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WER OF THE WOMAN] “어디에도 없는 가전제품 만들어 인류 삶의 질 높일 것”
입력 2013-08-21 17:04:42
수정 2013-08-21 17:04:42
한경희 한경희생활과학 대표
‘입식 부엌이 도입된 이래로 남녀평등에 가장 많이 기여한 사람.’ 어느 사회학자는 한경희 대표를 이렇게 이야기했다. 스팀 청소기로 남편들도 손쉽게 가사 일을 할 수 있게 됐고, 진동파운데이션은 바쁜 아침 여성들의 메이크업을 간소화해줘 보다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했으니 틀린 말도 아니다. 하지만 한 대표에게는 절반의 성공일 뿐이다. 그는 언젠가 이름 석 자를 걸고 인류의 삶을 풍요롭게 해줄 획기적인 가전제품을 내놓겠다는 포부를 품고 있다.7월 10일 서울 가산동 한경희생명과학 본사에서 만난 한경희 대표는 조그마한 책걸상을 들고 나왔다. 최근에 출시했다는 아이디어 상품 ‘백 솔루션(Back Solution)’이었다. 척추 교정을 위한 자세 교정 책걸상 시스템으로 앉아 있는 동안 척추에 무리가 덜 가도록 설계된 제품이다. 한 대표는 “실제로 공부하면서 불편함을 느낀 중학생이 낸 아이디어에 착안해 만들었다”고 말했다.
소비자 아이디어 제품화 시도, 창의력 있으면 누구나 창업
중학생의 아이디어를 제품화했다는 점이 이색적입니다.
“우리가 생활 속 불편함을 개선하는 제품을 만들다 보니 아이디어를 가지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요. ‘백 솔루션’은 중학생과 한경희생활과학 전문 교수진의 협업으로 탄생한 아이디어 제품 1호인 셈이지요. 회사의 입장에서도 고객과 눈높이를 맞추려면 그들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것이 좋고, 소비자는 아이디어만으로도 제품화할 수 있으니 서로 도움이 됩니다.”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성격이었다면 지금보다 회사를 더 키울 수 있었을 거란 생각도 해봤어요.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죠. 오히려 여성들의 작은 목소리에도 세심하게 귀를 기울이고 고충을 공감하려 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지요.”
1500억 원의 연 매출을 올리고 있지요. 어느 정도 기업의 규모가 커졌으니 사회공헌의 차원인가요.
“새 정부에 미래창조과학부가 생겼잖아요. 우리도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제품으로 연결해 사람들의 창업을 도와주려 노력하고 있어요. 사업 초창기에 고생을 많이 해 창업 환경이 얼마나 열악한지 잘 알죠. 초기에는 모든 걸 내던지고 회사를 차리는 게 어렵기 때문에 기업의 도움이 큰 힘이 되죠. 아이디어만 있으면 일을 계속 하면서도 제품화를 시도할 수 있어요.”
‘백 솔루션’에 대한 소개를 해주세요.
“요즘은 스마트폰 때문에 청소년들의 자세 문제가 심각해요. 거북목이나 척추측만증을 가진 학생들이 대다수예요. 백 솔루션은 의자에 똑바로 앉아 허리와 목을 펼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졌어요. 목을 숙이지 않아도 글씨를 쓸 수 있지요. 최근 1~2년 동안 ‘백 솔루션’에 전 사원이 매달렸고, 좋은 결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스팀 청소기, 광파오븐, 에어프라이어, 식품건조기 등 한경희생활과학의 제품들은 톡톡 튀는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것들이 많아요. 제품 연구·개발(R&D)은 주로 어떻게 하나요.
“생활 속에서 뭐가 불편한지 늘 생각합니다. 문제가 있다면 그걸 어떻게 바꾸면 효과적일까를 고민하죠. 세상에 없는 제품들을 창조할 때는 3년, 기존에 있는 제품은 1년 정도 기간이 걸려요. 스팀 청소기도 4년 꼬박 매달렸는걸요. 그러니 ‘묵은지’라고 할 수 있지요. 매년 매출액의 3~5%를 R&D에 투자하고 있고요.”
