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가의 길:두산그룹] 국내 기업 최고(最古) 역사, 철저한 경영 교육 후 승계 전략

성공적인 가업승계, 명문가의 길

1921년 5월, 경성 포목상 조합의 임원들과 조합장 박승직(앞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


재계 서열 10위권인 두산그룹은 국내 기업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역사도 역사지만 설립 초기부터 경영권 다툼 없이 우애 좋게 형제간 경영권 승계를 하고 있기로도 유명하다. 지난 2012년 두산그룹 회장에 취임한 박용만 회장까지 3세대 경영을 마치고 나면 4세대 사촌 경영이 이뤄진다는 점에서도 주목을 받고 있다. 규모가 큰 그룹이 별 탈 없이 승계를 통해 가족 경영을 해나가고 있는 데는 철저한 경영 수업과 교육이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두산그룹은 지난 1996년 국내 기업 중 최초로 100주년을 맞았다. 올해 나이는 117세. 두산의 창업자는 박두병 회장이지만 그의 부친인 박승직이 운영하던 ‘박승직상점’을 모체로 한다.

1896년 8월 1일, 지금의 서울 종로4가인 배오개에 박승직상점이 문을 열었다. 이 포목상은 훗날 100년을 넘어 150년을 바라보는 두산그룹 역사의 토대를 다지는 창업의 과정이 된다. 1936년 4월, 고희를 넘어 노령이 된 박승직 사장은 4남6녀 중 장남인 박두병에게 상점의 경영을 맡김으로써 첫 번째 세대교체가 이뤄진다.

경성중학교를 거쳐 경성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은행에 취직했던 박두병은 1936년 봄 사직과 함께 박승직상점에 입사, 3개월간 견습 생활을 거쳤다. 사실 그가 상업 방면으로 일관된 교육 과정과 사회적 경력을 쌓게 된 것은 가업을 승계하도록 하기 위한 부친의 치밀한 전략과 배려에 의한 것이었다. 또한 태어난 후 상업적인 환경에서 성장한 박두병도 상계 진출 이외 다른 직업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박두병에게 부친의 일거수일투족은 그대로 산교육이 됐다. 근검절약하는 태도와 베풂에 있어 인색하지 않으며 권위보다 관용과 화목을 우선하는 점이 그랬다. 박승직은 생활이 넉넉할 때도 잡곡 혼식을 가르쳤고 몸소 실천했으며, 상점에 비단 옷감이 쌓여 있어도 사치를 몰랐다. 이러한 태도는 박두병 회장을 지나 두산의 3세대에도 계속 이어졌다. 두산의 총수들이 “부자라고 용돈을 더 많이 받은 것은 아니다”라며 대대로 근검절약의 정신을 이어받았음을 고백한 대목에서도 알 수 있다.


1970년 아시아상공회의소 회장 당선 후 취임사를 하는 박두병 회장.

100주년 맞아 사업 포트폴리오 변화로 혁신

두산이라는 이름은 1946년 박두병 초대 회장이 운수업을 시작하면서 바꾼 상호로, 1948년 시작된 두산상회란 이름의 기반이 됐다. 이어 1951년에는 주식회사 두산상회가 정식 발족했다. ‘두산(斗山)’은 박두병 회장의 ‘두’자와 뫼 ‘산’자를 합친 것으로 박두병 회장의 부친인 박승직이 사업을 시작하는 아들에게 ‘한 말(斗), 한 말 차근차근 쉬지 않고 쌓아 올려 산(山)같이 커져라’라는 뜻으로 작명을 해준 것이었다. 이후 두산은 동양맥주, 두산산업, 동산토건(현 두산건설), 한양식품 등을 설립하면서 소비재 산업, 무역업, 건설업 등을 중심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창업 100주년을 맞이한 1996년 두산은 과감한 변신을 시도한다. 1990년대 들어 호황기를 맞아 과도하게 투자를 하면서 심각한 경영난에 처한 것이었다. 당시 그룹을 이끌던 박용성 회장은 훗날 “내가 73년을 살면서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라고 꼽는 결단을 내리게 되는데 바로 소비재 위주의 사업 포트폴리오를 재구성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두산은 한국네슬레, 한국3M, 한국코닥 지분은 물론 OB맥주 영등포 공장까지 매각했고 이어 1997년에는 음료 사업을, 1998년에는 주력 사업인 OB맥주와 서울 을지로 본사 사옥까지 매각하며 ‘도전과 혁신’의 역사를 써나갔다.

