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REPORT] ‘용호상박’옛말…삼성 ‘날고’ LG ‘기다’

주가로 본 LG전자 히스토리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인 1994년 6월. LG전자와 삼성전자, 현대자동차의 주가는 각각 2만6000원, 4만4000원, 2만5000원 안팎이었다. 그러나 2014년 1월 6일 현재 세 기업의 주가는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다. 삼성전자가 130만7000원, 현대차가 22만8500원, 그리고 LG전자는 6만5400원이다. 삼성전자와 현대차의 주가가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리는 동안 LG전자의 위상이 얼마나 추락했는지를 보여준다.



LG전자 주가는 2002년 4월 이후부터 확인할 수 있다. 2002년 지주회사 체제 전환과 함께 전자 및 정보통신 사업을 떼어내어 (주)LG전자로 재상장했기 때문이다. 2002년부터 현재까지 LG전자의 주가 추이를 살펴보면 2008년 그래프 곡선이 잠깐 치솟는가 싶더니 2010년 이후에는 완만한 하향세로 굳어지는 형국이다. 실제로 2002년 4월 22일 재상장 당시 LG전자의 주가는 6만2936원. 2014년 1월 6일 LG전자의 주가가 6만5400원임을 감안하면 12년 동안 주가는 결국 제자리걸음을 한 셈이다.


2008년 프라다폰 히트로 최전성기 누려
재상장 이후 LG전자의 주가는 2003년 무렵까지 낮게는 3만 원대에서 높게는 5만 원대까지 오르내림을 반복한다. 당시 증권사 리포트를 살펴보면 “원화 강세와 IT(디스플레이와 미디어) 수요 부진 등으로 LG전자의 영업환경이 어려워졌다(2003년 2월 삼성증권)”는 등의 분석이 적지 않다. 마찬가지로 같은 기간 삼성전자와 현대차 역시 그래프가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세계 경제의 침체에도 LG전자의 주가가 다시 6만 원을 넘어선 것은 2003년 8월 28일(6만786원)이다. 당시 세계 최초로 동기·비동기 겸용 IMT-2000 휴대전화와 193cm(76인치) 플라스마디스플레이패널(PDP) TV 개발 성공에 힘입은 결과로 풀이된다. 같은 해 미국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휴대전화 시장 점유율 1위에 올랐다.



그러던 LG전자의 주가가 처음으로 8만 원을 돌파한 것은 2005년 12월 2일(8만2482원)로 기록돼 있다. 같은 해 11월 출시된 ‘초콜릿폰’의 영향이었다. 당시 세계 휴대전화 시장 점유율을 살펴보면 노키아가 부동의 선두를 지키고 있는 가운데 모토로라와 삼성전자가 각축전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LG전자는 초콜릿폰으로 화려하게 부활하며, 분기 최고 6300억 원의 영업이익을 달성했다. 2년 뒤인 2007년 5월에는 명품 브랜드 프라다와 손을 잡고 디자인에서 차별화를 준 ‘프라다폰’이 연이어 성공하며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이에 힘입어 2009년 세계 시장점유율 10%로 글로벌 3위 휴대전화업체에 오르기도 했다. 가전에서도 승승장구 했다. 미국 내 드럼세탁기 판매 부문에서 2003년부터 2008년까지 5년 연속 1위에 올랐으며, 2008년 세계 최초로 휴대전화용 블루투스 헤드셋을 출시했다. 같은 해 에어컨 누적판매량은 1억 대를 넘어섰다. 주가의 흐름 역시 이와 맥을 같이 한다. 2007년 12월 이후 10만 원대를 넘어선 LG전자는 2008년 5월 15일 최고가인 16만273원을 기록한다.

LG전자의 주가가 뚜렷한 하향세로 돌아선 것은 2009년 말에서 2010년으로 넘어갈 무렵이다. 2009년은 애플의 스마트폰인 아이폰이 국내에 처음 출시된 해다. 그해 10월 아이폰 출시 시점에 LG전자 주가는 여전히 11만 원 정도를 유지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하지만 이후 스마트폰에 대한 대응이 늦어지면서 2011년 5월 이후 지금까지 한번도 10만 원대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스마트폰 등장 이후 날개 없는 추락
LG전자는 2010년 첫 스마트폰인 안드로원을 시작으로 옵티머스 시리즈의 시작인 옵티머스Q, 옵티머스Z, 옵티머스원을 잇달아 내놓았지만 시장의 반응은 냉담했다. 당시 증권사 리포트에 따르면 “3분기 영업적자는 2106억 원으로 기대 이하의 심한 부진을 보일 전망이다. 휴대전화가 두 자릿수 영업손실률을 기록하면서 전체적인 실적 악화의 주요인이 됐다(2010년 10월 14일 동부증권)”고 분석했다.

