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BLESSE OBLIGE] “장애와 가난은 극복했지만 나눔과 기부는 내 운명”

류시문 한맥도시개발 회장

인터뷰 내내 류시문 한맥도시개발 회장(65)은 여러 차례 눈시울을 붉혔다. 이미 사회적으로 유명한 ‘기부천사’이고 그에 관한 기사며 이야기들이 수없이 재생산됐으니 얼마나 많이 반복한 인생사일까만, 더구나 이젠 시간도 많이 흘러 제법 덤덤해질 때도 됐을 텐데 여전히 눈물을 비치는 류 회장을 보며 생각했다. 도대체 어떤 삶이었기에 그러할까. 나눔의 현장에서 순직하고 싶다고 말하는 그의 인생 행간이 궁금했다.



류시문 한맥도시개발 회장은 이미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표적인 인물로 알려진 지 오래다. 간략히 말하자면 이렇다. 어릴 적 사고로 다리를 다쳐 장애인이 된 류 회장은 이후 청력까지 잃으면서 청각장애라는 불운까지 겹쳤고 ‘가난’이라는 절망적 상황까지 더해졌지만 이 모든 운명을 극복하고 사업가로 성공, 가진 것 모두를 사회와 약자들을 위해 쓰는 ‘날개 없는 천사’가 됐다. 이 몇 줄의 짧은 인생사에는 그러나 이보다 기막힌 드라마가 없을 정도로 아픈 사연과 고통스런 눈물,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향한 누구보다 따뜻한 시선과 마음이 깊이 새겨져 있다.

류 회장을 찾은 건 노블레스 오블리주 운동연합을 설립했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그간 엄청난 금액을 꾸준히 기부하며 나눔에 앞장서 온 류 회장이 본격적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확산을 위해 나섰으니 그 긍정적 파장은 벌써부터 예감되고 있었다.


나눔의 경험 살려 기부 문화 확장에 앞장
서울 마포에 위치한 사무실. 문에 붙은 ‘한국 노블레스 오블리주 본부’라고 쓰인 종이 한 장이 그곳의 성격을 말해주고 있었다. 임시로 붙여놓은 ‘간판 아닌 간판’이 따끈따끈했다. 명칭이 주는 따뜻한 기운 때문이리라. 공식 명칭은 운동연합도 본부도 아닌 ‘노블레스 오블리주 시민실천’. 유명한 시민운동가인 강지원 변호사와 제30대 공군참모총장을 지낸 김은기 대장이 공동 대표로 참여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시민실천은 강연, 상담, 기관지 발행 등을 통해 기부 문화 확산과 저변 확대를 이루겠다는 ‘결의’에서 시작됐다.

“전 세계 역사를 통해 보면 첫 번째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은 사회지도층이 솔선수범해서 국토방위에 앞장선 것이고, 두 번째는 성실한 납세를 통해 국가 재정을 튼튼하게 한 것이었어요. 그리고 요즘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핵심으로 부각되는 게 바로 기부죠. 가진 자들이 덜 가진 자들을 배려하고 나누는 데 앞장서야 하는 겁니다. 더구나 지금 한국 사회는 양극화가 심화돼 있어 부유한 사람은 갈수록 더 잘 살고 못 가진 사람은 경쟁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는 형국이에요. 이 양극화를 완화시키기 위해선 반드시 사회지도층, 가진 자들이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기업인’보다 ‘시민운동가’ 타이틀이 먼저 소개돼 있을 정도로 나눔을 통한 세상 순화에 앞장서 온 류 회장은 한국적 기부 문화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은 듯했다.

“기부에 있어서도 개척과 확산이 필요한데 우리는 기부하는 사람에게만 몰려가서 달라고 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다 보니 모금단체도 부익부 빈익빈이 되고 있고 시민사회단체도 양극화가 심해요. 제가 이 분야에선 발로 뛰면서 체험한 산증인이기 때문에 기부 문화가 지향해야 할 가치에 대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오랫동안 기부를 실천하며 참으로 별별 사람, 별별 일들을 다 겪은 그였다. 기부 사실이 알려지면서 “나도 도와 달라”며 그를 찾아온 수많은 사람들 때문에 오히려 괴로움을 느낀 적도 있고, 자신을 도와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적대감을 갖거나 사람들을 시켜 모함과 비난을 일삼는 경우도 있었다. 매월 엄청난 금액을 기부하다 보니 정작 자신은 재정 상태가 마이너스가 돼 애를 먹은 적이 숱하게 많았고, 누군가를 도우면서 오히려 심한 마음고생으로 눈물을 흘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쯤 되니 궁금했다. 선의로 시작한 일이 그렇듯 자신을 괴롭히는 부메랑으로 돌아왔을 때 회의가 들지는 않았을지.

