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WE ATTEND] 소진의 시대, 잊히지 않을 생각을 위하여

철학자 김용규 ‘생각의 시대’

프랑스 현대 철학의 거장 미셸 세르가 두 엄지손가락으로 생활하고 사유하는 젊은이들을 ‘엄지세대’라고 이름 지었다.

하지만 이 엄지세대는 검색 엔진으로 지식과 정보를 축적할 수는 있어도 진실과 지혜는 전송받을 수 없다. 진실을 파악할 수 있는 지혜는 검색이 아닌 ‘생각’으로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즈음 대중을 위한 철학서를 꾸준히 내놓은 철학자 김용규가 ‘생각’에 관한 책을 냈다.

지식의 축적보다 생각하는 방법이 미래를 재편할 것이라는 게 그의 요지다.



‘사람이 머리를 써서 사물을 헤아리고 판단하는 작용.’ 사전에서 말하는 ‘생각’의 첫 번째 정의다. 종이 위에 새겨진 활자는 두뇌를 거쳐야만 산지식이 된다. 책의 종이에 갇힌 글자들도 생각과 만나야 우리 삶의 지평을 넓혀주는 지혜가 된다. 생각을 하는 행위가 단순히 지식을 곱씹는 것이 아니라 머리 안의 지식과 생각의 연결고리를 이어주고 분해하고 때로는 재구성하는 것임을 다시금 끄덕이게 한다. 지금 우리는 궁금한 것이 생기면 스마트폰부터 찾는다. 휴대전화가 전화번호를 외우던 기억력을 앗아간 것처럼 스마트폰을 비롯한 디지털 기기 안에 담긴 지식과 정보가 인간의 생각 능력을 꿰차고 급기야 뇌의 주인 행세를 하게 됐다. ‘생각의 힘’이 다시 주목받고 있는 이유는 그리하여 꽤나 역설적이다. 철학자 김용규가 발간한 ‘생각의 시대’는 생각에 대한 생각을 엮은 책이다. 정보화 혁명 이후 지식이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지식이 불어나는 속도도 점점 빨라지고 있다. 그에 따라 ‘백과사전적인 지식을 머릿속에 보유하고 있는 것’의 주가는 자연히 폭락했다. 어쩌면 과학기술 발전에 따른 자연스러운 귀결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공부하고 생각해야 할까’라는 질문이 우리에게 남는다.


생각을 공부해야 하는 시대
김용규는 이에 대해 단순한 해법을 제시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보편적이고 거시적이며 합리적인 전망과 판단을 제공해주었던 생각의 도구들을 익히고 활용하자는 것이다. 이 ‘생각의 도구’들을 알면 엄청난 속도로 불어나는 지식을 패턴화해서 파악하고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그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우선 철학자 김용규를 ‘위키피디아식’으로 설명해보자. 30여 년 전 과학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독일 프라이부르크대와 튀빙겐대에서 철학과 신학을 만났다. 서양 문명을 이루는 두 기둥을 부여잡고 인류의 지혜를 탐구하다 보니 10년의 유학생활이 삽시에 지나갔고 학위를 마치고 귀국한 그는 대학교수의 길을 가지 않았다. 그 대신 서울 청파동 자택의 서재에 칩거하며 공부와 저술에 매진했다. 곧 유려한 문체와 깊이 있는 내용의 지식 소설 ‘알도와 떠도는 사원’, ‘다니’를 선보였다. 이후 ‘영화관 옆 철학 카페’, ‘데칼로그’, ‘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등이 차례로 출간됐다. 독자들의 입소문을 타고 조금씩 그의 이름이 책깨나 읽는다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의 책에서는 현실과 동떨어지고 사변적인 강단 철학의 현학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골방이 아닌 시장으로 나온 철학과 인문학이었다. 뒤로 펴낸 ‘철학 카페에서 문학 읽기’, ‘철학 통조림’ 시리즈, ‘설득의 논리학’ 등의 책들은 조용히 10만 부 이상씩 팔려나갔다.

고대 그리스 문명부터 중세의 신학, 근현대의 철학, 최신의 과학 이론에 이르기까지 그가 섭렵하는 지식과 학문의 세계는 경계가 없었다. 요즘 너나없이 부르짖는 ‘통섭’과 ‘융합’을 의도치 않게 선도했다. 이후 서양의 기독교 전통을 이루는 ‘신학’을 정리해 893쪽짜리의 방대한 책 ‘서양 문명을 읽는 코드 신’을 펴내고 지난해에는 고(故) 이병철 삼성 회장이 남긴 질문에 대한 인문학적 대답을 담은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을 출간했다. 출판계 편집자들이 “그만큼 철학에 대해 쉽게 쓰는 저자는 없다”고 입을 모을 정도로 내용은 정교하면서도 문체는 따뜻하다.

