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OM, 영원한 우리들의 꿈

최선호의 디자인 오디세이

아톰은 꿈의 캐릭터다. 1970년대 공상과학 만화영화 ‘우주소년 아톰’의 주제가가 흑백 TV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면 아톰이 금방이라도 브라운관을 뚫고 하늘로 치솟아 오를 것만 같았다.

데쓰카 오사무, ‘우주소년 아톰’ 만화, 학산문화사, 2001년


아톰은 데쓰카 오사무(手塚治蟲·1928~1989)의 장편만화 ‘철완 아톰(鐵腕 アトム·한국명 우주소년 아톰)’의 주인공이다. 아톰은 인간의 감성을 가진 로봇이다. SF영화에 나오는 무한한 괴력을 뿜어내는 무자비한 쇳덩어리 괴물이 아니다. 우주를 날고 엄청난 수학적 두뇌를 가졌지만 영원히 인간이 될 수 없는 우주의 외톨이다. 아톰의 얼굴에 보이는 강직한 어린아이의 천진함은 데쓰카가 만든 아톰의 철학을 그대로 보여주는 실증이다. 그 천진함 속에는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로봇만의 비애가 담겨 있다. 비극은 언제나 영원성을 간직한다. 승리와 환희는 쉽게 묻히지만 아픔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예술이 지향하는 미감도 따지고 보면 슬픔이다. 슬프도록 아름다운 미감은 미의 정범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비극적 요소를 찾아 볼 수 없는 평범한 저녁식사 모습이지만 그 속에는 배반과 음모와 지력과 삶과 죽음이 넘나드는 비극으로 가득하다. 종교의 속성은 비극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천국을 갈망하는 것은 현세가 비극적이기 때문이다. 데쓰카의 아톰은 로봇의 비애를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주는 과학으로 바꾼 희망의 대명사다.

데쓰카 오사무


꿈과 희망

데쓰카는 1928년 11월 3일 일본 오사카 도요나가시에서 태어나 효고현 다카라즈카에서 성장했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 작은 키에 곱슬머리, 지독한 근시로 두꺼운 안경을 쓰고 다녀 아이들의 놀림을 받았지만 자식이 만화를 그려 자신의 꿈을 키우는 모습을 보고 장난감 대신 만화책을 사다준 아버지와 의사와 만화가 사이에서 진로를 고민하다가 “네가 만화가 그리 좋다면 도쿄에 가서 만화가가 되어라”라는 어머니의 결정적인 충고 한마디에 만화가의 길을 가게 됐다.

데쓰카는 전쟁이 끝난 이듬해 1946년 4월 오사카대 의학부에 진학해 의학 공부를 하면서 그 해, 지역신문에 4컷 만화 ‘마짱의 일기’로 당선해 만화가로 데뷔한다. 1951년에 의대를 졸업하고 인턴으로 근무하다가 국가고시에 합격해 개업의 면허를 갖게 된다. 그때의 일을 ‘지킬박사와 만화씨’라는 데쓰카의 수필에 “의과대학 계단식 강의실에서 노트와 함께 켄트지를 펼쳐놓고 수업 중에 만화를 그리다가, 수업이 끝나면 나카노시마 다리 밑에서 교복과 교모 대신 가방 안의 베레모와 점퍼를 꺼내 입고 스스로 의사에서 만화가로 변신했다”고 담담하게 적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1961년에 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당시 만화가는 사회적 지위로 보나 경제적 안정 측면에서 보나 의사보다 더 낫다는 명분도 실리도 없었다. “네가 하고 싶으면 하라”는 어머니의 충고 한마디에 데쓰카는 힘들고 먼 만화가의 길을 즐겁고 용감하게 나아갔다.

1950년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이후 잿더미로 변한 일본은 전범국가로 낙인 찍혀 암담한 현실과 만연한 무기력증, 패배주의가 온 나라에 팽배했다. 그는 의사로서 병상에서 죽어가는 환자를 무수히 보았다. 인간이 왜 살아야 하고 인간 정신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데쓰카는 만화로 꿈을 잃은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불러 일으켜 주고 싶었다. 새 나라를 건설하려는 의지가 일본 여기저기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할 때 그의 만화는 국민의 활력소가 되고 꿈의 에너지가 됐다. 그때 ‘철완 아톰’의 장면 장면을 웃고 울며 보던 아이들과 청소년이 바로 지금의 일본 경제를 움직이는 주역이 됐다. 과학과 우주와 힘과 용기가 경제와 사회 문화 전반의 기틀이 된 것이다.

