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EAT TEACHING] 삶을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숭고함

대한민국을 만든 고전들_열한 번째 박경리 ‘토지’①

1969년 월간 문예지 ‘현대문학’에 연재하기 시작해서 1994년 8월 15일 마침표를 찍은 박경리의 ‘토지’.

이 소설은 구한말부터 해방 이후까지 한민족의 생활을 그대로 기록한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거대한 역사 보고서다.

양적, 가치적 면에서 방대하기 이를 데 없는 ‘토지’를 2회로 나눠 다룬다.



그간 박경리의 소설 ‘토지’에 대해 수많은 찬사가 이어졌지만 이는 단지 4만여 장의 원고지 양에 비례해서 주어진 양적 가치의 문제도 아니고 그렇다고 평사리에서 용정, 상해에 이어지는 거대한 역사지리지의 광활함에 대한 상찬만도 아니다. 실제로 책을 붙잡고 읽어 내려가는 순간 느끼게 되는 것은 예상과는 달리 ‘민족’, ‘식민’, ‘역사’보다 삶을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 그 자체가 더 숭고하게 느껴진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욕망과 운명의 대립이 야기하는 비극성, 그리고 그 속에서 만들어지는 삶의 지도가 ‘토지’다.


‘계급장 뗀’ 모든 인간들의 욕망
‘토지’의 이야기에 흠뻑 빠지는 이유는 수십 명의 인물들이 모두 그러할 만한 이유로 ‘존재’하고 있다는 당연한 삶의 이치다. 대개 이야기의 주인공을 최 참판댁 ‘서희’라고 요약하기도 하지만 누구든지 이 책을 읽어본 독자들이라면 이 요약이 21권의 서사를 제대로 말해주는 내용이 아니라는 사실을 짐작하게 될 것이다. 누가 주인공인지 과연 주인공이 있기나 한 건지 의심이 갈 정도다. 최 참판댁 하인으로 있는 ‘수동이’, ‘귀녀’ 등의 묘사가 서희에 비해 덜하지 않다. 이를테면 최치수가 구천을 죽이기 위해 총을 가지고 산을 뒤지다가 드디어 구천을 발견한다. 시종으로 따라간 수동은 당연히 최치수의 명령에 구천의 뒤를 힘껏 따라야 하는데, 바로 그 지점에서 수동이의 내면을 장황하게 보여준다. 하인으로서의 몸에 배어 있는 복종심으로 최치수의 명을 마땅히 따라야 하지만 그럼에도 수동이는 같은 처지에 있는 구천을 제 손으로 죽일 수 없다는 죄책감에 결국 구천을 죽이지 못한다. 수동은 어마어마한 처벌을 예상하며 괴로워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한다. 그뿐인가. 이름부터가 심상치 않은 몸종 ‘귀녀’가 상전 최치수를 홀리기 위해 술책을 써보지만 최치수가 모른 척하자 급기야 복수하기로 맘먹는다. 귀녀의 이러한 사악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서술자는 귀녀를 악인으로만 치부하며 이야기를 빠르게 전개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귀녀를 이야기 밖으로 몰아가기 직전에 ‘천한 종이라고 무시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으며’ 여종으로 ‘인간쓰레기 같은 칠성이를 거치면서 최치수에게만은 여자 대접을 받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다는 것, 그렇게 ‘인간으로서’, 그리고 ‘여자로서’, ‘대접받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는 사실을 슬쩍 끼워 넣는다. 물론 그렇다고 귀녀의 행동이 그러할 만했다고 옹호하거나 수동의 행위에 긍정성을 부여하지는 않는다. 하찮은 인물이거나 미약한 존재들일지라도 ‘인간으로서’ 느끼는 자존감과 책임감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들려주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토지’를 언급하며 ‘대단하다’고 해석하는 것보다 ‘재미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어울리는 감상일 듯하다. 악인이든 선인이든, 주인공이든 그렇지 않든 모든 인물은 ‘계급장 뗀’ 인간의 욕망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사리분별이 분명한 최 참판댁의 안주인인 윤씨 부인만 하더라도 그러하다.

젊은 시절 요절한 남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절에 기도드리러 갔다가 김개주에게 겁탈당해서 임신까지 하게 돼 아들 구천을 낳고 생이별을 하게 되는데, 어느 날 구천이 어미 윤씨 부인에게 복수하러 집으로 찾아온다. 최 참판댁 하인들이 어디에서 굴러온지도 모를 ‘타관 사람’이라고 구천을 내쫓으려 하자 윤씨 부인은 구천을 거둔다. 윤씨 부인답지 않은 이런 처사에 하인들은 의아해하고 아들 최치수까지 의심하지만 윤씨 부인은 자신의 선택이 얼마나 위험한지 계산하지 않는다. 평사리 최고의 어른 윤씨 부인에게 기대하는 여러 사회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그는 구천을 외면하지 않는 방식으로 제 운명과 마주한다.

