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가의 길]유럽 명문가에서 배우는 장수 기업의 비밀 “부를 세습하지 말고 스튜어드십을 물려주라”

성공적인 가업승계, 명문가의 길

근대산업의 발원지 유럽에는 한 가문이 최소 100년, 심지어 1000년 이상 운영하는 가족기업이 있다.

유럽의 가족기업이 이처럼 오랜 기간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던 데는 관리자로서의 책임 의식과 합리적인 승계 시스템이 자리하고 있다.


가족기업이 세대 이전에 성공한 비율은 낮지만, 100년 이상 번창한 가문들도 많다. 10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종 제조회사 마리넬리, 세계적인 크리스털 액세서리 브랜드 스와로브스키, 유럽 대표 미디어그룹 보니어 등이 그들이다.

‘히든 챔피언’의 저자 헤르만 지몬이 꼽은 ‘히든 챔피언’ 가운데 3분의 1이 100년 이상을 이어온 가족기업이다. 이들은 다른 기업의 평균보다 높은 이익을 내고, 자기자본 비중이 높고, 전반적으로 자금 조달에 보수적이라는 특징이 있다. 지몬은 이것이 히든 챔피언의 독립성을 유지시키는 비결이라고 말한다. 이 외에도 가족기업들은 오너가 기업을 개인 사유물로 인식하지 않고, 성공을 중시하는 출세주의자가 아니라는 등의 공통점이 있다. 가업승계에 성공한 유럽 기업의 사례를 통해 명문가에 이르는 길을 알아보자.



어린 시절부터 전통을 승계하라
이탈리아 마리넬리家

마리넬리는 가문의 이름으로 1000년 이상 종을 만들어왔다. 일본 호시료칸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긴 역사를 자랑하는 마리넬리는 직원이 20명 정도밖에 안 되는 작은 기업이다. 이런 작은 기업을 한 가문에서 1000년 이상 지켜올 수 있었던 힘은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시작되는 자녀 교육에 있다.

현 경영자인 파스칼레는 주조소에서 성장해 최고의 장인이 됐다. 최고 장인이 된 지금 그는 자녀를 자주 주조장에 데려온다. 그 덕에 주조장에는 남매를 모르는 이가 없고, 남매가 모르는 작업도 없다.


아이들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유치원에 다니는데, 평일에 착한 일을 하면 주조소에 올 수 있다. 아이들에게 주조소는 학습장이자 놀이터다. 마르넬리에서는 자녀들에게 가업을 이으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어린 시절부터 삶으로 가르친다. 파스칼레는 그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자녀들이 언젠가는 그의 뒤를 이을 거라고 믿는다. 이처럼 마리넬리가는 자녀들에게 가업승계를 강요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가족의 전통에 대한 자부심과 대를 이어야 하는 책임감을 심어주고 있다.

가족기업의 자녀들은 마리넬리처럼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비즈니스 이야기를 듣거나 기업에 관해 배운다. 어린 시절 회사에 대해 긍정적인 이야기를 듣거나 회사를 방문한 경험을 가진 자녀들은 기업에 대한 관심과 참여 열의가 높다.




절대 권력은 사전에 방지하라
오스트리아 스와로브스키家

세계적인 크리스털 액세서리 브랜드 스와로브스키는 130년 된 가족기업이다. 스와로브스키 가문이 1895년 오스트리아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시작한 크리스털 액세서리는 세계적인 브랜드로 자리 잡아 5대째 이어오고 있다.

스와로브스키의 장수 비결은 철저한 가족 경영에 있다. 창업자인 대니얼 스와로브스키는 세 아들에게 자신의 지분을 똑같이 배분했다. 아버지에게 지분을 물려받은 형제는 모든 지분을 가족 내에서만 거래하고 후대에 공정하게 배분한다는 원칙에 합의했다. 그 원칙은 지금까지 지켜져 현재 약 150명의 스와로브스키 일가가 경영권을 나누고 있으며, 5세대들이 경영 전반에 포진해 있다.