이러한 선제적 조치의 결과는 훨씬 더 컸다. 1997년 외환위기가 터져 수많은 기업들이 쓰러졌지만 두산은 오히려 건재했다. 그뿐만 아니라 모두가 어려울 때 두산은 도리어 새로운 미래 성장 동력을 찾아 나섰다. 새롭게 눈을 돌린 분야는 인프라 지원 사업(ISB·Infrastructure Support Business). 2001년 한국중공업(두산중공업) 인수가 그 출발이었다. 이후에도 고려산업개발(현 두산건설), 대우종합기계(현 두산인프라코어) 등을 인수하며 대표적인 중공업 그룹으로 변신했다.


1981년 두산그룹 회장 이취임식에서 정수창 회장으로부터 두산그룹기를 전달받고 있는 박용곤 회장.

인화제일주의에 바탕을 둔 철저한 후계 교육

박승직에서 박두병 초대 회장으로 이어진 가업은 이후에도 승계를 통해 후계 경영을 이어가게 된다. 특히 3세대라 할 수 있는 박두병 회장의 자식 세대들은 우애를 바탕으로 형제간 나이순으로 승계함으로써 가족 경영의 모범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았다. 6남1녀 중 장남인 박용곤 회장이 1981년 두산그룹 회장에 취임해 1996년 두산그룹 명예회장으로 물러나기까지 15년간 그룹을 이끈 뒤, 차남인 박용오 회장은 1998년 두산그룹 대표이사 회장에 올라 2005년 두산그룹 명예회장으로 물러났다.

이후 삼남 박용성 회장이 2005년부터 2009년까지 그룹을 맡았고, 의사 출신으로 서울대 병원장을 지낸 사남 박용현 회장도 2009년부터 2012년 3월까지 그룹 회장직을 맡았다. 2012년 4월부터 두산그룹을 이끌고 있는 박용만 회장은 박두병 회장의 다섯째 아들이며, 막내인 박용욱 씨는 개인 사업을 하고 있다.

오랜 역사만큼이나 두산은 4세 경영인을 가장 많이 낸 기업으로도 유명한데, 박용만 회장 이후 그룹은 4세들의 사촌 경영이 될 것으로 내다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실제로 지금은 4세들이 경영 전면에 나서고 있어 조만간 본격적인 세대교체가 이뤄질 것이란 전망이다.

2012년 4월 두산그룹 회장으로 취임한 박용만 회장. 박 회장의 경영철학은 ‘두산 웨이(way)’로 기업문화와 임직원들의 행동 방식을 뜻한다.

창업 100주년을 맞은 1996년 두산은 사업 포트폴리오를 재구성하며 대표적인 중공업 그룹으로 변신했다.


대를 이어온 두산 박씨 가문의 가르침은 인화(人和)의 정신이었다. 인화는 직장 내 상하 간에 있을 수 있는 수직적인 대결 의식을 순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원 개개인 모두가 지녀야 할 수평적인 사랑과 화합으로 승화돼야 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두산의 보이지 않는 저력으로 작용했다. 이후 이 인화 정신은 사시(社是)로 정착해 두산 발전을 이끌어가는 경영 방침의 핵이 됐다. 또 하나 두산 가문의 특징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경영 수업이다. 후계 교육을 철저히 하기로 유명한 두산 가문은 ‘바닥(사원)부터 시작하고 모든 계열사를 골고루 익히게 한다’는 기본적인 원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보통 30대 초반에 두산 계열사에 배치돼 1년에 1계단씩 승진하는 게 일반적인 수순이다.

그러나 가족애가 장점으로 꼽혔던 두산은 박용오 전 회장의 내부 고발로 촉발된 형제의 난을 겪으며 ‘옥의 티’를 남기기도 했다. 가족의 화목과 우애를 중시하며 아름다운 공동 소유를 실천해오던 터라 사회적으로도 더욱 충격이 컸다.



박진영 기자 bluepj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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