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데뷔 15년, 세계 데뷔 10년] 팝페라 테너 임형주와 제대로 힐링 캠프
입력 2013-10-01 17:56:58
수정 2013-10-01 17:5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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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소’ 타이틀이 일상이 된 세계적인 음악가. 팝페라 테너 임형주 얘기다. 20대 후반에 이미 많은 것을 가졌고 얻었고 성취한 그와 나눈 대화는 그러나 예상 밖이었다. 열세 살에 데뷔해 남들보다 10년을 먼저 살았다는 그는 어린 시절의 임형주를 불러냈고, 10대의 임형주를 추억했으며, 20대의 임형주를 애틋해했다.그의 표현처럼 ‘제대로 힐링 캠프’였다.
고단해보였다. 무대에서 늘 그랬던 것처럼 에너지 넘치는 모습을 기대했으나 그는 지쳐 있었다. 왜 아닐까. 전 세계를 무대로 누비며 하루를 이틀처럼 쓰고 있으니 그럴 밖에. ‘온 가족이 그것도 일등석을 타고 멀리 여행을 갈 수 있을 정도’로 항공 마일리지가 쌓여 있다는 지극히 단적인 사실만으로도 고단함이 느껴졌다. 그러나 힘든 기색도 잠시, 이내 본연의 열정적인 모습으로 돌아와 마주앉은 그는 진솔한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우리에겐 너무나 익숙한 세계적인 팝페라 테너 임형주로서가 아니라 남들과는 조금 다른 삶의 여정을 지나온 20대 후반의 한 사람의 이야기가 때론 기특했고 때론 애잔했다. 더불어 한 가지 간과하고 있었던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의 그 자리에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것을 감내하고 치열하게 노력하며 살아야 했을지.
‘역대 최연소’·‘최초’ 타이틀 넘어 진기록이 일상
1998년 1집 앨범을 내고 데뷔했을 당시 임형주의 나이가 열셋. 여전히 부모 품에서 응석을 부리거나 아니면 조금 이른 사춘기를 맞아 소년에서 청소년으로 가는 초입에 있었을 무렵에 그는 이미 거칠고 험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남들이 성공으로 가기 위해 흔히 거치는 무명 시기도 그에겐 없었다. 물론 나이 탓도 있었다.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읊는 어린 소년의 모습은 그 자체로 신기하고 기특했다.
그로부터 5년 뒤 2003년엔 미국 뉴욕 카네기홀에서 세계무대 데뷔 단독 독창회를 열었다. 세계 남성 성악가 중 최연소였다. 이후에도 그는 새로운 역사를 썼고 기록을 세워나갔다. 어느새 국내 데뷔 15주년, 세계 데뷔 10주년이라는 기념비적인 시기를 맞았으니 그게 바로 지금이다. 그 사이 임형주란 이름은 하나의 브랜드가 돼 안으로는 국가 행사 때마다 애국가를 독창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됐고, 밖으로는 한국을 대표하는 인물로 또 세계 최연소이자 한국인 최초의 유엔평화메달 수상자로 이름을 떨쳤다.
올해가 참으로 특별한 해죠.
“국내 무대에 데뷔한 지는 15년이 됐고 세계무대에 데뷔한 지도 딱 10년이 되는 해예요. 특별하죠. 어릴 때는 제가 잘나서 그런 줄 알았는데, 시간이 가면서 깨달았어요. 행운이 많이 따라줬다는 걸. 보통 세계적인 음악가가 나오려면 삼박자가 맞아야 한다고 하거든요. 첫째가 재능, 둘째가 경제적인 지원, 셋째가 운인데 저는 이 세 가지가 다 따라줬으니 매사에 감사하면서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이죠.”
기념 공연도 준비 중이라고 들었어요.
“10월 6일에 국립극장에서 공연을 할 예정이에요. 이번 공연을 마치면 우리나라 3대 극장인 예술의 전당, 세종문화회관, 국립극장을 독창회로 정복한다는 의미도 있어요. 그것도 서른 이전에 말이에요. 예술의 전당에서는 2003년에, 세종문화회관에서는 2005년에 독창회를 했어요. 또 하나의 기록은 지난해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독창회를 가졌는데 오페라극장 개관 이후 역대 최연소였다고 하더라고요. 오페라극장은 카네기보다 대관이 어렵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상징적인 곳이거든요.”
벌써 15년이 됐다는 게 실감이 나나요.
“데뷔 때부터 함께 해온 팬들을 보면 느끼죠. 20대였던 분들이 30대가 돼 있고, 당시 미혼이었던 팬들이 결혼해 초등학생 자녀를 둔 현실 등이 세월을 실감케 해요. 오래된 팬들과 워낙 가족같이 지내서 그분들의 변화가 더 체감되는 것 같아요. 이런 경험이 있어요. 언젠가 비행기를 탔는데 한 승무원이 남자친구랑 예술의 전당에 제 공연을 보러 왔었대요. 그분이 저를 너무 좋아하니까 남자친구가 제 샐리 가든 CD를 선물해주며 그걸 들을 때마다 자기 생각을 해달라고 했다고. 그 남자친구가 지금은 남편이 돼 있고 아이까지 있다고 하더라고요. 누군가의 기억 속에 제가 있고 각인돼 있다는 게 참으로 감사하고 신기해요.”
