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리아 시대에 열렬한 사랑을 받은 장미는 번영과 허영이라는 양면성의 상징이다.
역사적으로 장미와 가장 인연이 깊은 나라는 아마 영국일 것이다. 잉글랜드에서 장미는 왕실의 문장으로 사용됐고 그들의 왕권 다툼이 장미전쟁이라는 명칭을 낳기도 했다.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에는 장미의 이미지가 국가의 상징이자 계몽적·낭만적 영감의 근원으로서 예술작품과 실용적 디자인에까지 널리 확산됐다.
빅토리아 여왕이 통치하던 시기(1837~1901년)에 영국은 산업혁명과 제국주의를 주도하며 최강의 경제 대국으로 부상했다. 산업이 발달하고 번창한 도시에서는 풍요와 활기가 넘쳤다. 빅토리아 시대 중기인 1850~1870년대에는 번영의 절정을 구가하며 모든 분야에서 변화와 혁신을 이룩했다. 때마침 발표된 다윈의 진화론은 종래의 창조론적·실체론적 세계관을 뒤흔든 대변혁의 사건이었다. 이런 가운데 어느 때보다 생물의 종에 대한 관심이 증가했고 식물의 변화에 대한 연구도 활발히 진행됐다. 기존의 호사 취미에 과학적 흥미가 더해지면서 꽃의 특징을 기록한 식물 삽화도 황금기를 맞이했다. 아름다운 꽃을 묘사한 정교한 삽화들은 일반인에게도 인기가 높았다. 이에 부응해 여러 식물 잡지들이 나왔는데 그중 가장 성공을 거둔 잡지는 1860년대에 발행된 ‘플로럴 매거진’이었다. 이 잡지는 식물화가 제임스 앤드루스(James Andrews)의 화려한 꽃 그림을 수록해 영국과 미국에서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 앤드루스의 그림들은 대체로 꽃송이와 잎이 크고 튼실해서 아름다울 뿐 아니라 무척 건강해 보인다. 그가 그린 장미꽃을 보면 단단하고 탐스러운 모양이 마치 빅토리아 시대 전성기의 자부심을 노래하는 듯하다.
절제된 외면과 강한 욕망의 내면 지닌 여성의 이미지
한편 빅토리아 시대에는 진보와 개혁을 추구하면서도 여전히 계몽주의의 고전적·보수적 논리가 지배하고 있었다. 개인에게는 가정에 대한 의무와 함께 절제, 금욕, 순결과 같은 도덕적 규범이 엄격히 요구됐다. 그 표면적 고상함 이면에는 허영과 위선이 병존했으니, 도시에는 노동자, 매춘부 등 신종 빈민이 늘어났고 매독 같은 성병이 극성을 부렸다. 여성에게는 참정권, 이혼권 등의 권리가 확대됐으나 보수적 시각이 공존해 실제로는 제약이 많았다. 오히려 여성의 주체성에 대한 각성이 남성에게 위협으로 여겨지면서 ‘팜므 파탈(femme fatale)’이라는 치명적인 ‘요부’상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미술에서는 ‘라파엘 전파’라 불리는 화가들을 중심으로 기존의 틀에 박힌 아카데믹한 관습을 버리고 곡선과 장식을 부활시킨 신비롭고 상징적인 미술양식이 태동했다. 이들은 고대의 신화나 중세의 전설, 셰익스피어나 시인들의 문학 등에서 테마를 빌려와 현실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곤 했다. 그들의 그림에는 흔히 고상함, 우아함, 고혹적인 아름다움과 함께 타락, 절망, 허무, 죽음과 같은 데카당한 분위기가 공존한다.
라파엘 전파의 영향을 받은 화가 워터하우스(John William Waterhouse)는 테니슨(Alfred Tennyson)의 시에서 영감을 받아 ‘장미의 영혼(나의 달콤한 장미)’이라는 그림을 그렸다. 이 그림에서는 한 여인이 주택의 담장 앞에서 장미꽃 향기를 맡고 있다. 그녀는 장미나무에 바싹 붙어 한 손으로는 꽃송이를 잡아 코와 입에 대고 다른 손으로는 벽을 타고 올라가는 줄기를 짚고 있다. 장미 가시가 그녀의 드러난 팔과 손을 찌르기도 하련만 개의치 않고 아예 장미와 한 몸이 되려는 것 같다. 황홀한 듯 반쯤 감은 눈, 상기된 뺨, 길게 뺀 목을 보면 그녀가 얼마나 깊이 장미에 탐닉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이 모습은 테니슨의 시에 나오는 구절 ‘그리고 장미의 영혼이 내 핏속으로 들어갔다’와 연관되는데, 그 시는 장미 향기를 장미의 영혼으로 비유해 잃어버린 사랑을 읊은 것이다. 워터하우스의 그림에서도 장미는 보이지 않는 사랑이며, 여인이 향기를 열렬히 들이마시고 있는 것은 그 사랑을 단념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여인은 사랑과 성에 대한 욕망을 적극적으로 추구하지만 담장에 막혀 한계를 넘을 수가 없다.