이러한 원칙이 100년 이상 유지될 수 있었던 비결은 특정 가족 구성원에게 절대 권력이 생기는 것을 견제하는 시스템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족은 지분율이 아무리 높아도 회장 자리에 오를 수 없다. 회장은 가족위원회에서 선정한 8명의 이사회 멤버가 정한다.

또한 가족이라도 경영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능력을 검증받아야 하는데, 아무리 지분율이 높아도 회사에 입사하려면 최소 2~3년의 수습 기간을 거쳐야 한다. 가족이라고 특혜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외부에서 10년 이상의 전문성을 쌓은 뒤 입사하는 경우도 있다.

지분 양도와 고용 규정 등은 가족 헌장과 고용 정책 등에서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규정은 가족회의를 통해 합의하고 명문화되기 때문에 가족 간 갈등이나 분쟁을 예방하는 역할을 한다.

스와로브스키사의 가족과 직원이 공유하는 비전은 ‘크리스털을 통한 즐거움과 매력’이다. 이는 회사 전략의 방향성을 제시하며, 현재 기업에 참여하는 4, 5대 가족들은 공통의 비전을 기반으로 한 핵심 사업에만 집중하고 있다.




우수한 지배구조에 장수 비결이 있다
스웨덴 보니어家

보니어는 발렌베리와 함께 스웨덴의 존경받는 가족기업이다. 1804년 코펜하겐에서 창업자 게르하르트 보니어가 서점을 개업하며 시작해 8세대가 지난 지금은 20여 개국에 200개 이상의 기업을 거느린 미디어 재벌로 성장했다. 보니어그룹의 성장 배경에는 언론의 자유, 개인의 힘, 출판에 대한 열정 등 가족의 핵심 가치와 함께 우수한 기업 지배구조가 있다.

현재 보니어그룹의 주식은 가족이 100% 보유하고 있으며, 당분간 이 정책은 변함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73명의 가족주주들은 한 세대, 즉 향후 30년 동안은 외부에 주식을 팔지 않기로 주주합의서를 작성했기 때문이다. 만일 주식 매도를 원할 경우에는 반드시 회사에 매수해야 하고, 이때 주식 가격은 공정가의 30%다. 주식 매매 가격은 1999년 합의서를 갱신하면서 가족 만장일치로 확정했다. 이전 세대의 합의서는 1953년 만들어졌는데 그때는 매매 가격을 ‘0’으로 책정했다.


매매 가격을 낮게 책정한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가족들이 주식을 매도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고, 또 다른 하나는 만일 가족들이 주식을 팔기 원하는 경우 회사가 시장 가격으로 주식 대금을 지불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아직은 아무도 주식 매도를 원하지 않았다.

그 대신 주주들은 안정적인 배당금을 받는다. 회사에 적자가 발생해도 배당을 한다. 이는 배당 정책에 대한 합의에 따른 것이다.

보니어그룹 지배구조의 중심에는 가족총회가 있다. 가족총회는 주식 보유 여부와 상관없이 전 가족을 대상으로 한다. 전체 가족 대상 총회는 1년에 한 번씩 개최한다. 가족총회 밑에는 4명으로 구성된 지명위원회가 있다. 지명위원회는 후계자 후보를 지명한다. 지명위원회 산하에는 기업 지배를 위한 지주회사 알버트 보니어 AB와 가족 지배를 위한 보니어 가족재단을 두고 있다. 가족재단의 비용은 지주회사가 지불하는 구조다.

보니어그룹이 9세대에 걸쳐 200년 이상을 생존할 수 있었던 비결은 가족에게 있다. 가족기업으로 대를 잇겠다는 가족 공동의 꿈, 그리고 이를 위한 가족들의 협력과 헌신이 없었다면 지금의 보니어그룹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신규섭 기자 waw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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