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숲 그 침묵의 언어, 이광호 작가
영하의 날씨가 서울 도심을 꽁꽁 얼린 날 이광호 작가의 개인전을 찾았다. 갤러리 문을 열자 그곳에는 다른 겨울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 덩굴과 수풀이 어지러이 얽혀 있는 제주의 겨울 숲이 펼쳐진다. 그림 앞에 선 이들이 어느덧 캔버스 안에 담긴 눈 덮인 제주 숲을 여여히 산책하고 있다.작가이자 평론가인 알베르토 망구엘은 “그림도 이야기처럼 우리에게 정보와 지식을 제공하고 그림으로 구성된 언어가 말로 표현되고 말이 다시 그림으로 모습을 드러낸다”고 했다. 그래서 그림 속 이미지는 이야기를 만들어 무한한 생명력을 불어넣기도 하고 때론 관객이 과거와 미래를 오가며 시간여행을 하게 하기도 한다. 작가가 상상해 이미지를 그림으로 옮겨 놓은 뒤 수많은 관객은 그 이미지로 저마다의 각기 다른 상상을 하고 미술관을 떠난다. 20세기 프랑스 정치와 문화계 인사로 유명한 앙드레 말로가 눈앞에 다양한 이미지가 한꺼번에 전개되는 현상을 ‘상상 속 박물관’이라 부른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이광호 작가의 ‘제주 숲 그림’을 마주하니 그 공간으로 순간 이동을 한 기분이 들었다. 눈 덮인 숲길을 자박자박 걷는 소리만이 배경음악처럼 고요히 들릴 것만 같은 전시실이었다. “마치 숲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는 기자의 짧은 감상평에 이 작가는 “내 작품에 대한 최고의 찬사”라고 사뭇 진지하게 답했다. 그에게 관객의 ‘오감’으로 느껴지는 그림 감상은 화가 개인으로서 감격적일 만큼 의미 있어 보였다. 그것은 작가 자신의 작품 세계가 그간 거쳐온 연대기를 지금 이 시점에서 한 번쯤 갈무리함에 다름없고 지극히 한 예술가로 성장하기까지의 과정을 오롯이 담은 작품들을 내놓았기 때문이리라.
제주 숲의 초대, 그리고 ‘터닝 포인트’
이 작가의 전시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제주 숲의 풍경’이 얼마나 ‘예술적 공명’을 울릴까 싶었던 게 사실이다. 그가 2년여 시간 동안 그려온 작품은 모두 제주도의 인적이 드문 숲, 곶자왈의 모습이 담겨 있다. 작품은 모두 엇비슷해 보이는 깊은 숲의 낮과 밤의 풍경을 묘사했고 캔버스 가득 어지럽게 얽혀 있는 나무의 넝쿨과 풀숲의 덤불은 ‘보는’ 관객 입장에서 결코 쉽게 다가오는 그림이라 하기 힘들었다. 실제 눈으로 직접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래서 일까. 이 작가도 관객의 의중을 읽었을 것이다. 그는 전시실 관객의 동선과 발걸음으로 작품에 대한 관심도를 주의 깊게 살피는 것이 오래된 습관이라 했다.
“작품을 보러 온 관객의 발걸음, 이동하는 모습을 보면 그림에 대한 관심이 보입니다. 보통 가벼운 마음으로 보러 들어왔다가 작품 안에 한참을 서 있다가 캔버스 가까이 다가서서 보다 이내 몇 발자국 뒤로 떨어져 보는 분들이 많아요. 미술관을 나가는 발걸음이 들어올 때보다 더 느려지고요. 뭔가 생각에 잠기는 거죠. 제 그림을 통해 무언가를 느끼는 것 자체가 그림을 그린 저와의 커뮤니케이션이라고 생각하면 감사한 일이죠. 저마다의 해석과 감상이 제 작품과 만나는 시간인 거죠.”