실제로 ‘생각의 시대’는 철학과 고전학, 문학은 물론이거니와 뇌신경과학, 인지과학, 심리학, 언어학, 교육학 등 방대한 분야를 넘나들지만 결코 딱딱한 이론서가 아닌 ‘실용’을 목표로 썼다고 그는 강조한다. 20여 년간 독자들과 함께 철학의 숲을 거닐고 있는 그에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생각’에 대해 물었다. 가을의 시작을 여는 비가 오던 아침, 조용한 카페에서 만난 철학자는 달콤한 신화 이야기를 들려주다가 호메로스와 소크라테스로 변해 이론에 대해 강론하고, 우윳빛처럼 빛나던 대리석을 조각했던 미켈란젤로를 비유해 철학을 설명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한 대목을 읊어주며 방향을 잃은 삶을 위로해주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한국의 움베르트 에코(이탈리아의 기호학자이자 철학자)’라 불릴 정도로 출간하신 책 모두 경계 없는 백과사전식 지식을 담아냈어요. 요즘의 컨버전, 융합이라는 화두와도 맞물리는 것 같습니다.
“첫 책이 ‘알도와 떠도는 사원’이라는 지식소설이었어요. 이후 ‘영화관 옆 철학카페’,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와 같은 철학 책도 쓰고 하니까 출판사에서 홍보용으로 ‘한국의 움베르트 에코’라는 이름을 붙인 겁니다. 그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쑥스럽습니다. 내가 그런 책들을 쓰기 시작한 때가 10년도 훨씬 더 됐으니까 철학을 설명할 때 문학이나 영화를 매개로 한다는 점에서는 다른 사람들보다 앞섰다고 할 수 있어요. 추상적인 철학 개념들을 설명하기 위해 소설, 영화 등에 나오는 구체적인 인물이나 사건들을 사례로 사용하면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에서였어요.”



책 전반에 걸쳐 생각이 부가가치가 되는 시대,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힘이라고 하셨어요.
“이제 거의 모든 지식이 네트워크 안으로 들어가 인터넷에 접속하기만 하면 누구나, 언제, 어디서든 손쉽게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줄곧 다른 뛰어난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지식을 배워서, 그것에 의존해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네트워크에서 얻어낸 지식들을 가공해 새로운 지식들을 창출해내는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 격변하는 환경에 재빠르게 적응하는 사람, 한 마디로 스스로 ‘생각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 경쟁력을 갖게 됐지요.”


그중에서 서양 문명의 뿌리인 호메로스와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에 주목하셨습니다. 시원(始原)적인 생각도구라 하셨는데 왜 여기서 출발하셨는지요.
“‘뒤처졌다’는 의미를 함축하는 ‘원시적’과는 달리 시원적이라는 말에는 ‘근원적’이고 ‘본질적’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어요. 이 용어를 이런 뜻으로 처음 사용한 사람이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인데요. 제가 호메로스와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이 개발한 은유, 원리, 문장, 수, 수사, 이 다섯 가지 생각의 방법들을 ‘시원적’이라고 규정한 데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신화에서 수학까지, 잡담에서 이데올로기까지, 수에서 수사학까지, 언어에서 과학까지, 한마디로 서양의 모든 문명이 이 도구들에 의해 점차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철학, 고전학, 문학 등을 통해 역사적으로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아이들의 인지 발달이 역시 이 도구들에 의해 단계적으로 이뤄진다는 것이 뇌신경과학, 인지과학, 그리고 교육심리학 등을 통해 과학적으로 확인되기 때문입니다.”


은유·원리·문장·수·수사 등 생각의 도구들
‘인문학의 연금술사’라고 김용규를 소개한 출판사의 표현은 과대포장이 아니었다. 인터뷰가 무르익어 갈수록 인문학과 철학이라는 재료를 버무려 맛깔나게 풀어내는 이야기를 듣다 보니 ‘생각의 시대’란 책이 눈앞에 이미지로 그려지는 듯했다. 책의 열쇳말은 ‘새롭게 생각하는 법’이다. 생각을 익히고 훈련해야 하기 때문에 자녀를 둔 부모를 독자층 안에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그가 꼽은 생각의 도구는 은유, 원리, 문장, 수, 수사 다섯 가지다. 은유는 사고와 언어를 구성하는 근본적 도구이고, 둘째인 원리는 그것을 통해 세계를 이해, 구성할 수 있다고 한다. 셋째로 지난 2만5000년 동안 서양 문명을 다듬어와 서구인의 정신세계를 만든 문장을 꼽으며 문장의 구조가 정신 구조를 형성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넷째, 수는 자연을 합리적인 패턴으로 이해하고 피타고라스로 인해 혼돈 속의 우주가 코스모스로 변한 과정을 실었다. 마지막 수사는 연설, 강연 같은 말하기와 에세이, 논설, 광고문에 자주 쓰이는 기법으로 설득을 위한 생각의 도구로 소개했다.