혹독한 2010~2011년을 보낸 LG전자는 2012년 9월 ‘옵티머스G’를 선보인다. 최고의 하드웨어 사양을 강조한 옵티머스G로 회심의 일격을 노린 것이다. 당시 증권사 리포트들 역시 ‘G폰, 변화의 시작(2012년 9월 19일 한화투자증권)’, ‘와신상담(2012년 9월 20일 신한금융투자)’ 등의 제목을 앞세우며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예상 밖 부진한 실적으로 주가 흐름 역시 6만 원에서 7만 원대에 멈춰 있는 모습을 보였다. LG전자는 2013년 2월 옵티머스G 프로와 8월 G2를 잇따라 선보였지만, 그때마다 시장의 반응은 비슷했다. 출시에 즈음해서는 기대감을 보이며 목표 주가를 상향 조정했지만, 이미 애플과 삼성이 주도권을 틀어쥔 스마트폰 시장에서 옛 영광을 되찾기는 역부족이었다.

반면 같은 기간 삼성전자는 스마트폰 시장에 발 빠른 대응으로 대조적인 흐름을 보이고 있다. 2010년 갤럭시S를 처음 선보인 삼성전자는 2013년 11월 세계 전 지역에서 애플을 제치고 휴대전화 판매량 1위를 석권했다. 이 같은 성과에 힘입어 2011년 11월 29일 주가 100만5000원으로 처음 100만 원 선을 돌파한 이후 2012년 12월 150만 원대를 돌파하는 등 가파른 성장곡선을 그리고 있다. 2010년까지 LG전자와 비슷한 흐름을 보이던 현대차 또한 2010년 이후 반등에 성공했다. 해외 생산 비중을 높여가며 글로벌 완성차업체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이다. 2011년 3월 29일(20만7000원) 처음으로 20만 원대를 돌파한 이후 꾸준히 흐름을 유지 중이다.


LG의 과거는 화려했다
LG전자(당시 금성사)는 1958년 10월 창업 이후 ‘국내 최초’라는 수식어를 놓치지 않았던 ‘혁신기업’의 대표 주자였다. 실제로 LG전자는 1959년 진공관식 라디오, 1966년 흑백 TV, 그리고 1977년 컬러 TV 생산까지 ‘국내 최초’로 개발과 생산에 성공해냈다. 그뿐만 아니다. 1962년 국산 라디오로 미국 시장을 뚫는 데 성공하며 전자산업 수출의 포문을 열었다. 15년 만인 1978년 국내 업계 최초로 수출 1억 달러를 넘기는 성공신화를 쓰기도 했다. ‘국내 최초’로 글로벌 기업다운 면모를 갖춘 것 역시 LG전자였다. 1981년 5월 미국 앨러배마 주 헌츠빌에 현지법인 GSAI(GoldStarAmerica Inc.)를 설립, 다음 해인 1982년 10월 본격 생산에 돌입했다. 100% 한국 민간 기업의 자본이 투입된 해외 투자였던 셈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삼성전자(당시 삼성전자공업)는 LG전자를 뒤쫓기에 바빴다. 삼성전자의 설립 시기는 1969년 1월로 LG전자에 비해 10년이나 뒤늦은 후발 주자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가전, 에어컨, 선풍기 등 가전제품 전 분야에서 LG의 기술경쟁력이 그만큼 압도적이었다. 그 무렵 삼성전자 임직원들 사이에서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가전업체로 ‘금성, 삼성’이 아니라 ‘삼성, 금성’으로 불리는 게 목표였다는 얘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증권거래소 상장 시기 역시 LG전자가 삼성전자를 앞섰다. LG전자는 1970년 4월, 삼성전자는 5년 뒤인 1975년 6월 국내 증권 시장에 첫 이름을 올렸다.

만년 2등 삼성전자가 LG전자를 따라잡기 시작한 건 1989년. 당시 LG전자는 36일간의 장기 파업을 겪으며 삼성에 1위를 내줘야 했다. 삼성전자는 1988년 삼성반도체를 흡수, 합병하며 가전과 정보통신에 반도체까지 아우르며 외형적인 규모를 키운 후였다. 1990년대 무섭게 치고 들어오는 삼성에 LG전자는 끊임없는 혁신으로 맞섰다. 1993년 중국 후이저우(惠州)에 LG EHZ를 설립하고 중국에 진출했으며, 1995년 금성통신을 흡수, 합병해 LG전자로 변경했다. 1997년 102cm(40인치) 플라스마디스플레이패널(PDP) TV를 독자 개발하고, 1998년에는 세계 최초로 152cm(60인치) PDP TV를 개발했다.

치열한 1위 싸움을 벌이던 LG전자와 삼성전자의 운명을 가른 변곡점은 1999년이었다. LG전자가 정부 주도의 빅딜로 LG반도체를 현대전자에 넘겨준 것이다. 삼성전자의 경우 반도체사업에서 비약적인 성장이 밑바탕이 돼 가전이나 휴대전화 등의 사업부문에서도 빠르게 기술력을 높여가며 ‘1등 타이틀’을 거머쥘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 LG전자는 2000년 LG정보통신을 합병한 뒤 2002년 4월 지주회사인 LGEI와 전자사업을 담당하는 LG전자로 분할했다.


이정흔 기자 verdad@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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