이 작가의 화폭에 담긴 대상은 평범해서 더 빛이 나고 가치 있다는 역설을 강변한다. 자연 그대로의 숲은 오히려 ‘날것’이 가진 생명력을 되찾아 보게 하고 그것이 빚어낸 상상력의 너른 들판을 허용한 셈이다. 평범함에서 찾은 ‘특별함’에 의미를 부여했으니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화가의 흉중이 얼마만큼 깊어야 하는지 또 한 번 절감하게 된다. 이 작가의 덧붙인 설명에 쉽지 않은 그림에 대한 편견이 사라졌다. 그는 “버려지고 방치된 숲의 구석구석에서 생명의 본질을 가슴에 담게 됐고 이때의 우연한 여행을 계기로 자신의 작품 세계의 새로운 문을 열게 됐다”고 입을 뗐다.
“가족 여행으로 찾은 제주 여행에서 곶자왈을 갔어요. 이전에도 풍경 그림은 계속 그려 왔지만 저한테 맞는 풍경을 그곳에서 발견한 거죠. 인위적인 흔적이 닿지 않은 가장 자연스러운 풍경이라 마음에 들었어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숲의 여러 변화도 보이고 조형적으로 그릴 만한 요소가 충분하다고 느꼈지요. 여름보다는 겨울 숲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사소한 풀 한 포기, 덤불 한 줄기가 직선이 아니라 구불구불 거리며 자라나는 것을 자세히 보게 됐어요.”
그가 곶자왈의 풍경을 캔버스에 담기 위해 붓을 들게 한 결정적인 배경에는 겨울 숲이 가진 아이러니한 생명력이었다. 햇빛을 조금이라도 더 받기 위한 저마다의 생존의 몸부림을 보며 그는 곶자왈이라는 숲에 매료됐고 그 뒤로 지칠 줄 모르고 화폭에 그 이미지를 옮겼다.
“덤불과 수풀들을 그리는 순간에는 내가 무엇을 그리고 있나 싶을 때도 많았어요. 워낙 엉켜 있으니 붓으로 그 형태를 표현하기조차 힘들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 지난한 과정을 거쳐 완성한 뒤 멀리 떨어져서 보면 전체 숲의 모습이 눈에 담기게 됩니다. 그 어지러운 작은 실선들이 내면의 날카로움처럼 느껴진다고 말하는 분들도 많아요. 일종의 욕망, 불안 같은 걸로 해석하는 거죠. 누구나 그림에 자신을 투영하게 되니까요.”
이 작가가 무심코 한 말처럼 들리는 “내가 무엇을 그리는지조차 모르겠더라”라는 고백은 한편 그가 작품에 얼마만큼 몰입해 그 시절을 지냈는지를 여실히 표현해주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 작가의 나지막한 성찰과도 같은 이 말은 실제로 그가 화가의 길을 걸어온 여정에 방점을 찍은 계기가 됐다.
“그림을 그린 이후 처음으로 내가 내 그림 안에 들어가 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화폭에 담길 대상을 그릴 때는 어느 정도 물리적인 거리감이 생기기 마련이죠. 하지만 숲의 풍경을 그리는 동안 저는 그림 속 안에 들어가 있었어요. 진짜 그림을 그린다는 것, 혼연일체라는 말을 실감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실제로 이 작가의 그간 행보를 보자면 작품 안 대상과의 ‘거리감’이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
언어가 떠난 자리, 충만해져 돌아온 작품 세계
시간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죽 그어 놓고 그 선 위에 순서대로 올려놓고 보는 것은 대상에 대한 이해를 한층 쉽게 해준다. 이 작가의 그림 풍경 이전의 대표작들을 떠올려보자. 그가 한국 화단에서 ‘극사실주의를 대표하는 젊은 작가’라는 자리매김을 다지게 했던 ‘인터-뷰(Inter-View)’는 120명의 인물을 담은 초상화 프로젝트였다. 이때부터 그는 ‘거리’와 그림 사이를 오가기 시작했다.
“모델과의 거리를 180cm로 정해 놓고 그렸어요. 이 거리가 인물을 가장 객관적으로 그릴 수 있는 거리입니다. 너무 가까우면 화가가 인물에 빠지고 거리가 이보다 멀어지면 대상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죠.”
모델을 관찰하는 거리는 무엇보다 떨어져 있는 대상을 가장 객관적으로 살필 수 있어야 하고 그 객관성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모델의 영원성을 가져다준 것이다. 이 작가에겐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시선의 거리’는 최근 제주 숲 풍경을 그린 작품에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그가 앞서 말한 것처럼 물리적인 거리감이 완전히 사라지고 그가 그림 속으로 완전히 들어가 작품과 혼연일체가 된 것.
