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IGN ODYSSEY] 여인의 향기, CHANEL N°5



샤넬 넘버 5, 유리, 13.4×9.4×3.9cm, 샤넬 컬렉션, 파리.

샤넬 넘버 5(Chanel N° 5)는 살아 있는 ‘전설‘의 향수다. 샤넬 넘버 5 한 방울로 세상의 모든 여성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갖게 된다. 샤넬 넘버 5는 가브리엘 샤넬(Gabrielle Chanel·1883~1971)이 1920년 프랑스 파리 자신의 부티크 메종에서 출시한 시그니처 향수다.


맨 레이, ‘가브리엘 샤넬 초상’, 1935년, 샤넬 컬렉션, 파리.

가브리엘 샤넬은 자신의 향수가 현대적 예술작품이나 추상적 개념이 되기를 바랐다. 샤넬은 장미나 계곡 깊은 곳에서 핀 백합처럼 꽃향기가 아니라 인공적인, 사람의 머릿속에서 구상된 향기를 만들고자 했다. 그는 ‘여성 같은 향기가 나야지 꽃 같은 향기가 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과거의 향이 아닌 현대적인 향수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샤넬 넘버 5의 탄생에 전해지는 설에 따르면, 실험실의 조수가 실수로 유리병에 10%짜리 희석액 대신 순도 100%의 알데히드 원액을 넣는 바람에 당시 굉장히 낮선 성분이었던 알데히드가 엄청나게 많이 들어간 향수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샤넬 넘버 5는 당시에 거의 사용하지 않던 ‘알데히드’라는 인공화합물과 천연 원료를 배합한 향수로 향수 역사상 하나의 이정표가 됐다.

향수는 고대 인도, 그리스, 로마, 페르시아의 귀족과 중세 메디치가(家)의 욕망과 황홀이 담겨 있다. 최초의 향수는 기원전 수천 년 전에 지중해의 사이프러스 섬에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약간의 시트러스와 바닐라향의 자극적인 향을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에게 바쳤는데, 분무기가 고안되기 전인 고대에는 사람들이 향유를 아프로디테의 신전에 봉납해 태웠다. ‘향수(perfume)’라는 단어는 라틴어로 ‘연기를 통해(per fumum)’라는 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CHANEL N°5
샤넬 넘버 5는 20세기를 아우른 위대한 향수이자 정숙한 여인의 향기다. 영국 일간지 데일리메일은 세계에서 가장 매혹적인 향수에 대해 지면을 가득 채우면서 “메릴린 먼로는 남자들을 유혹하는 데 거칠 것이 없었다. 그의 화려한 남성 편력은 그가 선택한 향수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단정적 어감으로 기사를 썼다.

1952년, 먼로는 자신이 섹시하고 싶을 때 샤넬 넘버 5를 뿌리고, 잠잘 때는 아무것도 입지 않고 오직 몇 방울의 샤넬 넘버 5만 있으면 된다고 고백했다. 그의 솔직하고도 도발적인 발언은 뉴욕과 파리의 여심과 남심을 동시에 흔들었다. 욕망은 은밀하고 향기는 농염하다. 1955년 봄, 먼로는 뉴욕 앰배서더 호텔에서 샤넬 넘버 5 향수병을 들고 화보를 촬영했다. 향수병을 풍만한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가 향기에 취한 여인의 황홀감을 보여주었다. 금발의 미녀가 맡는 향기는 화보 밖 세상으로 풍겼고, 샤넬 넘버 5의 향기보다 더 요염했다. 광고는 당연히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먼로의 몸짓으로 샤넬 넘버 5의 향기를 보고, 먼로가 느끼는 샤넬 넘버 5의 향기를 상상한다.

샤넬 넘버 5의 중심이 되는 꽃향기는 향수 제조 역사상 가장 럭셔리하고 전통적인 아로마인 장미, 재스민, 일랑일랑, 그리고 백단향의 조합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샤넬 넘버 5의 진짜 비밀은 바로 알데히드에 있었고, 조향사 에르네스트 보가 이것을 어떻게 가공했는지가 핵심이다. 이 꽃향기들과 알데히드가 한 세기를 아우르던 향의 기준을 바꾸어 결국 샤넬 넘버 5를 황금기 최고의 향수로 만들어준 결정적 성분이었던 것이다. 알데히드는 산소와 수소, 탄소원자로 이루어진 분자화합물이다. 오늘날 우리 주변의 세제나 방향제, 샴푸 같은 데에서 이 향을 맡을 수 있는데, 우리가 단순히 ‘깨끗하다’고 느끼는 냄새들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알데히드에는 기본적으로 여러 냄새가 난다. 따스한 왁스나 타오르는 촛불의 향이 나기도 하고, 이미 타버린 성냥개비 냄새가 나기도 한다. 어떤 때에는 옅은 장미향과 풍부한 재스민 오일의 아로마가 느껴지기도 한다. 탄소를 얼마나 함유했느냐가 알데히드의 향을 결정하는데, 샤넬 넘버 5에 사용된 알데히드(c-12)에서는 햇볕에 말린 산뜻한 세제 향이 나기도 하고, 겨울의 정취인 티 없이 맑은 순백색의 눈가루와 같은 향이 나기도 한다.