“그럴 때면 참 많이 울었습니다. 당시의 괴로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사람은 결국 기본적으로 본질적으로 이기심을 갖고 있을 수밖에 없어요. 그 이기심이 적정 수준이라면 오히려 나눔을 통해 그 사람의 삶을 풍성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고난과 시련이 있더라도 기꺼이 타인을 위해 나눌 때 긍지가 되고 자부심이 되고 감동이 되는 것 아니겠어요. 우리 회사 직원들도 그렇게 말하더군요. 회장님은 기부하고 나면 기분이 좋아서 늘 웃는다고 말입니다.”


장애와 가난 딛고 날개 없는 천사 되다
한편으론 기부의 경험을 살려 나눔을 확산하겠다는 ‘재능기부’의 차원이기도 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시민실천은 역시 류 회장의 기부가 바탕에 깔려 있다. 국민의 세금 한 푼 쓰지 않고 타인의 부와 자선에 의지하지도 않는, 스스로 노력하고 일해서 운영하는 사회단체를 지향하다 보니,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 등을 운영하기 위한 출자금이 필요한데 바로 여기에 류 회장의 개인 재산이 활용될 예정인 것. 오랜 기부 경험에서 비롯된 ‘물질 나눔보다 자립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 더 좋은 기부 방법이라는 가치관의 확장 실천인 셈이다.

“제가 처음 기부를 시작했을 때는 ‘기부’라는 단어도 생소했어요. 그저 어려운 사람 있으면 나눠주는 게 다였죠. 기부 영수증이란 것도 아예 없었고 또 달란 말도 못했지요. 그러다 보니 월급을 타도 가족들보다 다른 사람들, 어려운 이웃들에게 쓰는 돈이 더 많았어요. 또 돈이 모이면 그걸로 사회단체 등에 기부했는데, 하면 할수록 재물을 나누는 건 끝도 없고 밑 빠진 독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자립의 길을 열어주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사회적 기업이나 일자리 복지 등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죠.”

실제로 지난 2010년부터 2년간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의 초대 원장을 역임하는 동안 류 회장은 현장에서 발로 뛰며 사회적 기업의 확산과 그로 인한 일자리 문제 해결에 앞장섰다. 그에게 사회적 기업 문제는 서민의 삶, 취약 계층의 삶과 직결되는 것이었다. 취임 후 사원연수 자리에서 눈물을 보였던 것도 막중한 사명감 때문이었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절대적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다면 사회적 기업은 상대적 빈곤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니 중요하지 않을 수 없었죠. 당시 사람들은 저에게 그냥 사무실에 앉아 결재 사인이나 하라고 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사회적 기업은 철저히 현장 중심으로 해야 하는 민간 경제이니 원장의 역할 또한 사무실이 아닌 현장으로 나가는 게 맞다고 생각했죠. 현장 중심 경영과 함께 중점에 둔 건 보다 많은 국민에게 사회적 기업을 알리고 확산시키는 일이었어요. 그래서 10개월 동안 전국을 돌며 130회 강연을 했지요. 지방 강연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코피를 쏟고 기절한 적이 서너 번 있을 정도였어요. 그대로 일어나지 못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무렵엔 늘 어머니 생각이 나더군요. 다리를 절고 귀까지 먹은 저를 뒷바라지한 어머니에게 그렇게 하직인사를 하곤 했어요. 아마 공직자 중에 사무실에서 라면 끓여 먹어가면서 일한 사람은 저밖에 없을 거예요. 허허.”

그토록 힘들었음에도 류 회장은 물질로든 재능으로든 사회를 위해 헌신하는 일이 곧 자신의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였다. 장애인의 운명,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이라는 운명을 극복하면서 살아온 그이지만 사실 나눔이 그의 운명이자 숙명이 된 데는 장애라는 절망적 상황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사연인즉 이렇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갈 무렵 부친은 “장애인은 아무리 공부해봤자 취직이 되지 않는데 뭣 하러 하느냐”며 학교에 보내지 않겠다고 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결국은 가난이 문제였다. 절망스런 마음으로 뒷산에 오른 그는 눈 덮인 계곡에 얼굴을 묻고 저주받은 운명을 탓하며 눈물을 쏟아냈다. 서러운 마음에 얼마를 울었을까. 주변에 쌓여 있던 눈이 녹아 물로 변했을 무렵, 그는 집으로 돌아가 다시 아버지 무릎에 울음을 토하며 학교만 보내 달라고 애원했다. 자식의 모습에 승낙을 한 아버지의 눈은 아들 못지않게 붉게 충혈 돼 있었다. 그 모습을 두고두고 잊지 못한다는 류 회장은 “나는 한평생 불효자”라며 “가난한 살림에 나를 공부시키기 위해 얼마나 고생하셨겠나”라고 또 눈물을 비쳤다.

“그다음 날 뒷산 계곡에 오르니 저 멀리 소백산맥에 무지개가 걸려 있더군요. 그걸 보니 다시금 절뚝발이에 가난한 자의 설움이 뼈에 사무치는 겁니다. 그때 생각했지요. 비록 나는 장애인이지만 이다음에 성공해서 남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겠다고 말입니다. 그 꿈을 무지개에 새긴 지 45년 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고액 기부자 모임인 아너소사이어티에 서울시 1호, 전국 2호로 가입하면서 그 꿈을 실현했습니다.”