우주공상 과학만화 하나가 훗날 우주선을 쏘아 올리고 우주과학의 선진국을 만든 기반이 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않았다. ‘철완 아톰’은 단순한 어린이의 심심풀이 오락거리 만화가 아니라 50년, 100년 후의 미래를 내다보고 만든 데쓰카 만화의 꽃이다.

데쓰카 오사무, ‘우주소년 아톰’ 만화, 학산문화사, 2001년


아톰의 탄생

‘철완 아톰’은 인간의 마음을 갖고 태어난 로봇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고민한다.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로봇 같은 기계의 미래 세상이라도 사랑과 우정, 용기와 헌신 같은 인간의 보편적 가치만이 세상의 희망이라는 데쓰카의 철학이 담긴 작품이다. 아톰은 1951년 어린이 잡지 쇼넨(少年)에 ‘철완 아톰’의 연재를 시작해 1968년까지 계속했다.

만화는 아톰이 50년 뒤의 아득한 미래인 2003년 4월 7일 신주쿠의 다카다노바바에 있는 과학성에서 태어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일본 과학청 장관 덴마 박사는 아들 도비오를 교통사고로 잃고 아들을 잃은 슬픔을 대신해 아톰을 개발하게 된다. 아톰은 아들처럼 똑똑하고 귀여운 어린아이의 외모를 가진 로봇이지만 인간의 감정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외모에 자괴감을 느끼며, 아이들 사이에서 소외되고 외로워하는 로봇이었다.

덴마 박사는 자신이 만든 로봇 아톰을 실패작이라고 여기고 로봇서커스단에 팔아넘긴다. 아톰은 서커스단을 전전하다가 로봇에도 인권이 있다는 믿음을 가진 오차노미즈 박사를 우연히 만난다. 코주부에 하얀 가운을 입은 인자한 과학자 할아버지 캐릭터가 바로 이분이다. 오차노미즈 박사는 아톰에게 정직한 인간의 마음과 일곱 가지 초능력을 가진 로봇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 즉, 제트 분사로 하늘을 날고, 60개국 언어를 구사할 줄 알며, 사람의 선악을 구별하고 청력을 1000배까지 높였으며, 눈에서 빛을 발해 비출 수 있고, 엉덩이에서 기관총이 나오고, 10만 마력의 힘이 그것이다. 아톰은 단순히 인간을 흉내 내는 서커스 로봇이 아니라 악당을 물리치고 적을 쳐부수며 인류의 평화를 위해 싸우는 정의의 로봇으로 거듭난 것이다.

아톰, 양철·플라스틱, 높이 22.5cm, 비루켄 쇼카이, 1960년대


2003년, 아톰이 만들어지는 시나리오는 다음과 같다.

1974년에 원자력에 의한 초소형 전자계산기가 발명되고 1978년 전자두뇌 개발, 1982년에 들어서서 전자 눈을 갖춘 인간 형태의 로봇이 만들어진다. 1950년대 당시 로봇은 금속제이지만 플라스틱에 의한 인조 피부의 개발로 1984년 드디어 인간과 같은 신체구조를 갖추게 된다고 생각하고, 세계 여러 나라에서는 비밀리에 로봇 개발 경쟁을 하게 된다. 마침내 2003년 일본은 로봇이 인간과 유사하게 감정과 의지를 가지고 언어도 가능한 ‘철완 아톰’을 탄생시킨다. 이와 함께 “로봇은 인간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다”라고 규정된 로봇법 제1호를 제정한다.

1951년, 50년 뒤의 아득한 미래를 마치 예언이라도 한 듯 만든 시나리오에서 아톰은 살아 움직인다. 마치 나무인형 피노키오가 용기와 정의로 진짜 소년이 되는 것처럼, 꿈같은 로봇 ‘아톰’이 만화에서 현실로 태어나는 순간이다. 1950년대 당시의 과학 현실로 본다면 엄청난 비약이요, 꿈의 세계다. 미래를 보는 데쓰카의 혜안이다. 만화 속의 세계였기에 우주를 날아다닐 수 있었고, 만화 속의 세계였기에 인간이 되지 못하는 슬픔을 그려낼 수 있었다. ‘철완 아톰’은 단순히 어린이용 만화가 아니라 일본 경제를 부흥시킨 일종의 희망 교과서였다.