서른여섯의 도전, 꿈과 현실의 괴리가 사업가의 길 안내
한 대표는 온화한 미소를 띤 채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답을 이어나갔다. 깃을 단단히 여민 노란색 재킷은 화사하면서도 단정했고, 적당히 웨이브를 넣은 헤어는 여성스러우면서도 강단 있어 보였다. 겉모습은 한없이 여리지만 예리한 가시를 품은 장미, 그를 마주하면서 느낀 단상이다.
‘천생 여자’ 같은 여린 외모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여성 최고경영자(CEO)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한때는 약하고 여려 보이는 외모가 콤플렉스였어요. 술도 한 잔 못합니다. 내가 세고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성격이었다면 지금보다 회사를 더 키울 수 있었을 거란 생각도 해봤어요.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죠. 오히려 여성들의 작은 목소리에도 세심하게 귀를 기울이고 고충을 공감하려 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지요. 마찬가지로 저는 영업에 소질이 없지만 함께 일하는 분들은 굉장히 능력이 출중해요. 내가 잘할 수 없는 부분에 콤플렉스를 갖기 보단 부족한 점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들을 찾고 그들을 독려해 주는 것도 회사를 성장시키는 데 도움이 됐어요.”
창업 초창기, ‘평범한 주부’로 알려졌던 것과 다르게 국제기구 사무원, 호텔리어, 교육 공무원 등 여러 직업을 거쳤습니다. 사업에 뛰어들게 된 결정적 계기는 무엇인가요.
“제가 거친 직업 모두 다른 사람들이 선망하는 것이었고 나 역시 많은 보람과 성취감을 느끼며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열심히 일하고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따라와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가 있었지요. 꿈과 현실의 괴리였어요. 어릴 때부터 가진 역량을 한껏 발휘할 수 있는 터전을 직접 만들고 싶었거든요. ‘이대로 정말 괜찮을까’를 반복해서 묻던 중 서른여섯 늦은 나이에 도전하게 됐습니다.”
1999년 사업을 시작할 당시엔 여성 CEO가 드물었지요. 시장의 텃세나 주변의 편견 등 고충이 많았을 듯한데요.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만 해도 여자가 사회에 나와 뭘 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웠어요. 거기다 가전제품 사업이니 사회적인 편견과 맞서 싸우는 게 일이었지요. 한번은 정부 프로젝트 관련해서 평가하러 나온 분이 ‘당신 남편이 어떤 사업을 하다가 망해서 당신이 바지사장을 하는지 실토하라’고 하더라고요. 2004년 11월에 처음으로 자재대금을 결제하기 시작했으니 제품이 알려지기까지 처음 5년 동안 엄청 고생했지요. 언제 길바닥에 나앉을지 모르는 위기를 매일 겪었지만 정신력으로 버텼어요. 제품이 뜬 후에는 견제도 많이 받았어요. 하지만 꾸준히 좋은 품질의 제품을 만드니 외면하지 않고 인정도 받게 됐죠.”
한국 넘어 세계가 주목한 여성 리더, 육아는 여자 넷이 함께
국내에서 한창 승승장구하던 한 대표를 주목한 곳이 또 있었으니, 바로 월스트리트저널(WSJ)이었다. 이 매체는 ‘세계를 움직이는 50인의 여성’ 목록에 그의 이름을 올렸다. 날고 기는 가전제품 기업들이 포진한 한국 시장에서 점유율 3위에 이르는 기업을 일군 것에 대한 평가였다. 그는 “앞으로 더 잘 하라는 채찍질”이라고 겸손을 부리면서도 ‘불굴의 기업가’ 정주영을 닮고 싶다고 했다. 목표는 세계 최고다.