아들에게까지 대물림된 나눔 유전자
불운했던 삶, 그러나 그에게도 햇살은 비쳤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20대 초반 서울로 상경한 그는 온갖 허드렛일을 하다 신학대에 진학했고, 거기서 지금의 류 회장을 있게 한 은사를 만났다. 들리지 않는 귀로 친구들의 노트를 빌려가며 공부에 열심인 그를 보고 안타까움 반, 기특함 반이었던 이여진·신연식 교수 부부가 학비 지원은 물론 거액의 창업 자금 5000만 원을 선뜻 빌려주었던 것. 류 회장이 나눔에 앞장서게 된 또 하나의 결정적 동기가 바로 정기예금까지 깨가며 제자를 믿어준 은사에게 보답하는 마음이었다.

여기서 끝났더라면 운명을 극복하고 반전의 삶을 살고 있는 스토리쯤으로 인식될 터. 그러나 류 회장에게는 지금도 건드리면 툭 터질 것처럼 가슴 가득 안고 있는 깊은 슬픔과 상처가 있다.


류시문 회장은… 1948년생. 연세대 행정대학원 사회복지학 석사. 1996~2010년 한맥도시개발 회장. 2009~2010년 한맥네트워크 회장. 2010~2012년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장. 현 한맥도시개발 회장.

“제가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있을 때, 중학교에 입학 예정인 동생이 있었어요. 집안 형편상 누군가는 양보해야 했는데, 제가 동생에게 ‘넌 건강하고 나는 장애인이니 내가 먼저 가겠다’고 했죠. 그날 반항하는 마음으로 집을 뛰쳐나간 동생은 새벽녘 집에 들어와 양보를 해주더군요. 그런데 ‘형이 먼저 가’라는 그 한마디가 저와 동생의 운명을 갈라놓았습니다. 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동생이 농사를 짓다가 지쳐 서울로 도망을 쳤고, 안국동에서 남의 집 점원으로 일하다 교통사고로 반신불수가 돼 지금까지 46년을 침대에 누워 있습니다. 제 운명은 극복했을지 몰라도 동생의 인생은 대신 극복해줄 수 없으니 동생을 볼 때마다 그 아픔을 어찌 할 수가 없어요. 그저 동생을 붙잡고 ‘내가 잘못했다’라며 우는 것 밖에는….”

어쩌면 류 회장이 나눔과 봉사에 더 큰 애착을 보이는 데는 갚고 싶어도 갚을 수 없는 동생에 대한 마음의 빚과 짐이 작용하는지도 모른다. 옆에서 보기엔 그렇게 할 것까지 있나 싶을 정도로 불편한 생활을 하며 아끼고 또 아끼는 것도 자식에게조차 엄격하게 자립을 요구하는 것도, 같은 맥락 아닐지. 다행히 류 회장의 외아들 류원정 씨도 아버지의 뜻을 이해하고 벌써부터 나눔 대열에 동참해 사회적으로 귀감이 되고 있다. 2011년 9월,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공개한 50번째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이 바로 아들 원정 씨였던 것. 원정 씨가 기부한 1억 원은 할머니가 증여한 돈에서 세금을 뗀 금액으로, 할머니가 20년간 폐품과 폐지를 주워서 모은 돈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며 또 한 번 감동의 물결이 일었다.

“정말 어렵고 가난한 사람들을 보면 ‘나는 그래도 행복하게 사는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가난한 이들을 보며 도리어 저의 부를 깨닫는 것이지요. 기부 활동을 통해 결과적으로 자녀 교육에도 도움이 됐으니 얼마나 행복한가요. 사실 저는 아들이 고등학생 때까지 하루에 용돈을 300원씩 줬어요. 당연히 아들의 반감이 컸지요. 그런 아버지가 사회공헌으로 신문에 나고 방송에 나오는 걸 보고, 비 오는 날 불편한 다리로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다 미끄러진 저를 보면서 이해하게 됐던 모양입니다. 가장 좋은 가정교육은 영어, 수학 과외를 하는 것보다 부모가 말없이 앞장서는 것입니다. 제가 아들에게 재산을 한 푼도 안 주겠다고 하니 제 모친이 손자가 불쌍했던지 증여를 한 것이었는데 기꺼이 기부를 하는 것을 보고 잘 키웠다 싶었지요. 아들은 자수성가하겠다고 하더군요.”

류 회장은 아픔도 많고 여전히 눈물 흘리는 날이 많지만 분명 성공한 삶이다. 사업이 성공해서가 아니라 기부할 돈이 있어서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해 더 따뜻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저를 보고 성공했다 하는데 제가 생각하는 성공의 기준은 좀 달라요. 열심히 공부하고 돈 벌어 나와 내 가족만 잘사는 게 아니라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면서 헌신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성공한 사람 아닐까요.”

눈물을 흘려본 사람이 남의 아픔도 이해하는 법. 류 회장의 기준으로 보더라도 이만한 성공이 없지 않을까.


박진영 기자 bluepjy@hankyung.com│사진 김기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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