이러한 그림은 단지 한 여자의 상황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당시 영국 사회의 여성에 대한 일반적인 가치관을 드러낸다. 즉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자의식이 강한 여성들도 여전히 도덕과 인습의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솔직하고 능동적이면서도 억압된 여성의 이미지는 당시 예술가들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그림 속의 여인은 자신에게 몰입해 있지만 매혹적인 얼굴과 자태로 남성을 유혹하며, 겉으로 절제돼 있지만 내면에는 강한 욕망의 덫을 지녔다. 마치 순수하기도 화려하기도 한 얼굴 밑에 자극적인 향기와 날카로운 가시를 감춘 장미처럼.
풍요와 퇴폐, 빅토리아 시대의 이중성
빅토리아 시대에 열렬한 사랑을 받은 장미는 본연의 이중적 특성으로 인해 미술작품에서 시대의 번영과 허영, 진보와 보수, 발전과 타락이라는 양면적 성격을 동시에 나타내는 상징이 되기도 했다. 예컨대 알마 타데마(Lawrence Alma-Tadema)는 고대 로마 황제의 전기에서 영감을 얻어 ‘헬리오가발루스의 장미’라는 그림을 그렸다. 이 그림은 고급 대리석으로 지은 호사스런 건물에서 황제와 귀족들이 연회를 벌이는 장면을 묘사했다. 그림의 전경에는 엄청난 양의 장미꽃이 침대와 쿠션 위에 나른하게 늘어진 사람들을 뒤덮고 있다. 장미꽃잎의 다양한 분홍 빛깔이 커튼의 상아색, 배경의 하늘색과 은은한 조화를 이뤄 청아하면서도 어딘가 몽환적인 기운이 느껴진다. 이 장면은 마치 관람자를 감미로운 열락의 순간으로 초대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로마 황제 엘라가발루스(헬리오가발루스)의 변태적 기행을 묘사한 것이다.
폭군 엘라가발루스는 연회가 무르익었을 때 천장에서 꽃들이 폭포처럼 쏟아지게 해 사람들을 파묻었고 미처 헤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질식해 죽었다고 한다. 알마 타데마의 그림에서 황제는 측근들과 함께 높은 곳에 앉아서 장미꽃 더미에 깔려 죽어가는 사람들을 여유롭게 구경하고 있다. 그런데 꽃잎에 파묻힌 사람들은 이미 향기에 도취해 몽롱한 욕망에 몸을 맡긴 채 곧 닥칠 위험을 감지하지 못한다. 그토록 부드러운 장미꽃이 잔혹한 살인의 무기가 되리라고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고대의 역설은 19세기 후반 알마 타데마의 그림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역사적 일화에 낭만적 상상력이 첨가되고 우아한 고전주의와 도덕적 계몽주의가 결합된 이 그림은 빅토리아 시대의 풍요와 퇴폐라는 이중성을 가리키는 비유가 됐다.
1897년 영국의 도자기 회사 로열 앨버트에서는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60주년을 기념해 ‘황실장미’라는 그릇 세트를 출시했다. 장미꽃을 테마로 한 이 디자인은 다양한 변주로 지금까지도 계속 시판되며, 단일 품목으로서 세계 최다 판매라는 기록을 자랑한다. 한 나라의 영광의 상징이던 ‘황실장미’는 오늘날 세계 시장에서 ‘고급 도자기’ 대우를 받으며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아름답게 빛나는 그 그릇들은 장미의 이름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그것은 비록 깨진다 해도, 거금을 투자하더라도 한번쯤 갖고 싶은 것이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빅토리아의 장미는 브랜드와 상품이라는 또 다른 옷을 입고 여전히 욕망의 덫이 되고 있다.
