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EAT TEACHING]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수많은 장발장들’

세계 고전문학_첫 번째 빅토르 위고 ‘레미제라블’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9년을 복역한 뒤 결국 세상의 ‘빛’이 되는 한 남자의 이야기인 ‘레미제라블’은 ‘자유, 평등, 박애’로 요약되는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다양한 각도에서 구현한 작품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명작인 진짜 이유는 말하지 않은 현실이지만 이미 다가올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 섬뜩한 시선이 강한 리얼리티를 선사하기 때문이다. 양심을 걸고 “내가 장발장이다”를 외치는 수많은 장발장들의 이야기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1914년 ‘청춘’이라는 잡지에 ‘세계명작개관’이라는 이름으로 한 편의 소설이 소개된다. 세계문학을 알아야 문명대국이 될 수 있다고 믿었던 시대였기에 사회정치란만큼이나 발 빠르게 번역됐다. 지금이야 시간차 없이 전 세계 읽을거리가 접속, 공유, 확산되지만, 100년 전만 하더라도 ‘세계문학’을 손안에 쥔다는 것은 유학생 정도나 돼야 가능한 일이었다. 아마도 짐작컨대 최남선이 ‘청춘’에 ‘세계문학개관’을 싣게 된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말 그대로 ‘개관’ 정도로 거칠게 요약하는 글이지만, 세계문학을 공유한다는 데 더 큰 의의를 두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레미제라블’은 어떻게 번역했을까. 프랑스 원어를 그대로 실지는 않았을 것이고, 번역을 한다고 하더라도 일본을 거친 중역이었을 텐데 ‘레미제라블’은 어떻게 번역됐을까. 흥미롭게도 ‘레미제라블’의 번역본 제목은 ‘너 참 불쌍타’였다. 이 제목은 일본의 ‘噫, 無情’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일본판 ‘아, 무정하도다’가 우리나라에 와서 ‘너 참 불쌍타’로 번역된 것이다. 그런데 ‘레미제라블’을 ‘너 참 불쌍타’로 번역해도 괜찮을까. 일단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레미제라블’이 ‘너 참 불쌍타’로 번역됐다고 알리면 대부분 낡은 앨범 속에서 재미있는 포즈의 예전 사진을 본 것처럼 깔깔대며 웃는 게 보통이다. 무엇인가 100년 전 사람들의 감성이 그대로 묻어나는 제목처럼 느끼기 때문이다.


사랑·혁명 혹은 돈이나 법…그 속에서 보이는 장발장의 양심
그런데 ‘너 참 불쌍타’보다 더 흥미로운 건 1978년 영화로 만들어진 ‘레미제라블’이다. 이때 만들어진 영화 ‘레미제라블’은 1960~1970년대 당시 풍미했던 영화 ‘007’ 시리즈 때문인지 장발장과 경찰 자베르의 추격 장면이 진지하고 스릴 있게 그려졌다. 장발장이 어린 코제트를 데리고 자베르의 시선을 피해 각일각으로 다가오는 경찰의 수사망을 물리치며 탈출하는 장면, 막다른 골목길에서도 긴 밧줄을 이용해 코제트까지 안전하게 구출하는 장면만 본다면 ‘007’ 시리즈의 번외 편으로 보아도 무방할 정도다. 더욱이 장발장과 자베르를 번갈아 보여주며 긴장감을 높이는 것은 지금 봐도 인상적이다. 이처럼 ‘레미제라블’은 시대와 장르를 넘나들며 그 상황에 맞춰 다양한 형태로 각색됐다. ‘레미제라블’은 한 지역, 한 국가의 작품이 아니라 이미 전 세계인들이 공감하는 이야기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레미제라블’이 왜 명작인지, 다시 말해 왜 많은 이들이 이 작품을 보며 울고 웃는지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너 참 불쌍타’가 말해주는 것처럼 맘껏 동정하는 이야기로 기억할 수도 있고, 또 빵 한 조각이 없어 도둑질을 했던 자가 결국에는 성공하는 이야기로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개 한 작품이 시대를 풍미하며 명작이라고 손꼽히는 것은 대개 말하지 않은 현실이지만 이미 다가올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 섬뜩한 시선이 강한 리얼리티를 선사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보지 못한 현실이고, 말하지 않은 현실이지만 소설에서 잘 그려내는 순간 바로 현실로 실감되는 그런 리얼리티 때문이다. ‘레미제라블’이 그러한지 묻는다면 대개의 독자들이 어느 지점에서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적어도 이 작품이 쏟아내는 프랑스의 이야기는 ‘프랑스 역사’로 요약되는 사실보다 더 묵직하기도 하며 생생하기도 하다. 빵 한 조각이 없어 결국 빵을 훔치는 장발장, 공장에서 하루 종일 일하지만 제 아이 보육비조차 벌지 못하는 팡틴, 이런 세계를 변혁하고자 나서는 젊은이들, 또 이런 세상의 한복판에서 악덕 상인으로 돈에 목숨 건 테나르디에, 또 이 세상을 지켜낼 한 줄기 빛을 ‘법’에서 찾는 자베르. 이들은 저마다 ‘내일이면’을 외치며 서로 다른 상상으로 이 세계의 빛이 어디에서 오는지 말한다. 인간을 위한 사랑인지, 또는 혁명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돈이나 법인지. 이들은 모두 ‘내일이면’을 노래한다. 이 속에서 장발장의 양심이 보인다.