“세월이 흐르면서 대상과 나 사이의 거리감이 줄어들면서 내 그림의 깊이도 그만큼 농익게 됐습니다. 대상과의 거리가 줄면서 다른 것들이 그 안을 채우게 되더군요.”
대상과의 거리에 대한 변화만큼이나 최근 중요하게 꼽는 작품의 변화는 바로 그림에 담긴 ‘이야기’다. 다양한 연작을 시도해온 이전의 작품들, ‘인터-뷰’ 시리즈나 ‘선인장’ 그림들은 작가 스스로 말하고자 하는 욕망과 욕구의 분출이었다면 최근 작업해온 제주 숲의 풍경을 담은 그림들은 ‘밖으로 끊임없이 말하고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가 거의 사라졌다고 설명한다.
“그림을 처음 시작했을 때 제 작품들은 오롯이 제가 표현하고 싶은 내면의 이야기, 욕망을 분출하는 통로였어요. 짝사랑을 했던 여인에 대해 느껴지는 복잡다단한 심리를 담은 그림들로 첫 개인전을 열었어요. 그 뒤로 아내를 만나고 가정을 이룬 뒤 아이를 갖는 등 경이로운 일들을 모두 제 그림 안에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담아왔었지요. 지금은 이 모든 것들을 다 겪고 난 뒤의 자족이랄까요. 나이 듦이 저를 철들게 하고 제 작품도 함께 성장하게 한 것 같아요. 더 이상 굳이 이야기가 담긴 그림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된 거죠. 젊었을 때 끊임없이 마음속에 담은 것들을 표현하고 싶었는데 지금은 이 모든 것을 비워내는 법을 배우게 됐어요. 굳이 표현할 필요가 없게 된 거죠. 이제는 그림에서 이야기가 사라지고 언어가 떠난 것이죠.”
대상과의 ‘거리감’이 줄어들고 작품을 통해 세상 밖으로 분출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은 시간의 풍화작용을 거쳐 고요하지만 심지는 더욱 굳어진 작품 세계로 성장한 것 아닐까. 이 작가에게 그림이란 그려야 할 ‘대상’이 아니라 중년의 나이를 거치며 이제나 저제나 함께 가야 할 동반자의 의미가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한 몸 같음을 느끼기까지 무던히 시도하고 붓질해온 그림 세계는 그렇게 그와 함께 충만해져가고 있다. 이 작가는 불쑥 사실주의 대가인 루시안 프로이트 작가의 회고전 이야기를 들려줬다.
“영국 테이트 갤러리에서 루시안 프로이트 작가의 마지막 전시회가 성대하게 열렸을 때였어요. 정작 주인공인 작가는 오프닝 행사에 참석하지도 않았대요. 사람들도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지요. 저도 언젠가 그렇게 되고 싶어요. 초대받은 사람들이 응당 ‘이광호 작가, 작업실에서 그림 그리고 있겠지, 뭐’ 하는 반응을 보이는 거요. 첫 개인전을 할 때만 해도 내 작품을 좋아하는 팬이 1000명 정도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지금은 그런 마음이 전혀 없어요.”
관객을 비롯한 이러쿵저러쿵 하는 평가나 관심에서 이제 자유로워졌다는 이 작가는 사실은 외부의 판단 기준보다 더 날 서고 고독한 자신만의 예술 세계와 사투를 벌이고 있을 터다. 따지고 보면 예술가가 예술가일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은 하나로 족하지 않을까. 작품과 아티스트가 혼연일체가 될 수 있는 것. 그렇다면 이 작가는 이미 그 출발선에 들어섰다. 제주 풍경을 담은 작품들에서 언어의 부재를 역설했지만 그 텅 빈 공간이 도리어 그의 출발선이 된 셈이다. 일찍이 칸딘스키는 말했다. “나는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회화 속으로 걸어가고 싶다”고. 이 작가는 지금 그 길의 어디쯤을 걷고 있을까.
기획 박진영 기자│글 이지혜 객원기자│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