최선호, ‘아톰-1’, Mixed media, 150×135×85cm, 2003년


우리들의 꿈

아톰은 미래 도시로 나아가 세상의 악의 무리와 우주와 지구의 평화를 지키는 아이들의 꿈이요 희망이자 용기였다. 아이들 세상은 먹고 사는 욕망의 세상이 아니다. 꿈을 그리고 꿈에 젖어 무럭무럭 자라는 천진무구한 세상이다. 거기에서 미래의 꿈이 심어져 사춘기가 지나고 현실의 벽을 건너오면 비로소 세상과 직면한다. 그때 유년기의 꿈을 갖고 있고 없고가 중요하다. 꿈이 있으면 꿈이 발아해서 현실에서 꿈을 키워 실현한다. 어릴 적 꿈이 없다면 어른이 돼 다시 꿈을 심기에는 마음의 토양이 이미 너무 많이 세상의 욕망에 오염돼 있다. 자의가 아닌 타인의 의지로 심어진 욕망의 꿈은 그만큼 이루기 어렵다. 아이들 눈에는 실현 불가능한, 실현 가능한, 최대치의 기대와 최고의 의지와 무한대의 세상을 모두 담아낼 수 있다. 가능하기에 세상의 꿈은 값지고 어린아이의 꿈은 아름답다. ‘철완 아톰’은 영원한 우리들이 꿈이다.



‘철완 아톰’은 자연과 인간성을 외면한 채 오직 진보만을 추구하는 과학기술을 보여주려고 하지 않는다. 아톰은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는 로봇이다. 아톰이 인간이 되고 싶어 학교에 다니는 장면이 있는데, 수학 문제를 순식간에 풀어버리고 운동 실력도 월등히 뛰어나다. 하지만 그 때문에 아톰은 엄청난 소외감을 느낀다. 그 허전함과 슬픔을 아톰이 혼자 빌딩 옥상 위에 걸터앉아 있는 모습으로 표현했는데, 과학은 결코 인간의 순수와 감성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하고 있다.

나 어릴 적 동네 어귀 만화방의 불기운도 없는 후미진 연탄난로 옆에서 짧은 겨울해가 지는 줄 모르고 만화를 보았다. 그 만화를 이제 어느덧 중년의 세상에서 다시 만난다. 그때 본 그 만화의 감동을 어른이 되도록 잊지 못하고, 아이처럼 아톰 캐릭터를 찾아 신주쿠 장난감 가게를 어른거렸다. 지난날의 추억은 모두 아름답지만 추억의 만화방은 여리고도 아련하다. 세상에는 여러 번 만날 것 같은 필연이 있지만 우연이든 필연이든 모두 한 번뿐이다. 한 번의 만남은 그것으로 끝이다. 다시는 똑같은 만남이 돌아오지 않는다. 세상이 같다고 해도 내가 달라져 있다. 그래서 어릴 적 기억이 소중하다. 언제 무엇을 만나느냐가 중요하고 누구의 가르침인가가 중요한 것이다. 만화방에서 숨죽이고 보았던 만화 속 상상의 날개는 현실이 된다. 순정만화의 환희는 현실의 눈물이 되고 공포의 엽기는 픽션이 된다. ‘철완 아톰’은 과학과 우주로 나아가는 과학자의 ‘소학(小學)’이 아니라 어른으로 나아가는 전공필수였다는 것을 이제야 알 것 같다.
잠자는 아톰 시계, 플라스틱, 30×13×14cm, 데쓰카 프로덕션


데쓰카는 ‘철완 아톰’을 비롯해 ‘불새’, ‘블랙잭’, ‘리본의 기사’, ‘아폴로의 노래’ 등 700여 편의 만화와 ‘밀림의 왕자 레오’, ‘숲의 전설’ 등 수많은 애니메이션을 남겼다. 1989년 2월 9일 위암으로 세상을 뜨기 직전까지 병원 침대에서 펜을 쥐고 있었던 데쓰카의 최후의 한마디는 “일할래. 일하게 해줘”였다고 한다. 세상의 어른들이여, 날아라! 우주를 지키고 정의에 맞서 싸우는 용감한 우주소년 아톰처럼!
아톰 저금통, 플라스틱, 높이 102.5cm, 다이와(大和)은행


오차노미즈 박사, 플라스틱, 높이 70.8cm, 비루켄 쇼카이


최선호 111w111@hanmail.net
서울대 미술대학 회화과 동 대학원, 뉴욕대 대학원 졸업.
국립현대미술관, 삼성미술관 리움, 시카고 스마트뮤지움,
버밍햄 뮤지움 등 작품 소장. 현재 전업 화가. 저서 ‘한국의 미 산책’(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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