역경을 딛고 2008년 WSJ 선정 ‘세계를 움직이는 50인의 여성’에 이름이 올랐을 때 기분이 어땠습니까.
“세상사라는 게 열심히 한다고 해서 다 알아주는 건 아니잖아요. 한국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대기업에 치이지 않고 독자적인 브랜드를 개발했고 또 여성들에게 필요한 제품을 만드는 회사라는 점을 높게 평가한 것 같았어요. 앞으로 더 열심히 하라고 부추기는 거죠. 세계를 움직인 여성이라는 평가가 더없이 뿌듯하지만 결코 여기가 끝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경희생활과학 제품이 세상에 나온 뒤 사람들은 “남편이 청소를 거들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어떨 때 가장 보람을 느끼세요.
“사업 초창기에 무릎 아픈 어머니께 스팀 청소기를 선물해 난생 처음으로 칭찬을 받았다는 댓글을 보고 무척 행복했어요. 남편들이 가사 일을 돕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고요. 어느 사회학자는 입식 부엌 이후 우리나라 남녀평등에 가장 기여한 여성으로 저를 꼽아주셨어요. 그전까지만 해도 남성들이 걸레 청소를 하는 경우는 없었으니까요. 참 기분 좋습니다.”
일과 육아는 어떻게 병행하고 계세요.
“제 경우는 애들 한창 키울 때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 모두 함께 살았어요. 보육도우미 아주머니도 한 분 계셨고요. 여자 넷이 육아를 함께한 셈이니 운이 좋았죠. 현실적으로 둘 모두 잘 하는 것이 어렵다면 자신만의 원칙을 세우는 것도 도움이 돼요. 제 경우에는 아이들이 초등학생일 때까지만 하더라도 책 읽고 재우는 것만은 제가 한다는 원칙이 있었어요. 저녁과 주말에는 약속을 잡지 않았죠. 아무리 늦어도 아이들이 자기 전에는 들어가려고 노력했어요. 아이가 어려서 일찍 퇴근해야 한다면 일을 집에서 해도 되는 것이고, 또 일찍 나와서 해결할 수도 있지요. 방법은 찾으면 얼마든지 있습니다.”
2015년까지 수출 실적 5000만 달러 달성이 목표라고 밝혔는데요, 성장 동력은 무엇입니까.
“한국 시장에 머무르지 않고 세계 최고의 브랜드가 되고자 합니다. 미국은 큰 시장이기 때문에 가능성이 무궁무진하지요. 시간은 걸리겠지만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해외 진출의 판매 경로를 확보하기 위해 고부가가치 제품인 스팀 및 살균가전 시장을 공략할 계획입니다.”
앞으로는 또 어떤 도전에 나설 건가요.
“스팀 청소기, 스팀다리미는 2011년 기준으로 국내 점유율이 각각 87%, 89%를 기록했습니다. 국내에선 삼성, LG 다음으로 인정받는 브랜드가 됐지요. 이제는 세계 최고의 가전생활용품회사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독창적인 제품을 연말께에 선보일 예정이에요. 앞으로도 세상에 없는 가전제품들을 지속적으로 출시해 인류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기여하고 싶어요. 그렇게 하기 위해선 지금보다 더 좋은 회사 만들어야 합니다. 복지도, 고용도 최고의 환경이 만들어지는 시점이 올 거예요. 그땐 저도 제게 ‘그래, 잘했어’라고 칭찬해주고 싶어요.”
경희 대표는…
1986년 이화여자대 불문과 졸업.
1990년 캘리포니아주립대학원 MBA 취득.
1986~1988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근무.
1997~1999년 교육인적자원부 교육행정사무관.
1999년~현재 한경희생활과학·한경희뷰티 대표.
2012년 포브스 아시아 ‘아시아 파워 여성기업인 50인’ 선정, 뉴스위크 ‘2012 세계를 움직이는 여성 150인’ 선정.
이윤경 기자 ramji@hankyung.com
사진 김기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