박은영 미술사가·서울하우스 편집장
역사적으로 장미와 가장 인연이 깊은 나라는 아마 영국일 것이다. 잉글랜드에서 장미는 왕실의 문장으로 사용됐고 그들의 왕권 다툼이 장미전쟁이라는 명칭을 낳기도 했다.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에는 장미의 이미지가 국가의 상징이자 계몽적·낭만적 영감의 근원으로서 예술작품과 실용적 디자인에까지 널리 확산됐다.
빅토리아 여왕이 통치하던 시기(1837~1901년)에 영국은 산업혁명과 제국주의를 주도하며 최강의 경제 대국으로 부상했다. 산업이 발달하고 번창한 도시에서는 풍요와 활기가 넘쳤다. 빅토리아 시대 중기인 1850~1870년대에는 번영의 절정을 구가하며 모든 분야에서 변화와 혁신을 이룩했다. 때마침 발표된 다윈의 진화론은 종래의 창조론적·실체론적 세계관을 뒤흔든 대변혁의 사건이었다. 이런 가운데 어느 때보다 생물의 종에 대한 관심이 증가했고 식물의 변화에 대한 연구도 활발히 진행됐다. 기존의 호사 취미에 과학적 흥미가 더해지면서 꽃의 특징을 기록한 식물 삽화도 황금기를 맞이했다. 아름다운 꽃을 묘사한 정교한 삽화들은 일반인에게도 인기가 높았다. 이에 부응해 여러 식물 잡지들이 나왔는데 그중 가장 성공을 거둔 잡지는 1860년대에 발행된 ‘플로럴 매거진’이었다. 이 잡지는 식물화가 제임스 앤드루스(James Andrews)의 화려한 꽃 그림을 수록해 영국과 미국에서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 앤드루스의 그림들은 대체로 꽃송이와 잎이 크고 튼실해서 아름다울 뿐 아니라 무척 건강해 보인다. 그가 그린 장미꽃을 보면 단단하고 탐스러운 모양이 마치 빅토리아 시대 전성기의 자부심을 노래하는 듯하다.
절제된 외면과 강한 욕망의 내면 지닌 여성의 이미지
한편 빅토리아 시대에는 진보와 개혁을 추구하면서도 여전히 계몽주의의 고전적·보수적 논리가 지배하고 있었다. 개인에게는 가정에 대한 의무와 함께 절제, 금욕, 순결과 같은 도덕적 규범이 엄격히 요구됐다. 그 표면적 고상함 이면에는 허영과 위선이 병존했으니, 도시에는 노동자, 매춘부 등 신종 빈민이 늘어났고 매독 같은 성병이 극성을 부렸다. 여성에게는 참정권, 이혼권 등의 권리가 확대됐으나 보수적 시각이 공존해 실제로는 제약이 많았다. 오히려 여성의 주체성에 대한 각성이 남성에게 위협으로 여겨지면서 ‘팜므 파탈(femme fatale)’이라는 치명적인 ‘요부’상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미술에서는 ‘라파엘 전파’라 불리는 화가들을 중심으로 기존의 틀에 박힌 아카데믹한 관습을 버리고 곡선과 장식을 부활시킨 신비롭고 상징적인 미술양식이 태동했다. 이들은 고대의 신화나 중세의 전설, 셰익스피어나 시인들의 문학 등에서 테마를 빌려와 현실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곤 했다. 그들의 그림에는 흔히 고상함, 우아함, 고혹적인 아름다움과 함께 타락, 절망, 허무, 죽음과 같은 데카당한 분위기가 공존한다.
라파엘 전파의 영향을 받은 화가 워터하우스(John William Waterhouse)는 테니슨(Alfred Tennyson)의 시에서 영감을 받아 ‘장미의 영혼(나의 달콤한 장미)’이라는 그림을 그렸다. 이 그림에서는 한 여인이 주택의 담장 앞에서 장미꽃 향기를 맡고 있다. 그녀는 장미나무에 바싹 붙어 한 손으로는 꽃송이를 잡아 코와 입에 대고 다른 손으로는 벽을 타고 올라가는 줄기를 짚고 있다. 장미 가시가 그녀의 드러난 팔과 손을 찌르기도 하련만 개의치 않고 아예 장미와 한 몸이 되려는 것 같다. 황홀한 듯 반쯤 감은 눈, 상기된 뺨, 길게 뺀 목을 보면 그녀가 얼마나 깊이 장미에 탐닉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이 모습은 테니슨의 시에 나오는 구절 ‘그리고 장미의 영혼이 내 핏속으로 들어갔다’와 연관되는데, 그 시는 장미 향기를 장미의 영혼으로 비유해 잃어버린 사랑을 읊은 것이다. 워터하우스의 그림에서도 장미는 보이지 않는 사랑이며, 여인이 향기를 열렬히 들이마시고 있는 것은 그 사랑을 단념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여인은 사랑과 성에 대한 욕망을 적극적으로 추구하지만 담장에 막혀 한계를 넘을 수가 없다.