이렇게 책에 소개된 다섯 가지 생각도구들을 능수능란하게 활용한 이들이 스티브 잡스였고 워런 버핏이었으며 아인슈타인이었다. 이들은 지식을 쌓으려 애쓰는 대신 새로운 생각을 하고 미래를 예측하고, 사람을 설득할 수 있었고 자신이 얻어낸 결과를 수로 표현할 줄 알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진정한 발견이란 새로운 땅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다”라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말이 함께 떠오른다.


새로운 생각을 창조해주는 데 다섯 가지 생각도구를 꼽으셨고 첫째가 메타포, 은유입니다.
“우리는 보통 은유를 문학에서나 사용하는 수사법 정도로 알고 있는데요, 사실은 그게 아닙니다. 은유가 하는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하나는 대상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새로운 생각을 창조하는 역할입니다. 예를 들어 플라톤의 ‘동굴’,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의 사다리’,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하이데거의 ‘숲길’ 같은 헤아릴 수 없는 학문적 은유가 있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뛰어난 학자와 발명가들은 모두 은유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데에 탁월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지요.”


이 같은 은유를 익히면 천재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요.
“문제는 그 방법입니다. 제가 권하고 싶은 가장 쉽고 효과적인 방법이 바로 ‘시 읽기’입니다. 시는 표현하고 싶은 내용을 가장 짧은 언어로 이미지화한 ‘은유의 보물창고’이기 때문이에요. 누구든 우리 시 100편쯤을 외우고 나면, 그의 머리 안에 은유적 사고를 할 수 있는 새로운 뇌가 생기게 됩니다. 새로운 것을 배울 때마다 새로운 뇌신경망이 생성되는 ‘뇌의 가소성’ 때문이에요.”


시 읽기와 함께 추리소설 읽기를 강조하셨어요.
“생각도구의 둘째로 꼽은 아르케, 원리와 관련이 있죠. 원리란 밖으로 드러나는 자연과 사회현상들 뒤에 숨어 있는 어떤 법칙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숨은 법칙을 찾아내는 추론법이 바로 가추법인데요, 셜록 홈즈, 듀팡, 루팡과 같은 탐정들, 갈릴레이, 케플러, 뉴턴과 같은 과학자들이 비밀스럽게 활용해온 추론법이죠. 홈즈 시리즈 안에는 200여 개의 가추법 추론이 들어 있습니다. 가추법을 익히고 싶다면 추리소설을 꾸준히 읽어보세요.”


연설, 토론, 광고문 등에 자주 쓰이는 레토리케, 수사를 현대인에게 가장 필요한 생각도구로 꼽았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사람을 설득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TV 토론 프로그램에서 유권자를 설득하지 못한 후보는 낙선하고, 상담에서 고객을 설득하지 못한 상인은 물건을 팔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정작 학교에서는 수사학을 가르치지 않아요. 제 책에는 프로타고라스를 비롯한 고대 그리스인들이 완성해 놓은 예증법, 생략삼단논법, 대증법, 연쇄삼단논법과 같은 다양한 수사법들이 소개돼 있는데요, 이것들을 익히는 순간 가장 강력한 설득의 수단을 손에 넣는 것입니다.”


‘생각의 시대’ 뒤를 잇는 작품을 구상 중이시라고 들었습니다.
“가능하다면, 생각에 관한 책을 모두 네 권 쓰려고 해요. 2권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이 세 사람의 사유 방법에 관한 겁니다. 3권은 2세기에서 4세기 사이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한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그리스 철학과 기독교, 즉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라는 전혀 이질적인 두 문명을 융합한 사람들(주로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이 개발한 생각의 도구들에 대해 쓰려고 하지요. 요즈음 다시 학문 간의 융합이 화두인 만큼 흥미로울 거예요. 4권은 근대 계몽주의와 과학혁명을 이끈 사람들이 개발했던 생각의 도구(우리가 이성이라고 하는)들을 조명하려고 합니다.”


외동딸이 있으신데, 어떤 ‘철학가 아빠’이신지도 궁금합니다.
“피아니스트인 아내는 직장에 나가고 제가 집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젖먹이 때부터 딸을 제 손으로 키웠어요. 중학교 때는 우리 시 모음집을 사다가 외우게끔 유도했고, 고등학교 때는 역사에 남는 유명한 연설문들, 주로 워싱턴, 링컨, 케네디, 오바마 등 미국 대통령들의 연설문이나 마틴 루터 킹 목사를 비롯한 흑인인권 운동가들의 연설문, 스티브 잡스, 소설가 조앤 롤링 등 유명인들의 졸업식 축사 등을 외우게끔 했죠. 모두 최고의 문장들이지죠. 큰 도움이 됐으리라 믿는데, 제가 훌륭한 아빠인지 아닌지는 제가 아니라 딸이 평가해야겠지요.(웃음)”


이지혜 프리랜서│사진 이승재 기자│장소 협조 코코브루니(02-512-6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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