으로 올해 95세다. 한때는 한·일 양국을 비행기로 오가며 왕성한 경영을 펼쳤던 그이지만 화면에 비춰지는 모습은 그냥 고령의 노인일 뿐이다.
신동빈(62) 롯데그룹 회장과 신동주(63) SDJ코퍼레이션 회장 간의 경영권 분쟁은 신격호 총괄회장에 대한 성년후견인 지정 심리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성년후견제도는 장애인, 치매, 노령으로 인해 정신적 판단 능력이 부족해 법률행위를 독자적으로 처리할 수 없는 사람에 대해 법원이 법적 후견인을 선임하는 제도를 말한다.
법조계 등에 따르면 신격호 총괄회장은 4월 말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2주 정도 정밀검사를 받고 정신건강을 검증받게 되며, 검사 결과는 5월경에 나올 것으로 보인다. 이후 정신건강에 이상이 있다고 판단하면 신격호 총괄회장의 넷째 여동생 신정숙(79) 씨가 신청한 성년후견인 지정을 놓고 협의를 벌이게 되며, ‘건강하다’는 판정을 받게 되면 자연스럽게 성년후견인 지정은 무산된다.
하지만 이 과정은 수년 동안 이어질 수 있다. 법조계에 따르면 성년후견(한정후견 포함) 개시까지 걸리는 기간은 약 5개월(접수일부터 확정일까지)이며, 성년후견 개시 심판 이후 참가인들이 항고와 재항고로 맞설 경우 성년후견 개시 심판 확정 시점은 1~2년 이상 미뤄질 수밖에 없다.
성년후견, 오해 또는 진실
신격호 총괄회장이 성년후견인 신청에 보인 반응은 일단 불쾌감이었다. 한국 경제사(史)에 큰 족적을 남긴 그였기에 성년후견인 지정은 자신의 무능력을 인정하는 모습이라고 느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신적 파산선고로 불렸던 과거 금치산제도·한정치산제도와 성년후견제도는 기본 출발부터가 다르다. 과거 제도가 당사자의 보호보다는 사회 전체의 거래 안전을 위해 행위를 제한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면 성년후견제도는 피후견인의 행위를 돕는 제도다.
서울가정법원 부장판사 출신의 김태의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는 “성년후견제는 피후견인의 복리를 위한 제도로 설계된 것”이라며 “과거 제도는 사실상 정신적 파산선고로 이후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나 성년후견제도는 피후견인의 잔존 능력을 활용할 수 있도록 대리권 범위를 탄력적으로 정하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라고 설명했다.
성년후견제는 다시 성년후견, 한정후견, 특정후견, 임의후견으로 나눌 수 있다. 성년후견은 질병, 장애, 정신적 제약으로 사무를 처리할 능력이 결여돼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 신청하게 되며, 치매 판정을 받았거나 신체에 일정 장애가 있어 사무를 처리할 능력이 부족할 때는 한정후견, 재산 관리나 회사 경영 등 특정 사무에 한해 후견이 필요한 경우 특정후견, 계약에 의해 후견이 성립되는 경우를 임의후견이라고 한다.
사실 성년후견제도가 주목받고 있는 이유는 고령화 때문이다. 누구나 몸과 마음의 영원한 건강을 원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또한 건강이다. 2018년 우리나라 인구 100명 중 14명이 65세 이상 노인이 될 것이라고 한다. 앞으로 10년 후에는 65세 이상 노인 중 치매환자가 100만 명에 이를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노령과 질병으로 판단 능력이 부족해지면 상속 문제 등 가족 갈등으로 뜻하지 않은 파국을 맞이할 수도 있다.
급기야 치매노인의 성년후견 심판을 검찰에서 직접 청구한 사례도 있다. 지난해 9월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은 재력가 치매노인 A(85)씨와 정신장애 아들 B(56)씨에 대해 서울가정법원에 성년후견 개시 심판을 청구한 바 있다.