앤디 워홀, ‘샤넬’, 1985년, 캔버스 위에 아크릴·실크스크린, 개인 소장.




기도와 성배 의식에는 반드시 향유와 성유가 함께 했고, 영적인 묵상 시간에는 수도원 근처에 자생하는 재스민, 라벤더, 그리고 야생 장미의 아로마 향기를 맡으면서 묵상하기도 했다.



알데히드가 향수에 사용될 때에 가장 재미있는 점은 알데히드가 고유한 향을 지녔음에도 향수에 첨가되더라도 그 특유의 향이 별로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풍부한 꽃향기에 알데히드를 첨가하는 것은 마치 요리사가 딸기 위에 신선한 레몬즙을 뿌리는 것과 같다. 첫 번째 아로마를 보완하기 위해 두 번째 아로마를 첨가하는 것이 아니라, 레몬즙을 뿌림으로써 딸기 고유의 향기를 더욱 달콤하게 만들어 그 풍미를 더하고 맛을 돋우는 이치와 같다. 알데히드가 향수에서 내는 효과인 것이다. 알데히드가 향수를 더 높고 멀리 퍼트릴수록, 향수에 배인 장미와 재스민 향도 함께 퍼져 나가며 더욱 풍부하고 럭셔리한 향을 내게 한다. 화려한 꽃향기와 금욕적인 알데히드가 이루는 이 완벽한 대조가 바로 샤넬 넘버 5의 비밀이자 가장 훌륭한 업적이다.


리처드 애버던, 카트린느 드뇌브의 샤넬 넘버 5 광고 사진, 1972년 샤넬 컬렉션, 파리.

향수 속 알데히드가 가진 향의 성분과 같은 그런 산뜻한 느낌의 선으로 된 향수병이다. 어쩌면 자신의 유년기를 점철했던 오바진(Aubazine) 수도원의 단순하고 절제된 공간을 만든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에드 페인게르히, ‘샤넬 넘버 5 & 메릴린 먼로’, 1955년, 샤넬 컬렉션, 파리.

세상에서 가장 매혹적인 향수인 샤넬 넘버 5는 코코샤넬이라 불렸던 한 가냘픈 여인의 우울했던 유년시절 수도원의 기억에서부터 출발한 것이다.


필립 할스먼, ‘달리의 콧수염(The Essence of Dali)’, 1954년, 실버 프린트, 32×27.9 cm, 개인 소장.


코코 샤넬
가브리엘 샤넬은 1883년 남서부의 오벨뉴 지방의 소뮈르에서 가난한 떠돌이 행상 아버지와, 일과 출산으로 지친 병약한 어머니 사이에 5남매의 막내로 태어난다. 어머니 잔느 샤넬은 천천히 그를 좀먹어 온 결핵으로 샤넬이 고작 열두 살 때인 1895년 생을 마감했다. 무능하고 무책임한 아버지는 사내아이들은 힘껏 일해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할 곳으로 보냈고, 어린 세 자매는 마차에 싣고 코레즈 시골 언덕 마을에 있는 ‘오바진’이라는 수도원의 고아원에 버렸다. 후일 코코라는 이름으로 세계적인 명사가 된 소녀가 자라난 곳이 바로 이 고아원이었다. 어린 시절 버림받은 아픔에서 오는 깊은 상실감과 상처는 샤넬의 마음속 깊은 곳에 새겨졌다.

시토 수도회 소속인 오바진 수도원은 모든 일을 삶과 예술의 기본적인 단순함으로만 볼 뿐 다른 일에는 특별한 가치를 두지 않았다.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수도원은 금욕과 절제만이 웅장하게 메아리치는 공간이었고 샤넬의 어린 시절에도 변함이 없었다. 수도원 생활은 힘든 노동과 엄격한 규율로 점철됐고, 여자 아이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바느질 작업에 몰두했다. 재미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옷 세탁을 하고 수선을 하며 시간이 흘렀다. 향수와 기성복 모자, 가방, 보석 등 샤넬의 절제된 디자인은 수도원의 심플한 생활과 꾸밈없는 미감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오바진 수도원의 고아원 시절은 샤넬의 순수함과 미니멀리즘에 대한 강박적인 미학을 형성하는 핵심이었다. 수도원 건물은 그의 생애와 샤넬 넘버 5의 제품 탄생 과정을 형성하는 메타포들로 가득 차 있다.


샤넬 넘버 5, 1921년 (8.3×6.2×2.2cm)· 1924년(13.4×9.4×3.9cm), 유리, 샤넬 컬렉션, 파리.