그다지 힘들어 보이지 않았어요. 늘 최고의 위치에 있었으니까. 그런데 물을게요. 힘들지 않았나요.
“물론 분명 희생도 있었죠. 행운이 따라줬고 그 자체로 큰 축복이라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론 행운이란 게 준비한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거잖아요. 지난 세월 동안 치열하게 해오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의 저는 없었겠죠.”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하잖아요. ‘10년 뒤 나는 이런 모습일 거야’ 하는. 10년 전 혹은 15년 전에 생각했던 그 모습과 지금을 비교해보면 어떤가요.
“그때 생각했던 것보다 모든 게 너무 빨랐죠. 카네기홀 무대에 선 게 열여덟 살이었으니까요. 2010년에 수상한 유엔평화메달도 상상치 못했던 거고요. 사실 후보만으로도 가문의 영광이었는데 말이죠. 일본 NHK 홍백가합전도 얼마나 대단한 건지 몰랐는데, 갓 스물 됐을 때 한국 클래식 뮤지션으로선 최초로 출연했고요.”
국가 공식 행사에서 애국가 독창도 도맡았잖아요. 이젠 ‘애국가=임형주’처럼 돼버렸어요.
“2003년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취임식에서 역대 최연소로 애국가를 부른 후부터 애국가와 인연이 많았어요. 이명박 정부에서도 꾸준히 청와대 행사 등에 참여했고, 최근 정전 60주년 기념식에서도 애국가를 불렀어요. 현 정부가 상생을 내세우기 때문에 독창을 한 게 이번이 처음이라고 하더라고요. 의미가 있는 게 국가 행사 등에 참석했던 김대중·김영삼·노태우·전두환·최규하 대통령 등 여덟 명의 전·현직 대통령 앞에서 노래한 가수가 됐다는 거예요. 어떤 분들은 그래요. 마치 애국가 전문 가수처럼 돼 버린 게 안 좋을 수도 있지 않느냐고. 그런데 전 그것도 제 운명 같아요. 국가를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며 살라는 징조 같은 거 말이에요. 애국가라는 게 나라를 대표하는 노래잖아요.”
초등학교 때 이미 지금의 모습에 대해 예견한 일기를 썼다면서요.
“참 소름끼치는 대목이에요. 초등학교 1학년인가 2학년 때 일기에 그렇게 썼더라고요. 나중에 꼭 대통령 앞에서 우리나라를 위해 노래 부를 수 있게 해달라고. 꿈이라는 게 다 이뤄지지 않는데 참 감사한 일이죠.”
애국가도 그랬고 ‘최연소’ 타이틀이 참 많아요. 달리 생각하면 새로운 길을 가는 데 별로 두려움이 없다는 뜻 같기도 하고요.
“도전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아요. 안전한 길만 가지도 않고요. 제가 부드럽게 생기긴 했지만 사실 남성적인 면도 많고 남들이 생각 못하는 의외의 면들이 많답니다. 정말 꼼꼼하고요. 경제, 재테크 이런 데도 관심 많고요. 마일리지나 포인트 이런 것도 악착같이 잘 모아요.(웃음)”
스물여덟 혹은 서른여덟, 임형주의 시계는 10년 빠르다
임형주에 대한 개인적인 일화 하나가 있다. 그가 막 데뷔했을 무렵 한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그를 대기실에서 스태프와 출연자 사이로 만난 적이 있다. 이미 유명세를 치르고 있었으니 한눈에 임형주라는 것을 알아봤는데 태도가 더욱 인상적이었다. 유명 가수들 사이에서도 주눅 들거나 기죽은 기색이 전혀 없이 당당했던 것. 될 성 부른 나무였던 그는 이미 그때부터 남다른 존재감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15년 후, 그는 너무나 멋진 어른으로 성장해 있었다. 스물여덟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의 정신세계를 가진 어른 말이다.
보통의 남자라면 이제 막 신입사원으로 사회생활 초년병일 나이인데, 좀 다른 삶을 살았죠.
“남자는 스물아홉부터 핀다는 말이 있던데, 주변의 친구들을 보면서 그 말이 사실이구나 하는 걸 느껴요. 얼마 전부터 친구들이 멋있어지더라고요.(웃음) 저는 경우가 다르죠. 남들보다 10년을 일찍 살았으니까요. 소년 시기에 벌써 폈으니, 벌써 사고력은 서른여덟쯤 됐죠. 그런 게 아쉬워요. 스물여덟에 너무 여우가 돼버렸거든요. 어디를 가도 별로 긴장하지 않고, 어떤 자리에 가면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딱 계산이 서니까 그 나이다운 신선함이 떨어진다고나 할까.”
그래도 친구들은 그런 형주 씨를 부러워하지 않나요.
