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프레더릭 와츠, 신화 속 이미지로 그려낸 현실의 부조리

MYSTIC ART STORY

‘미노타우로스’, 1885년, 캔버스에 유채, 117×93cm, 런던 테이트 갤러리

늙은 황소 한 마리가 망망대해를 목이 빠져라 바라보고 있다. 그는 아마도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그의 모습이 좀 이상하다. 그의 신체는 사람을 닮았기 때문이다. 상체는 근육이 울퉁불퉁한 게 마치 젊은 남성처럼 건장하고 손은 영락없는 사람의 그것이다.

난간처럼 생긴 구조물 위에 기대어 서 있는 자세도 사람의 제스처를 연상하게 한다. 이쯤 되면 뭔가 떠오르는 게 있지 않을까. 그렇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미노타우로스다. 황소와 사람이 뒤섞인 그 반인반수(半人半獸)말이다.

미노타우로스는 미노스왕의 비(妃)인 파시파에가 황소와 사랑을 나눠 태어난 괴물로 미노스왕은 그를 크레타섬의 미궁(迷宮)에 가둔 채 해마다 아테네에서 선발된 7명의 처녀와 7명의 청년을 제물로 바치게 했다. 그림은 바로 제물을 기다리며 조바심을 내고 있는 미노타우로스를 그린 것이다.

조지 프레더릭 와츠(George Frederic Watts·1817~1904)가 그린 ‘미노타우로스(1885)’는 수많은 미노타우로스 신화를 묘사한 그림들과 다르게 화면 전반에 신비한 분위기가 감돈다. 먹구름이 잔득 낀 하늘과 바다가 서로 뒤섞여 수평선이 어딘지 분간하기 어려워진 데서 오는 무한한 공간성, 뒤로 돌아서서 정면을 보여주지 않는 괴물의 사색에 잠긴 듯한 뒷모습이 사뭇 낯선 느낌을 자아낸다.

그림을 그린 와츠는 당대의 이단아였다. 피아노 기술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화가로서 재능을 드러내 18세에 왕립예술원(로열아카데미)에 입학했고 1843년에는 웨스트민스터 사원 벽화 공모에서 1등을 차지하는 등 발군의 실력을 드러냈다.

이탈리아 유학 후에는 예술 애호가인 발레리 캐머런 프린셉과 그 부인의 거처인 ‘작은 네덜란드의 집’에 21년간 머물며 보헤미안적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의 보헤미안적 삶은 기성의 윤리와 도덕에 대한 도전이라기보다는 불합리한 고정관념으로부터의 자유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와츠는 근대의 지식인이나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다윈의 진화론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그는 그림을 통해 삶의 다이내믹한 에너지와 진화를 표현하려 했다. 이를 위해 그는 서양 문화의 범주를 넘어 전 인류의 다양한 신화를 진화론적 시각 아래 통합하려 했다. 그것은 때론 보편적인 가치의 상징으로, 때로는 사회 현실의 부조리에 대한 비판으로 표현됐다.

‘미노타우로스’는 바로 그런 관점 아래 제작된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다. 신화의 외양을 한 이 작품 속에는 빅토리아조의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던 아동 매춘에 대한 비판의식이 담겨 있다. 당시 영국에서는 10대 초반의 나이 어린 아이들이 몸을 파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돈 많은 이들은 무료함을 달랠 새로운 자극이 필요했고 어린 여자아이들을 그런 자신들의 탐욕의 제물로 삼았다. W. H. 스테드는 현대의 ‘바빌론에 바쳐진 소녀 제물’이라는 논문을 발표, 유아 매춘에 대해 경종을 울렸고 결국 의회는 매춘 허용 연령을 종전의 13세에서 16세로 개정하기에 이르렀다.

와츠의 ‘미노타우로스’에 보이는 추한 황소 머리에 야수 같은 근육질을 한 괴물은 추악한 부자들을 그린 것이다. 황소의 우악스런 왼손 아래 퍼덕이는 새는 그들에게 유린당한 어린 소녀들의 순수함과 순결을 상징한다.

‘희망’, 1886년, 캔버스에 유채, 141×110cm, 런던 테이트갤러리

자신의 현실 인식을 신비한 신화적 이미지를 통해 전달하는 방식은 ‘희망(1886)’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눈을 가린 한 여인이 거대한 구체 위에 올라 탄 모습을 묘사한 이 그림에는 희망보다는 절망의 분위기가 짙게 풍긴다.

앞을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하나밖에 남지 않은 현을 뜯으며 귀 기울이는 모습에서 그 누가 희망을 떠올릴까. 게다가 이 작품은 와츠가 의붓딸이 죽은 후 절망감에 빠져 있을 때 그린 것이다. 비평가들은 그런 제목을 붙인 데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나 그는 “단 하나의 코드로라도 연주할 수 있다면 그것은 희망”이라고 강변했다.

‘우주의 창조자’, 1902년, 캔버스에 유채, 141×110cm, 런던 테이트갤러리

상징적 묘사 방식은 ‘우주의 창조자(1902)’에서 그 절정에 달한다.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는 순간의 모습을 그린 이 그림의 묘사 방식은 가히 혁명적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하나님은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나듯이 수염이 덥수룩한 노인으로 그려지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얼굴은 드러내지 않은 채 몸의 다이내믹한 움직임을 거의 추상에 가까운 모습으로 거칠게 묘사했다. 추상표현주의보다 40, 50년이나 앞섰으니 와츠의 작품이 얼마나 시대를 앞서갔는지 짐작할 수 있다.

‘기록하는 천사’, 연대 미상,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와츠는 작품에 대한 입장만큼이나 자신의 삶에 대해서도 확고한 입장을 보였다. 그는 예술가의 본분은 작품에 전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모든 세속적 명예에 초연했다. 남작의 작위를 수여하겠다는 빅토리아 여왕의 제의를 두 차례나 뿌리쳤고 로열아카데미의 원장 자리도 거절했다.

그런 비타협적인 품성 때문일까. 그에 대한 당대의 평가는 상당히 야박했다. 자신만의 신화 세계를 구축하고 그로부터 내적인 진실을 찾는 데 평생을 바친 와츠의 생애를 두고 비평가들은 ‘영국 미술의 위대한 실패’라고 냉소를 보냈다. 정작 비난받아야 할 것은 그의 내적 진실을 바로 볼 줄 모르는 우리 자신이 아닐까.


정석범 한국경제신문 문화전문기자.
프랑스 파리1대학에서 미술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 홍익대, 명지대 등에서 강의했고 저서로 ‘어느 미술사가의 낭만적인 유럽문화기행’, ‘아버지의 정원’, ‘유럽예술기행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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