그래서일까. 부정한 과거를 부정하지 않은 방식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그런데 급기야 아들 최치수가 어머니 윤씨 부인을 의심하며 구천을 죽이려고 한다. 그렇다고 최치수를 악인으로 내몰지 않는다. 최치수 또한 버거운 삶의 이력이 있는 인물이다. 윤씨 부인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가 나타났는데(이는 사실 윤씨 부인이 몰래 해산하기 위해 절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이지만), 어머니의 사랑을 애타게 그리던 아들 최치수의 애타는 심정과는 별개로 윤씨 부인이 어린 최치수를 모른 척한 것. 윤씨 부인이 아들을 외면한 것은 아들에게 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지만 어린 최치수가 그런 사정을 알 리 없으니 최치수는 그때부터 버림받았다는 사실에 괴로워한다. 최치수가 왜 그렇게 여성의 사랑을 거부하며 차갑고 금욕적인 몸으로 자학하는지 대번에 이해되기도 한다. 따라서 구천이 나타났을 때 최치수가 분노하는 것 또한 그의 입장에서라면 또 그러할 만하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운명과 운명의 대립을 조마조마하게 읽어가는 독자들의 마음 같아서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윤씨 부인과 최치수의 관계, 최치수와 구천의 관계를 회복시켜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모든 인물들은 모두 그러할 만한 삶의 대의와 욕망을 가지고 있으며, 각각의 처지에서 이 삶을 충직하게 살아갈 뿐이다. 그것이 비록 다른 사람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부족하거나 나쁘거나 혹은 더럽거나 호사스러운 것으로 보일지라도 온전히 제 삶을 무겁게 견뎌내는 이들을 함부로 지적하거나 비판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어쩌면 이것이 운명일지도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이 ‘토지’다.


또 다른 운명의 갈림길, 용이와 월선의 사랑
‘토지’에서 운명이 무엇인지 묻게 하는 가슴 아픈 사랑의 주인공이 바로 용이와 월선이다. 용이와 월선은 서로 깊이 사랑하지만 결국 신분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각각 다른 이와 결혼한다. 월선이 무당의 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월선은 남편 봇짐장수의 폭력을 견뎌내지 못하고 다시 마을에 들어와서 용이가 사는 울타리만이라도 바라보려고 한다. 드디어 둘은 다시 만나는데 용이가 월선에게 “니가 기다리는 걸 알면서도 내 니한테 미안해서 나타나지 못했다”고 말한다. 서로가 서로에 대한 생각을 매순간 끔찍하게 하고 있으면서도 쉽게 이를 부여잡지 못한다. ‘자식의 도리로 이 땅을 저버릴 수 없어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 그에게 월선에 대한 사랑도 운명이지만 이를 거역하라고 명령하는 부모와 그 제도 또한 운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그날 밤 “여자를 사랑하는 짓이 아니었다. 여자를 짓밟고 자기 자신을 짓밟고”라는 말로써 두 개의 운명을 버리지 못하고 제 안에서 싸우는 짐승의 울부짖음으로 이들의 사랑을 그려낸다. 이들은 운명 속에 놓인 ‘가냘픈 짐승’이다.

그렇다면 이 질긴 운명의 갈림길 속에서 용이와 월선은 어떻게 살아갈까. 쫓겨나다시피 간도로 이주해 간 용이네 가족은 또다시 월선을 만나 월선의 주막집에 얹혀살게 되는데, 용이는 이런 현실에 괴로워하며 아들만을 맡겨둔 채 집을 나온다. 그런데 집을 나온 후 월선이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전갈을 전해 듣는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서 드디어 용이가 월선이 앞에 나타난다. 용이가 누워 있는 월선을 ‘임자’ 하고 부르며 무릎 위에 올리는데 이때 월선의 은비녀가 방바닥에 툭 떨어진다. 이 둘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리는 소리. 이 사실을 지각하며 용이가 “내 몸이 찹제(차갑지)” 하고 물으니 월선이 겨우 ‘눈’만 살아 용이를 지그시 바라본다. 용이가 이내, “니 여한이 없제” 하고 물으며 대답을 들은 후 “그라믄 됐다. 나도 여한이 없다”라고 말한다. 이생에 대한 ‘여한’이 실은 둘에게 하나였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물음이다. ‘그라믄 됐다. 나도 없다’는 형식 속에서 둘이 같이 이생에 대한 여한을 정리한다. 두 사람은 한 번도 같이 살아보지 못했지만 또 완전히 이별한 적도 없는 채로 신산한 인생에서 사랑이 이 삶을 얼마나 아름답게 하는지 보여준다.


박숙자 서강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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