이들이 치매 또는 정신장애로 사무 처리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30억 원 상당의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A씨의 딸 C(53)씨가 내연남과 함께 A씨와 오빠 B씨를 요양원에 유기한 후 재산을 빼돌리려 한 사실을 A씨 부자 소유의 상가 세입자들이 진정서를 내며 알려지게 됐기 때문. 이 사건은 2013년 7월 성년후견제도가 도입된 이후 검찰에서 처음으로 심판을 청구한 첫 사례이기도 하다.
김태의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는 “정신 능력과 판단력이 흐려지기 전에 자신을 가장 잘 돌볼 수 있는 후견인을 지정할 수 있는 임의후견제도를 잘 활용한다면 고령에 상속 문제로 어려움을 덜 겪을 수 있다”며 “국내 치매환자만 40만 명 규모라는 분석이 있는 만큼 앞으로 성년후견제도의 활용은 점차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고령화 한국, 성년후견의 숙제는?
한국의 고령화 속도로 봤을 때 향후 성년후견인 신청은 급속도로 늘어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한국보다 앞서 초고령사회로 접어든 일본의 경우 2000년 4월 민법상 성년후견제를 도입한 이후 현재는 20만 명 정도가 이 제도의 도움을 받고 있다.
이제 2년 반을 겨우 넘긴 성년후견제도가 제대로 정착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서울가정법원의 후견별 통계(2015년 9월 30일 기준)를 보면 총 1423건 중 성년후견이 1131건으로 79.5%를 차지하고 있고, 후견인 선임 현황을 보면 친족후견인의 비중(644건, 87%)이 압도적이다.
문제는 고령화 시대에 예고 없이 찾아오는 건강 이상 징후를 사전에 대비해야 하는데 정신이 멀쩡할 때 계약을 통해 후견인을 지정하는 임의후견은 12건(0.8%)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최수령 법무법인 충정의 변호사는 “재산을 탕진하고 뒤늦게 성년후견제도를 신청해 달라는 식의 요구가 많다”며 “정신이 멀쩡할 때 계약을 통해 임의후견을 맺는다면 불의의 사고를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조언했다.
또 그는 “일본에는 아예 명칭이 후견신탁이라는 금융상품이 나와 있는데 미리 계약을 통해 성년후견을 받아야 할 시점에서 신탁을 통한 재산관리와 후견인을 통한 신변관리를 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라고 덧붙였다.
친족후견인에 대한 지나친 편중도 문제로 지적된다. 후견인 선임 비용 문제나 피후견인의 사정을 잘 안다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성년후견제도에 대한 전문적 지식이 없어 후견 사무를 수행하는 데 어려움이 있고 향후 상속을 예상해 재산 문제를 명확하게 처리하지 않는 경우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이를 보완해 전문가후견인을 확대하거나 친족후견인 교육을 강화하는 보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후견인의 권한 남용을 방지하기 위한 후견 감독 문제도 시급하다. 가정법원은 직권 또는 피성년후견인, 친족, 성년후견인, 검사, 지방자치단체장의 청구에 의해 성년후견감독인을 선임할 수 있도록 하고 있지만 피후견인의 경제적 부담을 가중시킬 수 있다는 이유 등으로 후견감독인 선임을 강제하고 있지는 않다. 우리나라의 경우 친족후견인의 비중이 87%에 달하지만 이들을 감독할 마땅한 장치는 없는 상황이다. 이 경우 친족의 권한 남용에 사실상 무방비 상태가 될 수 있다.
김태의 변호사는 친족상도례(親族相盜例)라는 규정을 통한 제도상 허점을 지적했다. 친족상도례는 강도죄와 손괴죄를 제외한 재산죄에 있어서는 친족 간 범죄의 경우 형을 면제하거나 고소가 있어야 공소를 제기할 수 있는 특례를 인정해주는 것이다. 즉, 친족이 후견인을 맡아 재산 문제가 생겨도 이 규정을 적용하면 처벌할 수 없다는 말이다.
김 변호사는 “친족상도례 규정 때문에 재산 문제 대부분에서 친족 간 처벌이 안 된다”며 “하지만 친족이 후견인이 돼서 재산 처분까지 할 수 있는데 형사처벌이 안 된다고 하면 후견제도의 기초가 무너지는 만큼 친족이 후견인이 된 경우에는 이 규정의 적용이 안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한용섭 기자 poem197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