오바진 수도원은 어디에나 향기와 향수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상징들로 가득하다. 기도와 성배 의식에는 반드시 향유와 성유가 함께 했고, 영적인 묵상 시간에는 수도원 근처에 자생하는 재스민, 라벤더, 그리고 야생 장미의 아로마 향기를 맡으면서 묵상하기도 했다. 수도원이 설립된 지 수백 년이 지나는 동안, 향기는 오바진 신앙의 한 부분을 차지했고, 그 흔적은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어린 샤넬이 듣던 끝없는 설교가 울려 퍼지는 수도원 본당은 이런 향기가 어려 사람들이 명상과 기도를 하던 곳이다. 절망적이고 불행했던 그의 ‘오바진 시절’은 평생 침묵과 미스터리로 밀봉했고, 그 누구에게도 언급하지 않은 채 수치스러운 비밀로 남겨졌다. 하지만 항상 코코와 함께한 것은 오바진의 향기였다. 오바진의 고아 소녀들은 세상을 버리고 수녀가 될 것이 아니라면 열여덟 살에 수도원을 떠나야 했다. 샤넬은 유년기의 불행을 뒤로하고 오바진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물랑 쉬르 알리에르라는 도시로 떠났다.


샤넬 넘버 5 향수병 케이스, 1921년, 카드보드, 8×4.7×10.5cm, 샤넬 컬렉션, 파리.

샤넬은 1904년 말 오바진에서 배운 바느질 솜씨로 성 마리 양품점에 판매원으로 취직했다. 주말에는 푼돈이라도 벌기 위해 남자들의 바지 수선 일을 얻어 삯바느질을 했다. 일은 무료하기 짝이 없었지만 물랑에서의 삶은 그의 일처럼 단조롭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젊고 생기발랄한 샤넬에게는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은 욕망이 일렁였다. 그는 카바레에서 일하기 위해 양품점 점원을 그만두었다. 이 일은 그에게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샤넬은 부족한 재능을 패기와 젊음이라는 매력으로 메우면서 희가극 배우 겸 댄서로 일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엉덩이 흔드는 법을 배운 후 현란하게 장식이 많은 드레스를 입고 춤을 췄다. 그해 ‘누가 코코를 보았나(Qui qu’a vu Coco dans le Trocadero)’와 오펜바흐가 작곡한 ‘코코리코(Ko Ko Ri Ko)’를 부르면서 그를 보기 위해 찾아오는 젊은 장교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다. 사람들은 노래를 들으며 자연스럽게 가브리엘 샤넬이라는 본명 대신 코코 샤넬이라는 별명으로 그를 부르기 시작했다. 가브리엘 샤넬이 코코 샤넬로 거듭난 셈이다. 샤넬이 물랑에서 쇼걸로 활동한 시간은 얼마 안 되지만 그는 화류계 여인의 냄새를 기억했다. 그것은 단순히 향수가 아니라 사람들을 매료시킬 만한 특별한 향이었다. 샤넬 넘버 5 향수에 대한 동경은 그때부터 이미 마음속에 싹을 잉태하고 있었다.


시베르제 (SEEBERGER), 비아리츠의 샤넬 부티크 사진, 1931년, 샤넬 컬렉션, 파리.


20세기 문화의 아이콘
샤넬 넘버 5의 사각 향수병은 20세기 문화의 아이콘이다. 샤넬 넘버 5의 절제된 사각형의 향수병 디자인은 “아름다움은 절제에 있다”는 샤넬 철학의 소산이다. 샤넬 넘버 5 병 모양은 장식적이고 야단스러운 이전의 다른 향수병 디자인과는 달리, 샤넬이 원했던 단정한 선의 느낌을 살린 또렷하고 단순한 디자인이었다. 1921년 초기 향수병은 가장자리가 살짝 곡선으로 둥글려 있었다. 남성미가 느껴지는 과감한 절제가 돋보이는 디자인이다. 오늘날의 병 모양은 1924년, 최초 향수병에 사용되던 가볍고 얇은 유리가 깨지기 쉬워 크리스털 유리병으로 교체하면서 만든 새로운 디자인이다. 둥근 귀퉁이를 각이 지게 다듬은 이후 병 디자인은 거의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까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오늘날 샤넬 메종이 쓰고 있는 샤넬 로고와 함께 ‘CHANEL’이라는 절제된 타이포그래피만 보면 누구나 샤넬 제품임을 알 수 있다. 샤넬 넘버 5의 향수병에 붙은 작은 흰색 라벨은 간단하게 ‘N°5 CHANEL PARIS PARFUM’이라고 쓰여 있다. 샤넬의 패키지에 사용되는 서체는 상 세리프(sans-serif) 폰트로 당대에 각광받은 아방가르드 디자인에서 가져왔다. 샤넬은 샤넬 넘버 5 병마개 위에 자신의 상징을 새겨 넣었는데, 누구나 즉시 알아볼 수 있는 두 개의 C로 만든 로고는 이후 샤넬의 공식적인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샤넬 넘버 5 탄생에 기여한 코코 샤넬만의 독창적인 아이디어였다. 샤넬 넘버 5는 코카콜라처럼 1960년대 앤디 워홀의 아이콘이 아니었음에도 향수가 스스로 삶을 갖는 문화의 기념비가 됐다.


최선호 111w111@hanmail.net서울대 미술대학 회화과 동 대학원, 뉴욕대 대학원 졸업. 국립현대미술관, 삼성미술관 리움, 시카고 스마트뮤지움, 버밍햄 뮤지움 등 작품 소장. 현재 전업 화가. 저서 ‘한국의 미 산책’(해냄)
상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