“부러워하죠. 그런데 말이죠. 제가 공연을 하면서 대통령에서부터 시장 상인에 이르기까지 정말 여러 종류의 사람을 만나봤는데 결론은 사람은 다 똑같다는 거예요. 잘나도 요만큼, 못나도 요만큼이에요. 돈 많고 권력이 있어도 누구나 고민이 있고, 건강을 염려하고, 언젠가는 똑같이 죽죠. 따라서 얼마만큼 행복하게 사느냐가 중요한 것 같아요.”
데뷔하고 15년, 참 많은 일이 있었을 텐데, 가장 기억나는 일들은 뭔가요.(사실 원래 데뷔 후 일화들에 대해 묻는 질문이었지만, 그는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마음껏 쏟아냈다. 의도와 달리 대답은 ‘삼천포’로 빠졌지만, 뭐랄까 인간적으로 그를 좀 더 이해하게 하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래서 그대로 옮긴다.)
“얼마 전에 방영했던 TV 드라마 ‘응답하라 1997’을 좋아했는데, 그걸 보면서 느낌이 싸했어요. 초등학교 때 선물 받아 너무 기뻤던 워크맨, 애지중지했던 카세트테이프 등 내가 사랑했던 물건들이 다 어디 갔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러면서 인생도 언젠가는 지겠구나, 미워하지 말자며 갑자기 박애주의자가 되더라고요. 칭찬하고 인정하며 살기도 모자랄 판에 아옹다옹하는 시간이 아깝게 느껴졌죠. 무대에 대한 생각도 좀 달라졌어요. 전에는 무대를 즐긴다고는 했지만 백퍼센트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은 음정이 좀 틀려도 그 자체를 즐기죠. 전에는 ‘내가 왜 그랬지’ 하면서 자학했다면 지금은 큰 그림을 볼 수 있게 된 거예요.”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 있어요.
“아무것도 몰랐던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요. 꿈이 많았거든요. 제 기억 속에 10대 초반의 나이는 정말 값진 시간이었어요. 하지만 삼십대가 되고 사십대가 돼 과거를 회상한다고 해도 20대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을 것 같아요. 너무 치열했거든요. 남들보다 일찍 어른의 세계에 입문했다는 건 장단점이 있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믿어줄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아무것도 안 하고 살고 싶기도 해요. 앞으로 10년, 15년 더 노래해야 한다는 게 두렵기도 하고요. 모든 걸 다 그만둬보고 싶어요. 아마도 일찍 데뷔를 해서 그럴지도 몰라요.”
평범하지 않았던 삶에 대한 아쉬움이 큰 건가요.
“제겐 학창시절의 챕터가 없어요.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데뷔했고, 예원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 줄리어드 음대 예비학교 성악과에 심사위원 전원 만장일치로 입학한 후 팝페라 가수로 활동했으니 중고등학교의 기억이 없는 거예요. 숙명이겠죠.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을 수밖에 없는.”
그런 문제로 심각하게 고민해본 적이 있나요.
“예전에 해봤죠. 왜 나는 남처럼 평범하게 살 수 없는 팔자인가에 대한 자괴감도 있었어요. 음악을 하고 싶었던 건 맞지만 지금의 삶은 제가 선택한다고 되는 길은 아니잖아요. 가끔 꿈에 어린 임형주를 봐요.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나란히 의자에 앉아 있는데, 어린 임형주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죠. 이 아이는 나중에 자신이 어떤 길을 걷게 될지 알고 있을까. 물론 남들처럼 평범한 학창시절을 보냈던들 행복했을까 싶기도 해요.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런 고민 자체가 행복한 사치였다는 걸 깨닫고 있죠. 지금의 삶에 만족해요.”
나눔에도 관심이 많죠. 2008년에는 100억 원을 들여 아트원문화재단도 설립했고 꾸준히 재능기부도 하고 있는데요.
“저는 제 삶이 비단 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많은 분들이 도와주셔서 여기까지 왔으니 더 많이 나눠야죠. 나눔에 대해선 어머니 영향도 컸어요. 꾸준히 나눔 활동을 하시는 걸 보고 자랐고, 저 또한 활동을 하면서 나눔에 관한 철학을 갖게 됐죠. 나눔은 실생활 속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결코 거추장스럽게 생각할 일이 아니죠. 단돈 1000원, 500원부터라도 나중이 아닌 지금 당장 시작하는 게 더 중요해요. 꼭 돈이 아니라도 재능기부를 통해 얼마든지 나눌 수 있고요.”
다시 돌아가서, 10월 6일에 있을 ‘국내 데뷔 15주년, 세계 데뷔 10주년 기념 공연’은 어떤 특별한 무대가 될까요.
“제 팬이라면 누구나 추억이 있을 거예요. 제 노래와 관련된 추억이든 저에 대한 기억이든. 그것들을 회상하게 하는 자리를 만들고 싶어요. 한 곡 한 곡에 지난 세월을 결산하는 의미가 담기겠죠. 저 역시 제 추억을 회상하는 자리가 될 테고요.”
추억이라, 이로써 그와 관계된 또 하나의 추억을 갖게 됐다. 스물여덟이지만 서른여덟보다 더 세상의 깊이를 알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줄 아는 진짜 어른 임형주와 이날, 물리적 나이를 넘어 친구가 됐으니 말이다.
박진영 기자 bluepjy@hankyung.com 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