“내가 장발장이다”…‘장발장’들이 만들어내는 사회이자 국가
장발장은 19년 동안 복역하며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하지만 누군가 자신을 대신해서 처벌받는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주저 없이 법정으로 달려간다. 그의 마음을 추동하는 것은 남들의 고통을 자신의 행복으로 맞바꾸지 않으려는 마음이다. “내가 장발장이다”라고 말하는 법정에서 ‘정의’는 ‘법’이 아니라 장발장의 양심이다. 이 고백은 바로 이후의 세계가 바로 ‘장발장들’이 만들어내는 사회이자 국가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가능케 한다. 또 이 속에서 삶의 조건으로서의 비참함이 극복될 수 있다고 말하는 듯도 싶다. 그러므로 비참한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분투했던 모든 이들이 실은 장발장일 수 있다. 서로 다른 처지였고 다른 이름이었지만 ‘자유’롭고자 노력했으며 다른 이들을 노예로 만들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던 것, 다시 말해 ‘레미제라블’은 ‘자유, 평등, 박애’로 요약되는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다양한 각도에서 구현한 작품이다.

영국에서 공연된 25주년 ‘레미제라블’ 뮤지컬은 여기에서 더 나아간다. 수백 명의 시민합창단이 자유, 평등, 박애를 상징하는 붉고, 푸르고 하얀 옷을 입은 채 ‘레미제라블’ 공연에 참여하는데, 무대가 이미 그 자체로 충만한 의미요, 볼거리다. 또 이야기가 다 끝나고 커튼콜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지난 25년 동안 ‘레미제라블’로 이야기의 중심에 섰던 이들이 무대에 다 같이 오른다. 할아버지가 된 장발장, 중년의 장발장, 그에 비해 좀 젊어 보이는 장발장까지 무대에 올라 지난 시간들을 기억한다. 그간 무수하게 ‘레미제라블’을 지켜봐 온 관객들에게 이 장면은 또 하나의 이야기다. 또 이들은 ‘레미제라블’의 메인 테마곡 ‘두 유 히어 더 피플 싱(Do you hear the people sing)’을 합창하는데 저마다 내남없이 ‘레미제라블’이라는 사실을 저어하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이렇게 모든 일정이 다 끝나는 지점에서 저 멀리 관객석 입구에서 청소년들이 ‘두 유 히어 더 피플 싱’ 노래를 부르며 들어온다. 끝이 어딘지 보이지 않을 만큼 많은 청소년들이 나란히 무대를 향해 걸어오는데, 관객석에 서 있던 사람들은 박수치고 노래 부르며 이들을 응원한다.

이들은 다름 아닌 전국에서 ‘레미제라블’을 공연하는 학생들이다. 영국에서 ‘레미제라블’은 25년째 세대를 이어주고 있다. 그리고 이 속에서 이렇게 아이들을 키워 내고 있다. 프랑스의 ‘레미제라블’이지만 영국에 와서 그 본연의 빛깔을 찾아간다고 볼 정도다. 그곳에 같이 있었던 사람들은 짐작할 것이다. 극은 끝났지만 ‘레미제라블’은 다시 시작될 것이라는 것을, 지금도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박숙자 경기대 교양학부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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