이러한 그림은 단지 한 여자의 상황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당시 영국 사회의 여성에 대한 일반적인 가치관을 드러낸다. 즉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자의식이 강한 여성들도 여전히 도덕과 인습의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솔직하고 능동적이면서도 억압된 여성의 이미지는 당시 예술가들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그림 속의 여인은 자신에게 몰입해 있지만 매혹적인 얼굴과 자태로 남성을 유혹하며, 겉으로 절제돼 있지만 내면에는 강한 욕망의 덫을 지녔다. 마치 순수하기도 화려하기도 한 얼굴 밑에 자극적인 향기와 날카로운 가시를 감춘 장미처럼.
풍요와 퇴폐, 빅토리아 시대의 이중성
빅토리아 시대에 열렬한 사랑을 받은 장미는 본연의 이중적 특성으로 인해 미술작품에서 시대의 번영과 허영, 진보와 보수, 발전과 타락이라는 양면적 성격을 동시에 나타내는 상징이 되기도 했다. 예컨대 알마 타데마(Lawrence Alma-Tadema)는 고대 로마 황제의 전기에서 영감을 얻어 ‘헬리오가발루스의 장미’라는 그림을 그렸다. 이 그림은 고급 대리석으로 지은 호사스런 건물에서 황제와 귀족들이 연회를 벌이는 장면을 묘사했다. 그림의 전경에는 엄청난 양의 장미꽃이 침대와 쿠션 위에 나른하게 늘어진 사람들을 뒤덮고 있다. 장미꽃잎의 다양한 분홍 빛깔이 커튼의 상아색, 배경의 하늘색과 은은한 조화를 이뤄 청아하면서도 어딘가 몽환적인 기운이 느껴진다. 이 장면은 마치 관람자를 감미로운 열락의 순간으로 초대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로마 황제 엘라가발루스(헬리오가발루스)의 변태적 기행을 묘사한 것이다.
폭군 엘라가발루스는 연회가 무르익었을 때 천장에서 꽃들이 폭포처럼 쏟아지게 해 사람들을 파묻었고 미처 헤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질식해 죽었다고 한다. 알마 타데마의 그림에서 황제는 측근들과 함께 높은 곳에 앉아서 장미꽃 더미에 깔려 죽어가는 사람들을 여유롭게 구경하고 있다. 그런데 꽃잎에 파묻힌 사람들은 이미 향기에 도취해 몽롱한 욕망에 몸을 맡긴 채 곧 닥칠 위험을 감지하지 못한다. 그토록 부드러운 장미꽃이 잔혹한 살인의 무기가 되리라고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고대의 역설은 19세기 후반 알마 타데마의 그림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역사적 일화에 낭만적 상상력이 첨가되고 우아한 고전주의와 도덕적 계몽주의가 결합된 이 그림은 빅토리아 시대의 풍요와 퇴폐라는 이중성을 가리키는 비유가 됐다.
1897년 영국의 도자기 회사 로열 앨버트에서는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60주년을 기념해 ‘황실장미’라는 그릇 세트를 출시했다. 장미꽃을 테마로 한 이 디자인은 다양한 변주로 지금까지도 계속 시판되며, 단일 품목으로서 세계 최다 판매라는 기록을 자랑한다. 한 나라의 영광의 상징이던 ‘황실장미’는 오늘날 세계 시장에서 ‘고급 도자기’ 대우를 받으며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아름답게 빛나는 그 그릇들은 장미의 이름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그것은 비록 깨진다 해도, 거금을 투자하더라도 한번쯤 갖고 싶은 것이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빅토리아의 장미는 브랜드와 상품이라는 또 다른 옷을 입고 여전히 욕망의 덫이 되고 있다.
박은영 미술사가·서울하우스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