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STIC ART STORY
1890년 카를로스 슈바베(Carlos Schwabe·1866~1926)라는 야심 만만한 독일계 청년이 파리 화단의 문을 두드렸다.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나 변변한 교육 한 번 받지 못한 그는 우연히 제네바 산업미술학교 교사인 조제프 미테의 눈에 들어 본격적으로 미술 교육을 받게 됐고, 나중에는 스위스 정부의 장학금까지 받게 돼 파리로 유학을 오게 된 것이었다. 당시 파리는 세계 미술의 중심으로 예술가를 꿈꾸는 이들이 선망하는 도시였다.파리에서 슈바베를 처음으로 알아본 사람은 조스팽 펠라당(1859~1918)이었다. 가톨릭의 열렬한 신봉자였던 펠라당은 문인과 예술가를 중심으로 장미십자가단이라는 조직을 결성하는 한편 살롱전을 열어 예술과 비교(秘敎·esotericism)의 신비주의를 결합하려 했다. 그는 종교, 신비주의, 전설, 꿈, 알레고리와 시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만 자신의 살롱전에 출품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1892년 제1회 전시회의 포스터를 구상 중이던 그는 슈바베야말로 자신의 의도를 잘 대변할 수 있는 화가라는 점을 깨닫고 그에게 접근했다.
이 이국에서 온 청년은 펠라당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이상세계를 향해 계단을 오르는 두 여인과 이들을 바라보는 물질주의에 젖은 한 여인을 담은 전시회 포스터는 즉각 파리 미술 애호가들 사이에서 화제를 모았고 장미십자가단의 첫 살롱전을 성공으로 이끄는 계기가 됐다.
그런데 이 일은 화가를 꿈꾸던 슈바베의 인생 항로를 결정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된다. 그의 범상치 않은 상상력과 장식적 테크닉을 눈여겨본 출판업자와 작가들이 그에게 문학작품의 삽화 제작을 의뢰했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당대 출판계의 거물 에른스트 플라마리옹이 맡긴 에밀 졸라의 소설 ‘꿈’의 삽화 23점은 그가 삽화가로서 명성을 드높이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하게 된다.
그러나 작품의 탄생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소설을 통해 현실의 부조리를 파헤치던 골수 자연주의자 졸라와 자연주의의 지나친 사실성에 반발, 현실 저편의 세계를 통해 상징적 의미를 전달하려 했던 슈바베는 태생적으로 맞지 않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슈바베의 작품을 받아든 졸라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현실에 바탕을 둔 자신의 소설이 몽환적인 초현실 세계로 둔갑했기 때문이다. 불편한 심사를 드러내는 대가를 향해 슈바베는 “잔말 말고 그대로 사용하세요”라고 배짱 좋게 대들었다고 한다. 그것은 곧 리얼리즘과 반리얼리즘의 대립이라는 당시 프랑스 예술계의 미학적 갈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슈바베가 화가의 꿈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1891년부터 파리 국립 살롱전에 상징주의 경향의 작품을 지속적으로 출품했고, 살롱 도톤(Salon d’automne)에도 작품을 선보였다. 그는 쥘 부아, 에두아르 슈레 같은 신비주의자들과 교유하면서 상징주의적인 색채와 불가사의한 분위기를 강화시켜 나갔다.
특히 그는 1894년 자신의 절친한 친구였던 작곡가 기욤 레크가 24세로 요절한 데 충격을 받은 뒤부터 죽음이라는 주제에 집착한다. 상징주의의 최대 걸작 중 하나로 평가되는 ‘묘지 파는 인부의 죽음(1895)’은 바로 이 시기에 나온 작품이다. 죽은 자의 시신을 거둬 가는 죽음의 천사(저승사자)를 묘사한 이 작품은 슈바베의 기발한 상상력과 인간 삶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력을 잘 보여준다.
그림 속에서 커다란 낫 모양의 초록색 날개가 달린 천사(화가 자신의 부인을 모델로 했다)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묘지의 구덩이를 파다가 불의의 죽음을 맞이한 인부의 얼굴을 슬픈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것은 우직하게 자신의 삶의 웅덩이를 파지만 결국은 그 웅덩이 속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을 상징한다.
그 현실의 둥그런 웅덩이는 그의 영혼을 영생의 세계로 인도하는 천사의 둥그런 날개와 대비된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차가운 묘혈에서 외롭게 최후를 맞이한 인부의 뒤편으로 눈으로 얼어붙은 공동묘지의 스산한 광경이 오버랩된다.
1903년 작인 ‘엘리시언 필드(Elysian Fields)’에도 그의 죽음에 대한 관심이 잘 표현돼 있다. 엘리시언 필드는 사후세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고대에는 신화적인 영웅들이 갈 수 있는 하얀 섬(혹은 축복의 섬)과 덕망 높은 사람들이 간다는 지하세계 두 곳을 지칭했다.
그림을 보면 손에 칠현금(七絃琴)인 라이어를 든 여인이 향기로운 꽃으로 인도되는 저승길을 걸어가다가 이승을 바라보며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다. 비록 영생이 약속된다고 하지만 이승의 행복과 사랑하던 이를 뒤로 한 채 떠나는 인간의 발길은 무거울 수밖에 없음을 작가는 말해주고 있다.
이렇게 죽음의 의미를 파헤치던 상징주의의 대가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 역시 묘지 파는 인부의 신세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불행 중 다행일까. 그는 다시 부활했다. 지난 3월 5일 개막해 화제를 모으고 있는 파리 오르세미술관의 ‘검은 낭만주의’전에서 중심 작가로 재조명받고 있기 때문이다.
미술관 측은 그의 ‘묘지 파는 인부의 죽음’을 이번 특별전의 대표작으로 선정하는 한편 이 작품을 토대로 전시 포스터를 제작, 슈바베에게 최상의 오마주를 헌정했다. 불행을 행복인 줄 착각한 채 파국을 향해 맹목적으로 달려가고 있는 현대인의 처지를 일찌감치 일깨운 예언자에 대한 너무나 당연한 대우였다.
정석범 한국경제신문 문화전문기자.
프랑스 파리1대학에서 미술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 홍익대, 명지대 등에서 강의했고 저서로 ‘어느 미술사가의 낭만적인 유럽문화기행’, ‘아버지의 정원’, ‘유럽예술기행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